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길라잡이 ]
왜 절을 3000배씩이나 해야 하나요?
페이지 정보
일행스님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3:37 / 조회2,180회 / 댓글0건본문
신행 생활의 기본이 되는 ‘절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경』 제130호 ‘신행 길라잡이 2’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호에는 3천배에 대해 질문을 해 오신 분이 계셔서 다시 한번 절을 하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질 문]
정림사에 다니는 신도님들은 특히 절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 평소 궁금했던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간혹 스님들의 법문을 듣거나 《불교신문》 등에 실린 글을 읽어 보면, ‘절’은 지극한 마음을 모아 108배라도 한 배 한 배 정성껏 하는 것이 중요하지 많은 양의 절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들 하십니다. 그래서 3000배의 경우에도 엎드렸다 일어서는 동작이 반복되어 그 동작 자체가 힘들어서 나중엔 마음을 제대로 담지도 못한 채 정해 놓은 숫자 채우기에만 급급해질 뿐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고행일 뿐이지 않을까요?
한편으로는 3천배를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은 제 주변에서도 부쩍 절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많이 보입니다만 그분들이 모두 숫자 채우기에만 급급한 분들로는 보이지 않거든요. 절을 강조하고 절을 많이 하는 정림사에서는 ‘절’에 대해 어떤 뜻을 지니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답 변]
마음의 눈을 뜬 분들에게는 본래 ‘중생’은 있지 않다고 합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원만한 존재들(‘각覺의 상태’)이라고 하지요. 다만 이러한 사실을 보지 못하여 모르고 있을 뿐(‘불각不覺의 상태’)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각覺’(부처의 상태)이면서도 ‘불각不覺’(중생의 상태)으로 있는 것일까요?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성철 큰스님 대중법어 중에서.
이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나를 기준으로 삼아 받아들이고 가치를 부여하지요. 나와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익과 선악을 결정하고, 그것에 의해 교차되는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제 입맛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는 주범은 나[我]라고 여기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에고(ego)라고 하며, 이 에고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상태에 있습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 에고가 있는 이상,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진정으로 평화로울 수 없고, 스스로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즉 각覺(부처의 상태)일 수 없고, 불각不覺(중생의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을 하는 것은 내 안의 에고를 덜어내기 위함입니다. 아니 내 안의 에고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남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그 이기적인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거꾸로 남을 높여 주어야 하며 남 앞에서 나를 낮추는 수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철 큰스님께서 우리에게 3천배를 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질문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우리들 주변엔 굳이 3천배씩이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한 번의 절을 하더라도 마음을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모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3천배를 하다 보면 힘이 들어서 ‘퍽 엎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나고, 다시 엎어지고 힘겹게 일어나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원할 때 언제든지 마음을 지극하고 정성스럽게 모을 수 있다면, 사실 절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하는 방법은 달라도 모든 수행은 내가 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절 수행도 내 의식을, 내 정신을 내가 마음대로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는 마음을 지극하게 모으고 싶어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속기도 합니다. 변덕스러운 마음에서 잠시 일으킨 정성이란 심정心情에 젖어 모아졌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얼마나 갈까요? 상황이 바뀌면 저 하늘에 구름이 흩어지듯 금세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 상태입니다. 오랫동안 나의 내면에 깊게 배어 있는 ‘나라는 에고의 습기習氣’가 나를 이토록 산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주인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 번의 절로 될 수 있다면 한 번만 하면 됩니다. 108번의 절로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量이나 횟수가 아니고 질質이겠지요. 하지만 질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양이라도 많이 늘려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꾸 낮추고 낮추다 보면 즉 많이 하다 보면 점점 더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더 자리 잡혀 가지 않겠습니까? 거칠던 마음이, 제멋대로인 마음이 점차로 정밀해지고 길들여지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에게조차 쉽지 않았던 절이 점차로 내 아내, 내 남편, 내 이웃을 향해서도 하게 되고, 나아가서 나의 자녀들이나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도 하게 됩니다.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함께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될 때, 나의 내면은 평정平靜해지고 평안平安이 깃들게 됩니다.
질質은 양量에서 나옵니다. 그냥 되는 것은 없지요.
[당부의 한마디]
끝으로 절을 할 때 참고할 점을 말씀드립니다.
가급적이면 ‘108 예불대참회문’(백련암의식집 참조)에 맞춰 소리 내어 하실 것을 권합니다.
이왕이면 의미를 보다 쉽게 새길 수 있는 ‘한글본’이 좋겠습니다.
참회문을 읊는 소리와 절 동작을 일정하게 맞추고, 숨 들이마시는 시간 또한 절 동작의 어느 부분에 맞춰 규칙적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이 부분은 이미 많은 절을 하면서 익힌 분들마다 다를 수 있어서 어느 것이 맞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맞다 틀리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절하는 동안 자신에게 집중되는 효율적인 방법이 어느 것일까의 측면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소리와 자세의 동작보다는 제가 경험적으로 느낀, 절하면서 챙겨야 할 중요한 점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간략히 말씀드립니다.
-. 우선 절은 상대 앞에서 나 자신을 숙이고 낮추는 행위임을 상기합니다.
-. 그리고 절을 시작하는 내가 읊는 108참회문의 소리를 듣는 데 주의를 기울입니다.
-. 동시에, 진행되는 절 동작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느낍니다.
-. 절을 많이 하다 보면 이 점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하면서 계속 체크해야 합니다.
-. 빨리하려는 조급한 마음보다는 누군가의 대상 앞에서 낮추려는 자기 마음과 그렇게 하려는 간절함이 담긴 소리와 낮추는 동작의 움직임을 지각하면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다수多數의 절을 하다 보면 정적靜的인 상태에서 소리와 동작의 움직임이 마치 여유롭고 일정하게 출렁이는 평온한 물결로 느껴지면서 절하는 게 편안해지고 맑아집니다.
현재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높아지게 됩니다. 의식에도 긍정적인 울림이 있게 되구요.
※ 정림사 일행스님의 글을 더 보실 분은 https://cafe.daum.net/jeonglimsarang을 찾아주세요.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