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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팔순八旬에 다시 보이는 성철 큰스님 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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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5 12:11  /   조회6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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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 세대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말을 젊은 날부터 귀가 따갑게 들으며 살아왔고, 소납도 70살까지 살면 다행이다 하고 늘 마음속에 담고 살았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내가 팔순이 되었네. 언제 이렇게 세월이 갔지?!” 하며 놀라고 참담한 감상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팔순이나 살 것 같았으면 진작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좀 더 부지런히 살았어야 했는데…” 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는 못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사진 1. 만개한 철축꽃을 보며 성철 큰스님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 사진: 하지권.

 

소납은 출가 후 22여 년을 성철 종정 예하를 옆에서 모시며 살았고, 그 후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사형사제 스님들과 신도님들과 함께 마음을 합쳐 백련암을 지켜왔습니다. 그 세월 동안 고심원에 올라 성철 종정 예하의 존상尊像에 예를 올릴 때마다 늘 죄송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참회를 올립니다.

 

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성철 종정 예하께서는 1967년 7월에 해인총림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에 추대되어 동안거 100일 동안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인연 있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선과 교와 선종어록 등을 포함한 대강설을 성대하게 베푸셨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부대중이 백일법문을 다시 듣거나 보고 싶어 했지만 그 방대한 녹음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사리 보고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납은 1972년 1월에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행자 시절을 보내고 계를 받은 후 기본 소임을 맡아 2~3년이 지나서 화두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기병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전설처럼 전해지는 큰스님 강설 테이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인 원명스님이 카세트 테이프로 정리해 둔 것이 모두 56개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내용도 어려운 데다가 경전과 어록의 원문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계신 큰스님의 말씀이 너무 빨라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납은 상기병을 다스리기 위해 테이프를 녹취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한 시간짜리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글로 옮기는 데 꼬박 5~6시간이 걸렸습니다. 녹취 원고를 대강 끝내 놓고 보니 그 내용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 전반에 대하여 강설을 하셨는데 단순히 개론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법문의 핵심을 중도사상에 두고 인도의 근본불교(니까야)에서 중관, 유식 그리고 중국의 천태, 화엄, 법상, 열반 등 교학과 선종사상, 우리나라 선종사상 연구 및 오늘의 선문禪門이 나아갈 길까지 언급해 두신, 참으로 방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중 선어록에 해당하는 법문들만 우선 정리하여 『신심명·증도가 강설』과 『돈오입도요문론』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습니다. 백일법문 가운데 교학적인 부분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또 수년간 묵혀 두었는데, 원영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원고 정리를 부탁하여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 성철 종정 예하께서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써 선과 교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득의연한 말씀을 자주 하셨던 기억입니다. 돌이켜보면 이 백일법문이 정리되어 출판되기까지 거의 3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1992년 4월 30일에 『백일법문』은 상·하 2권으로 초판 발행되었습니다.

 

사진 2. ‘법맥후속’이라는 제목이 적힌 노트.

 

그 후 2004년 3월 25일, 다시금 큰스님 강설 테이프를 정리하고 보니 예전에 녹취한 테이프 외에 누락된 것을 합하니 거의 100여 개나 되었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하여 MP3용 CD 3장으로 만들어 전국 선원에 법보시로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정리된 MP3 CD 세 장의 내용을 다시 정밀하게 녹취하여 2014년 11월 14일에 ‘개정 증보판’ 『백일법문』 상·중·하 3권을 출판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 백일법문을 하신 지 47년 만에 온전한 내용을 갖춰 책으로 만들었으니 소납은 새삼 감격스럽고 반가웠으나 성철 종정 예하께는 상좌로서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학문 연찬의 불씨를 지핀 『선문정로』

 

