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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법계삼관, 중도와 통합을 이루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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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5 월 [통권 제4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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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를 보는 세 가지 관점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사회는 또 한 번 분열과 갈등을 경험했다. 물론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해법을 찾아가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이다. 문제는 대화와 토론은 실종되고 분열과 갈등만 증폭되는 장면이다. 그런 과정이 되풀이되면 갈등을 조율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늘어나고 구성원들도 지치기 마련이다. 이렇게 의견이 충돌하고 대립이 격화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라는 말이다. 좌와 우를 통합하고, 대립과 갈등을 푸는 통합의 가치로 중도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주장은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을 위한 대안 제시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중도는 대립하는 두 당사자의 의견을 절충하는 것 정도로만 이해될 뿐 어떻게 해야 중도를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다. 서로 반반씩 양보해서 기계적 중립을 이루는 것이 중도인지, 아니면 철저하게 올바른 것을 실현하는 것이 중도인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와 내용이 없다면 중도는 추상적 담론이나 관념적 주장으로 치부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부처님께서 중도를 깨달았다고 했을 중도는 법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이며, 존재의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심오한 교설이다. 성철 스님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중도를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중도설은 단일한 교설이 아니라 다양한 논사들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용수 보살은 중관사상으로 중도를 설명했고, 천태지자는 쌍차쌍조로 설명했으며, 화엄학에서는 법계삼관이나 사법계설로 설명했다.

 

법계삼관(法界三觀)은 화엄종의 초조 두순 화상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이 역시 존재의 중도성을 설명하는 교설이다. 두순 화상은 법계(法界)의 실상에 대해 진공절상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했다. 물론 여기서 법계란 단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간세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계란 인간계를 포함해 온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우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법계삼관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화엄종의 중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법계삼관 역시 사람들의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교설이다. 하지만 존재와 우주에 대해 바로 이해하고, 바른 안목이 열리면 세상과 사람에 대한 바른 안목도 열리는 법이다. 대립을 넘어서는 소통과 갈등을 해소하는 화합은 여기서 가능해진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확립될 때 자기중심적 변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타자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통합의 자세가 나온다. 여기서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해는 변견과 대립을 넘어 통합과 공존의 가치관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실상을 보는 법계삼관

 

법계삼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공절상관(眞空絶相觀)’이다. 법계의 실상을 보면 모든 존재는 텅 비어 있어[眞空] 개별적인 모습들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絶相]이다. 법계의 실상을 보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존재들의 실체가 텅 비어 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무수한 개체들이 존재하고, 저마다 독자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단지 현상적 모습일 뿐 실상은 텅 비었음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진공절상관이다.

 

둘째는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이다. ‘이(理)’는 본체 또는 근원적 원리를 말하고, ‘사(事)’는 다양하게 펼쳐진 현상적 모습을 의미한다. ‘이’란 모든 존재의 텅 빈 실상을 나타내는 원리이며, ‘사’란 우리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공한 실상과 눈앞에 펼쳐진 존재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실상에서 보면 공하지만 분명히 현상적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고, 눈앞에 존재하지만 또 그 실상을 보면 텅 비어 있다. 이렇게 실상과 현상은 걸림 없이 서로 소통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두 번째 이사무애관이다.

 

셋째는 ‘주변함용관(周徧含用觀)’이다. ‘주변(周徧)’이란 두루 퍼져나가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존재는 텅 비어 있고, 그 실체가 공하다는 근본 원리는 모든 사물에게 두루 확산되어 적용되는 진리다. 반면 ‘함용(含容)’이란 다양한 존재들이 하나의 원리로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공하다는 진리는 천차만별로 펼쳐진 존재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무수한 개별적 존재자들의 특성이 하나로 수렴된 결과가 공이라는 실상이다.

 

성철 스님은 확산과 수렴의 관계를 하늘의 달과 천강에 비친 달그림자의 관계로 설명한다.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이 지상의 모든 강물에 은은한 빛을 드리우는 것은 ‘주변’이다. 천강에 달빛이 반짝이고 있지만 그 모든 달빛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강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달빛이 하늘의 달로 수렴되는 것이 ‘함용’이다. 결국 주변함용은 하나가 전체로 확산되고, 또 전체는 하나로 수렴되는 원리를 말한다. 모든 존재들은 달빛으로 상징되는 공이라는 실상의 원리를 공유한다. 하지만 그 원리는 수많은 존재들의 개별적 특징들이 수렴되어 성립된 원칙이다.


중도를 실현해 가는 단계

 

이상과 같이 법계삼관은 존재의 실상을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관점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중도를 실현하는 방법론으로 적용해 볼 수 있다. 단 법계삼관에서 삼관이란 세 가지 관점을 말하지만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중도로 적용할 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째 진공절상을 통해 완전한 공을 체득하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을 실현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와 생각 같은 각자의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단지 물리적 통합을 중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와 너라는 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소통될 수 없는 장벽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단계는 그런 장벽을 걷어내는 것이다.

 

진공절상이란 철저히 공(空)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모든 차별적 상(相)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너의 견해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중도로 가는 첫 번째 단계가 된다. 그렇지 않고 나는 나의 고집을 견지하고, 너는 너의 견해를 고집하면 아무리 물리적 통합을 시도해도 화합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중도적 통합을 추구한다면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먼저 각자의 생각부터 내려놓는 것이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사무애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다. 나와 너라는 대립과 분절을 넘어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네가 되는 상호 소통의 단계이다. 철저하게 공을 깨달으면 각자의 개별상을 넘어설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완전한 소통과 걸림 없는 통합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진공절상을 통해 나와 너라는 경계가 해체되고,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차별상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와 너라는 장벽에 가로 막혀 있으면 각자의 경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런데 만법으로 표현되는 삼라만상은 서로 걸림 없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상태에 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서로 걸림 없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실체가 공(空)하여 자신만의 고립적 경계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주변함용은 보편적 원칙의 확산과 개별적 특수성의 수렴이다. 각자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고 대화와 소통을 통해 보편적 원칙을 세우는 것을 ‘주변’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구성원들에게 확산되어 누구나 따르고 지켜야 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 원칙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개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통해 합의된 원칙이다. 구호로서 중도가 아니라 정말 중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계삼관에서 제시하고 있는 세 단계, 즉 해체, 소통,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법계삼관의 순서대로 하면 먼저 나와 너라는 각자의 견해를 미련 없이 내려놓는 진공절상의 자세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쌍방 간에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는 생각의 ‘해체’가 첫째인 셈이다. 다음 단계는 각자가 자유롭게 대화하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모두가 따라야할 보편적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중도의 실현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자기해체, 걸림 없는 상호소통, 무수한 개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보편적 원칙을 만드는 합의라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법계삼관은 고담준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중도를 실현하는 원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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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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