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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은 그 자체로 ‘등불’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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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9 월 [통권 제1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1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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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수(현공, 玄空) ․ 김희정(원오행, 圓悟行) 부부 

 

 


현공 거사님과 원오행 보살님 

 

음력 7월 15일, 하안거 내내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들이 바랑을 메고 만행을 떠나는 날이다. 스님들은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화두를 점검받기 위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구름처럼 흩어진다.

 

모든 불자들에게도 그렇지만 이날은 ‘백련 불자’들에게도 중요한 날이다. 바쁜 날이기도 하다. 먼저 백련암을 비롯한 문도사찰에서 진행하는 여름 아비라기도가 회향하는 날이다. 자기기도를 점검하고 더 나은 정진을 다짐하는 때가 바로 아비라기도다. 3박 4일간의 기도를 마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와 함께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우란분절 백중기도를 회향한다. 『우란분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 존자가 육신통(六神通)을 얻게 되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목련 존자는 어머니를 아귀의 세계로부터 구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죄업(罪業)이 두터워 속수무책이었다.

 


백중을 맞아 정심사 대적광전에 많은 불자들이 모였다.

 

어쩔 수 없이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스님들이 하안거를 마치는 7월 15일에 과거와 현재 7세(世)의 부모님을 위해 여러 스님들에게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면 비원(悲願)의 성취는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도 천상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목련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여 아귀 세상에 떨어진 어머니를 마침내 구원하게 된다. 이것이‘우란분재’, 즉 백중의 시초다.

 

이런 의미가 있는 날이어서인지 지난 8월 10일(음력 7월 15일) 하남 정심사는 분주했다. 오전 일찍 아비라기도를 마치고, 백중기도를 회향하는 법회가 300여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대적광전에서 봉행됐다. 정심사 주지 원영 스님은“백중은 모든 생명이 극락으로 가는 날”이라며 “절 밖에서도 이웃에게 더 베풀고 또 자비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오늘날의 정심사를 일군 주역들. 왼쪽부터 원오행 보덕화 원영 스님 진각화 대법화 보살님 

 

법회가 끝나고 김희정(원오행, 圓悟行) 보살님을 만났다. 아비라기도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보살님은 다른 불자들과 함께 백중기도를 회향했다. 같이 점심공양을 하고 보살님의 집이 있는 용인으로 향했다. 백련암과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보살님과 보살님의 남편 신정수(현공, 玄空) 거사님을 함께 보기 위해서다. 수십 년간의 기도와 정진 덕분인지 90을 앞둔 노부부는 유쾌하고 상쾌했다. 성철 스님과의 첫 만남 역시 웃음과 여운이 함께 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도반의‘간절한’기도로 간 백련암

 

“우리 거사님이 군(軍)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살았어요. 여러 절에도 같이 다녔어요. 젊었을 때 부산 온천장에 산 적이 있었는데 묘각심 보살을 비롯한 여러 도반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서울에 와서도 부산 보살들과는 자주 연락을 하고 살았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부터 도반들이 백련암에 기도하러 가자고 권유를 많이 했는데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묘각심 보살이 ‘요즘 내가 보살님을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 보살님 제발 백련암에 가서 기도하게 해달라고 말이다’며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인연이다 싶어 백련암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울 도반들 몇몇과 함께 그렇게 처음 백련암에 갔습니다.”

 


백중법회에 참석해 기도중인 원오행 보살님 

 

원오행 보살님은 묘각심 보살님으로부터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기도 열심히 하는 대중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는 곳이 바로 백련암”이라고만 들었다. 원오행 보살님이 백련암에 간 날은 마침 여름 아비라기도를 시작하는 때였다. 보살님 나이 45살, 딱 39년 전이었다.

 

“아비라라고 생각도 못하고 그냥 보살님들을 따라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백련암 원통전과 좌선실에서 대략 60~70여 명의 신도들이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아비라기도는 엄청 힘든 기도인데, 저는 전혀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때 우리 거사님 진급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서인지 그 원(願)만 가지고 무조건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보살님에게 기도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기도환경은 너무 낯설었다. “장군 마누라로 편하게만 살아온” 보살님에게 백련암의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열악한 절 살림살이에 “뭐 이런 데가 다 있노?”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잠자리는 물론 공양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4박 5일간 거의 잠을 못 잤어요. 또 밥은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어요. 하하. 짠지 딱 하나 내놓고 밥을 먹으라고 하니 같이 간 서울 보살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꼭 모래알 씹는 거 같았습니다. 하하.”

 

아비라기도 회향 전날 성철 스님이 보살님들과 마주 앉았다. 처음 만난 성철 스님은 편안하고 다정다감했다. 나중에 들었던, ‘호랑이 같은’ 성철 스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대혜심 보살님이 원오행 보살님을 소개했다.

 

“이 보살님은 육군 준장 부인인데 별을 하나 더 따고 싶답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한답니다.” 성철 스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니는 하루에 천배씩 일주일만 해라.”