성철 종정 예하께서는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두 권의 책을 발간하시고는 “나는 이제 부처님께 밥값 했다.”라고 하시며 너털웃음을 짓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큰스님께서는 1981년 1월 1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시고, 그해 12월 15일에 『선문정로』를 간행하여 각 사찰과 스님들에게 법보시를 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선문정로』를 통해 선종의 정통사상은 달마대사를 이어서 육조 혜능대사의 돈오돈수로 수행하는 것임을 밝히시며, 보조국사는 규봉스님의 돈오점수를 중심으로 하니 선종의 정통이 아니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선문정로』의 발행으로 한국 불교학계에서 선종을 연구하는 불교학자들의 거센 반격이 일어났습니다. 보조국사를 종조로 하는 송광사에서는 1983년 보조학회를 중심으로 학술회의를 하고 큰스님께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특히 보조학회에서는 “보조국사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숭배하는 국사의 자격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 모두 존경하여야 하는 큰스님이시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해인총림의 방장으로서 보조국사와는 지위를 다툴 수 없는 스님이 아니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스님 간의 학설의 내용 비교는 없고, 평민이 어찌 국사의 이론을 시비할 수 있는가가 주된 내용이었던 기억입니다. 다른 학회에 가 봐도 학문 연찬은 없고 비판하는 내용은 매일반이었습니다.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이긴 하지만 보조국사를 시시비비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그 후 20여 년 가까이 한국불교의 선학계에선 보조사상연구원을 중심으로 보조스님의 사상 연구와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매년 학회가 열리며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습니다. 백련암과 성철사상연구원에서도 그때그때 학술회의를 열어서 대응했으나 대부분의 불교 학자들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 사상에 익숙해 있고, 다만 몇몇 분들만이 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의 논의를 펼치는 데 그쳐서 소납은 늘 인재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서도 1993년 11월에 열반에 드시고 보조사상계도 한문에 능통했던 일세대 학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의 돈점논쟁 법석도 점점 줄어들어 조용하게 된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모처럼 학술회의나 모임에서 7~80대가 되신 그때의 학자분들을 만나면 당시의 냉담함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서로 반갑게 손을 맞잡으며 “성철 대종사님 계실 때가 우리 선불교계가 모처럼 활발발하였던 시절이었소. 그때가 그립습니다.”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성철 큰스님 유필 자료를 펼치며

 

소납이 성철 종정 예하께 늘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픈 것은 『백일법문』의 출간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일 『백일법문』이 『선문정로』보다 훨씬 앞서서 책으로 출간되어 빛을 보았더라면 돈점 논쟁에 피치를 올렸던 불교학자들이 큰스님의 학문적 역량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돈점논쟁도 보다 수준 높게 이루어졌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진 3. 증도가에 메모해 놓은 자료.

 

소납이 이렇게 자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큰스님이 남기신 많은 노트와 메모들 때문입니다. 그 노트들에는 백일법문, 선문정로, 본지풍광 등 큰스님의 불교사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들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어떤 노트는 붓글씨로, 어떤 노트는 만년필이나 연필로 내용을 옮겨 적으시고 거지반 출전을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 사이사이에서 큰스님의 자작 글을 만나는 기쁨도 누리게 됩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서 남기신 유필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큰스님께서 왜 장경각의 서책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셨는지 알게 됩니다. 큰스님 생전에 이 노트와 메모들을 눈여겨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하늘 같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 옛날 귀에 진물이 나도록 테이프를 듣던 30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이제 팔순八旬의 노인은 눈이 시큰거려 글을 옮겨 쓸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눈을 비비며 유필 자료를 넘겨보면 “큰스님은 어느 한 구절 허투루 말씀하신 게 없구나.”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 4. 백일법문 유필 자료 중에서.

 

학자도 아닌 스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법문 자료를 남겨 놓으셨다는 게 드문 일이라고 여겨 지난해 큰스님 열반 30주년을 마치고 올해부터는 차근차근 노트들을 정리해 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선 탈초를 하여 누구나 자료를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사업단이 3년에 걸쳐 장경각의 책들을 정리하여 해당 사이트(http://kabc.dongguk.edu)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게 하였듯이, 성철 종정 예하의 유필 자료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중도와 돈오돈수를 주창한 성철불교를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든든한 자료가 되리라 봅니다.

 

사진 5.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찾은 원택스님.

 

허허!! 또 헛수고를 하는구나

 

마침 고희古稀도 지나고 팔순八旬이 되니, 또 세상은 변하여 100세 인생을 외치는 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트로트 가수가 부른 ‘9988–1234’라는 노랫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99세까지 88하게, 하루 이틀 삼일만 아프다 가자”라는 뜻이라는군요. 그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맞이한 팔순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 늘 백일법문으로 죄송스럽게 살았던 마음을 떨치고 남아 있는 법문 노트들을 잘 정리하여 큰스님께서 사바세계의 교화를 위해서 행하신 행적을 잘 정리하여 남겨 놓음으로써 후대의 불자들이나 학자들에게 큰 자취를 남겨두는 일에 망구望九의 세월을 보내도 될 듯합니다. 물론 큰스님께서 아신다면 “대무심지大無心地를 깨치는 데 남은 시간을 보내도 시원찮을 판에 저저 또 헛수고한데이….” 하시겠지만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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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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