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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이(理)를 보는 지혜와 사(事)를 보는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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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7 월 [통권 제5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1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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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초여름의 햇살아래 대추열매가 앙증맞게 자라는 계절이다. 비록 지금은 작고 앙증맞지만 싱그러운 잎사귀 뒤에 숨어서 몇 달 더 햇살을 쬐고, 몇 번의 천둥과 번개를 더 맞다 보면 빨갛게 영그는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한 알의 대추를 보고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가 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라는 한 알의 대추는 존재의 실상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존재의 실상은 눈앞에 보이는 대추라는 현상 그 이면에 숨어 있다. 한 알의 대추 이면에 펼쳐진 관계의 사슬 속에 존재의 실상이 숨 쉬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존재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두 측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질은 복잡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사슬로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매몰되고 만다.

 

화엄학에서 말하는 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은 바로 그와 같이 본질[理]과 현상[事]을 동시에 꿰뚫어보라는 가르침이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엄학에서는 삼라만상을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본다. 즉, ‘진공절상관(眞空絶相觀)’, ‘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이 그것이다. 청량징관은 『화엄경법계현경』에서 이사무애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事)를 관하는 것은 속제이고[觀事俗觀], 이(理)를 관하는 것은 진제[觀理眞觀]이며, 이・사가 무애한 것을 관하는 것은 중도관(中道觀)이다. 또 사를 관하는 것은 자비를 겸하는 것[觀事兼悲]이고, 이를 관하는 것은 지혜[觀理是智]이다. 이 둘이 무애하면 곧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悲智相導]하여 무주행(無住行)을 이루니, 또한 그대로 공・가・중도관일 뿐이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 맥락으로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事)는 속제를 보는 것이고, 이(理)는 진제를 보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속제(俗諦)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한 알의 대추와 같은 현상을 말하고, 진제(眞諦)란 그 모든 현상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사상(事象)들이 색(色)이라면 그와 같은 사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은 공(空)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 존재의 ‘참 모습[眞]’이라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한 알의 대추는 ‘거짓 현상’이므로 가(假)가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차별적 현상은 관계적 질서가 드러난 작용이므로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개별적 사물의 이면에 숨어 있는 공(空)은 존재가 맺고 있는 관계적 질서이자 존재의 근본, 즉 체(體)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理)와 사(事)를 함께 통찰하는 중도관이다. 성철 스님은 “이사무애가 다른 것이 아니라 중도를 이사무애”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하나의 물질, 즉 색의 본질을 궁구해 들어가면 색의 근본은 실체가 없는 공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색을 깊이 궁구해 들어가면 색은 사라지고 오히려 텅 빈 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색이 곧 공이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이치가 드러난다. 눈앞에 펼쳐진 천차 만별하는 사상들은 바로 공(空) 또는 이(理)라고 불리는 진제가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공과 색은 서로 소통하고, 이와 사는 서로 전환되는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수법장은 측천무후에게 현상과 본질, 색과 공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다. 그 때 법장은 뜰 앞에 놓여 있는 황금사자상을 가리키며 이와 사, 공과 색이 상호 소통함을 설명했다. 즉 반지, 목걸이, 팔찌 등과 같은 장신구들은 사(事)에 속하는 것들이다. 다양한 모양으로 펼쳐져 있지만 그 모든 것은 금이라는 금속의 속성에서 비롯된 작용이므로 금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장신구들은 다양한 차별상에도 불구하고 금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모든 장신구들을 관통하는 금이라는 속성은 진제가 되고, 사물의 본체인 체(體)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理)와 사(事), 공(空)과 색(色), 체(體)와 용(用)은 겉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상호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반지와 금은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중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도의 눈이다.

 

셋째, 사(事)를 관하는 것은 자비를 아우르는 것[觀事兼悲]이라는 대목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事)란 현상이고 작용이자 겉으로 드러난 속제를 말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습이고,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들이고, 중생세간의 모든 것들이 사에 해당한다. 중생들은 바로 그와 같은 현상을 좇고, 거짓 모습을 보며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의 세계가 비록 현상이고 가짜이고 본체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생을 연민히 여기는 자비심 때문이다.

 

비록 중생이 추구하는 현실의 세계가 뜬구름 같은 것일지라도 그곳에 중생의 꿈과 삶이 있다면 현상의 세계, 사의 세계를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중생들의 삶에서는 민주적 권리를 다투는 것이 중요하고, 노동의 가치와 생존권이 중요하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여 정의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악을 제압하고 선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그런 것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이고, 그야말로 중생놀음이라고 할지라도 자비심으로 중생의 삶을 살피고, 중생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보살이다. 이런 이유로 「보현행원품」에서는 보살은 중생들이 좋아함을 따라서 그들을 성숙시킨다고 했다.

 

넷째, 이(理)를 관하는 것은 곧 지혜라고 했다[觀理是智]. 자비심으로 속제를 인정하고, 자비심으로 현실의 문제를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비심은 완전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해야 중생의 마음이 고요해지고, 삶에 평화가 찾아온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줄 수 있다. 또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지 않고 단잠을 더 자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식을 향한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다. 하지만 좀 더 지혜로운 엄마라면 사탕만 주면 이가 썩는다는 것을 안다. 늦잠자고 게으름만 피우면 아이의 장래가 불행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사탕 대신 밥을 먹이고,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든다. 당장은 달콤함이 사라지고, 단잠에서 일어나야하므로 괴로울 수 있지만 결국은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중생은 눈앞에 있는 물질을 추구하고, 세속적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고, 크고 화려한 물질세계를 지향한다. 자비심은 그런 중생심이 빚은 속제의 세계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속제의 공함을 일깨우고,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색의 본질이 공함을 깨닫게 하고, 욕망의 대상이 뜬구름과 같은 것임을 일깨운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아는 지혜야말로 최고의 사랑이자 자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무애관은 현상을 보되, 현상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을 함께 꿰뚫어 보라는 가르침이다. 반대로 본질의 언어만 되풀이하지 말고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지도 정확히 보라는 말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 이사무애관이다. 달콤한 사탕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나, 건강한 치아를 위해 절제해야 하는 것은 모두 옳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둘 다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다운 사랑은 이와 사를 겸하는 것이다. 자비의 마음으로 사탕을 주고, 지혜의 마음으로 매를 드는 것이 모두 사랑이자 지혜이다. 그래서 참다운 사랑에는 형식과 격식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성철 스님도 “이・사, 이 두 가지가 무애하면 자비와 지혜가 서로를 이끌어서 무주행(無住行), 즉 머무름이 없는 행을 성취한다.”고 했다. 속제에만 매몰되어 진제를 포기하지도 않고, 진제에 매몰되어 속제를 무시하지도 않아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는 것도 엄마의 사랑이고, 아이의 건강을 위해 쓴 약을 먹이는 것도 엄마의 사랑이다. 진속(眞俗)에 매몰되지 않고, 진속을 부정하지도 않는 중도적 안목, 그 둘을 아우르는 통합적 실천이 이사무애관에 담긴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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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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