 


현재와는 많이 다른 백련암의 예전 모습 

 

스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원오행 보살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큰스님 저는천배 못합니다. 백팔배도 힘들어서 제대로 못하는데 천배를 어떻게 합니까? 저는 못합니다.”순간 보살님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성철 스님은 신도들과 만나면 각자 사정에 맞게 매일 해야 하는 일과 수행을 ‘숙제’로 내주었으나, 원오행 보살님은 성철 스님 면전(面前)에서 일과를 거부한 것이다. 백련암에서는 ‘전무후무한’, 그야말로 초유의 일이었다. 그러자 같이 있던 보살님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이고 보살님! 아비라기도 끝나면 우리가 함께 해 줄 테니까 천배 같이 해봅시다.”
“그래도 저는 못합니다.” 대중들은 다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듣던 성철 스님이 덧붙였다.
“그래 니는 천배 못한다. 니는 안 해도 된다. 니 아니어도 너거 거사 별 하나 더 딸 것이다.”

 

그렇게 첫 아비라기도를 마치고 보살님은 성철 스님에게 ‘원오행(圓悟行)’이라는 법명과 ‘이뭣고’ 화두를 받았다. 도반의 간곡한 권유로 온 기도에서 원오행 보살님은 환희심을 느꼈다. “계속 해도 좋을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 덕분이었는지 행운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아비라기도를 마치고 며칠 지나지않아 성철 스님의 말씀대로 거사님이 “별을 하나 얻어 버렸다.”

 

이후 보살님은 1년 4차례, 10년간 백련암 아비라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폭설이 내려 백련암 가는 교통이 통제되었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 말이다.

 

정심사의 초대 신도회장

 

보살님이 백련암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현공 거사님 역시 성철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생사(生死)를 눈으로 지켜봤던 거사님 역시 독실한 불자였다. 생사(生死)는 화두가 되어 거사님 주변을 맴돌았다. 거사님은 성철 스님을 만나기 전부터 청담 스님을 비롯한 당대 여러 선지식들을 친견하며 가르침을 받아왔던 터였다. “우리보살이 백련암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백련암에 갔어요.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면서 삼천배를 하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지만 절을 마치고 ‘현공(玄空)’이라는 법명도 받았습니다.”

 


정심사 창건 당시 맨 처음 지어졌던 건물.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창건당시를 설명하고 있는 원오행 보살님 

 

그렇게 부부는 성철 스님을 함께 모시기 시작했다. 보살님의 경우 성철 스님에게 일과를 받지는 않았지만 매일 백팔배를 하면서 정진했다. 거사님 역시 백련암을 찾은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절을 했다. 삼천배도 10여 차례 이상 했다. 부부가 함께 정진을 해서인지 잊지 못할 일도 많이 일어났다.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같이 삼천배를 하고 큰스님께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니 큰스님께서는 백련암에서 자고 내일 가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몰랐어요. 큰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하루 자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이 넘칠 정도로 비가 왔습니다. 만약 그냥 내려갔으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현공 거사님)

 

또 한번은 우리 거사님이 경기도 일산 9사단장을 하고 있을 때 병사 한 명이 총과 실탄을 들고 탈영하려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부대를 빠져 나가지 못해 수색 중이었는데 그때 저는 집에서 백팔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절을 하는데 갑자기 제 눈에 그 병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거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제가 본 장소를 말했더니 실제로 부대 내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합니다. 수색팀이 그 장소에 가보니 정말 그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고 없이 일을 마무리했습니다.(원오행 보살님)”

렇게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받던 도중 하남에 정심사가 만들어졌다. 현공 거사님은 건립 불사와 관련한 행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원오행 보살님은 20여 신도들을 하나로 묶어 정심사가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제가 한 일이 별로 없는데 도반들이 저에게 신도회장을 맡으라고 했습니다. 아마 제가 나이가 좀 많아서 그랬나 봅니다. 하하. 한 5년 소임을 맡은 뒤에 다른 도반들이 소임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신도들은 원오행 보살님이 계속 회장을 맡을 것을 청했지만, 보살님은 임기를 두어 대중들이 나눠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고 한다. 원오행 보살님을 비롯한 불자들은 정심사 창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모아 서울에 정안정사를 만들기도 했다.

 

“정심사가 만들어지고 지금의 요사채 건물에서 20~30명이 모여서 법문도 듣고 기도도 했습니다. 지금은 당시에 비하면 한 10배 규모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사리전각 불사를 하고 있는데 수행에 필요한 여러 시설을 더 만들어서 수도권 불자들이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는 정심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심사에서 공부하는 스님들도 더 많아져서 불자들을 잘 이끌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철 큰스님께서도 아마 많이 좋아하실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본다면…”

 

부부는 성철 스님이 세상에 던져 준 핵심적인 가르침은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과 ‘자기를 바로 보라’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남과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사회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자기를 바로 봅시다’ 역시 모든 국민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남’보다는‘나’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분도 좋아집니다.”

 

말씀을 이어 가던 현공 거사님이 갑자기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를 바로 봅시다’ 법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有形),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 (중간생략)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원오행 보살님이 법회에 앞서 성철 스님 영전에 헌향하고 있다 

 

 

“이것이 1982년 부처님오신날 법어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미 30년 전에 이와 같이 주옥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씀을 지금까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법어를 한 번 보시고 꼭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거사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원오행 보살님이 말씀을 이어 받았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인생의 행로를 제시해 주신 등불 같은 분이십니다. 너무나 오래 살았다고 생각될 만큼 늙어버렸지만 아마도 큰스님께서는 아직도 저희를 보살펴주시고 계실 것입니다. 저희에게 항상 인자하시고 다정다감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스승을 회고하고 추억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현공 거사님과 원오행 보살님을 만나면서 ‘부창부수(夫唱婦隨)’가 눈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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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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