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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던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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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7 월 [통권 제1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2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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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천진성, 天眞性) 해인사 백련암 신도회장 

 

 


백련암 좌선실에서의 천진성 보살님 

 

 

사찰 신도회장이라는 자리는 결코 만만한 소임이 아니다. 가르침을 주시는 스님들을 잘 모셔야 하고 또 자칫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질 수 있는 신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이끌어 가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예전처럼 돈만 많다고 신도회장을 하던 시대도 지났다.

 

해인사 백련암 신도회장도 마찬가지다. 성철 스님 당시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자율 가풍’에 따라 모든 사중의 일은 신도들이 ‘알아서’ 한다. 기도도 알아서 하고 참선, 절, 아비라기도 등도 ‘알아서’ 해야 한다. 스님들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신도회장의 역할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1년 4차례의 아비라기도와 전국 백련문도 방생법회, 하안거 해인사 산중공양, 성철 스님 열반일을 전후한 ‘칠일칠야 팔만사천 참회법회’, 동안거 선원 대중공양 등 큰 행사를 매월 한 차례 이상 치러내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2011년부터는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과 열반 2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를 3년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6월 18일에 진행된 백련암 불자들의 ‘해인사 산중공양’ 역시 신도회장을 중심으로 50명이 넘는 대중들이 오랫동안 준비를 해 300여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며 원만하게 회향하기도 했다.  

 


아비라기도때 보살님을 비롯한 구참 신도들은 백련암 좌선실에서 참선에 전념한다 

 

백련암을 잘 아는 한 스님은 “백련암에서는 삼천배와 아비라가 일상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웬만큼 정진을 하지 않고서는 신도라고 명함도 못내민다.”며 “신도회장 역시 신심(信心)과 수행력은 물론 리더십도 남달라야 할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백련암에서 정진하고 있는 한 불자도 “신심과 정진력 같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백련암 신도회장의 기본 자격이 되어 버렸다.”며 “다른 사찰에 비해 더 ‘까다로운’ 이런 조건을 갖춘 것은 물론 많은 신도들을 넓은 품으로 보듬을 수 있는 분이 바로 천진성 회장님”이라고 전했다.  

 

백련암 신도회장 김영숙(천진성, 天眞性) 보살님을 만나기 위해 부산 고심정사로 향했다. 천진성 보살님은 고심정사 신도회장 소임도 같이 보고 있다. 5월말부터 인터뷰 일정을 잡았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아 마감을 며칠 앞두고서야 보살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소임도 내려놔야 하는데…”

 

천진성 보살님을 만나러 내려가니 절에서는 마침 백중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 고심정사 불교대학이 매년 진행하는 ‘자비나눔 이웃돕기 하루찻집’도 열리고 있었다. 부산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고심정사는 전형적인 도심포교당이었다. 1층에는 종무소와 주차장이 들어서 있고 2층에는 불교대학, 3층 공양실, 4층 요사채, 5층 법당, 6층 선방 등으로 구성된 고심정사는 넓지 않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시예불과 기도가 시작되자 천진성 보살님 역시 다른 불자들과 같이 법당에 앉았다. 몸은 물론 다리도 다소 불편했지만 보살님은 느리면서도 확실하게 절을 하고 또 기도를 이어나갔다. 법당에 온 이상 무엇이든 대충하지 않았다. 1시간이 넘는 기도가 끝나자 원택 스님의 소개를 받은 보살님이 잠시 마이크를 잡았다.  

 

“요 며칠 몸이 안 좋아 절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어보니 다른 누구보다 여기에 계신 우리 도반님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집에서도 절에서도 아프지 말고 여법하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면서 같이 정진합시다.”  

 

기도를 마치고 공양을 한 뒤 보살님은 2층 불교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찻집에서 불교대학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또 신도들과 함께 차를 한 잔 한 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고심정사에 나온 보살님이 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994년부터 회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하기 전에는 대해심 보살님이 오랫동안 신도들을 잘 이끌어 주셨고 그 뒤에는 각운심 보살님이 1년 6개월 정도 회장을 했습니다. 그 후에 제가 회장을 맡았는데, 해보니 회장은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고 또 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항상 기도정진한다 생각하니 힘이 생깁니다. 여러 도반들이 잘 도와주기도 하고요. 제가 올해 나이가 83입니다. 최고령 회장입니다. 이 나이까지 회장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하.” 

 

천진성 보살님은 성철 스님 열반 직후부터 회장 소임을 맡고 있다. 당시에는 백련암에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갔지만 2005년 부산에 고심정사가 문을 열면서부터는 백련암과 고심정사를 같이 오가고 있다. 고심정사에는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집 거사가 한때는 호적을 파서 백련암으로 옮기라고 하더군요. 고심정사가 생긴 뒤에는 매일 절에 간다고 ‘투정’을 좀 부렸습니다. 그래도 부처님 일, 큰스님 일 하는 것이어서 많이 이해를 해줬습니다.”  

 

천진성 보살님은 산청 겁외사에 세워지는 ‘성철스님 기념관’ 불사가 여법하게 회향될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고 있다.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곳이 기념관입니다. 불사가 잘 되어야 합니다. 불사가 끝나면 이제 저도 좀 쉬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성철 스님과의 인연으로 옮겨졌다.

 

‘그냥’ 기도하러 갔다가 평생의 인연을 만나다!

 

“제 도반 중에 일찍 아이를 떠나보낸 사람이 있었어요. 그 도반을 위로도 할 겸 또 기도도 할 겸 도반 5~6명이 여기저기 사찰로 기도를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다 부산 온천장에 살던 묘각심 보살이 해인사 백련암에 큰스님이 계시는데 거기서는 기도도 열심히 하니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도반들과 함께 백련암에 가게 됐습니다.”  

 

천진성 보살님이 도반들과 함께 백련암을 찾은 때는 1971년 4월(음력) 아비라기도 때였다. 기도를 하러 왔다고 하니 성철 스님은 인자한 미소로 일행을 맞아 주었고 “기도 열심히 하라.”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백련암에서 하는 기도는 다른 사찰의 그것과 달랐다.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다. 

“백련암 불자들이 하는 것이 아비라기도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절하고 진언도 외우며 처음에는 그냥 따라 했는데 하면 할수록 너무너무 힘들고 아팠어요.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백련암에 가기 전에 그렇게 정진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어서 몸이 따라주질 않았어요. 몸과 마음이 다 힘든데 거기다가 공양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당시 백련암에서는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밥 조금에 반찬도 한두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공양 시간만 되면 불을 지펴 밥을 했기 때문에 온 백련암 경내가 연기에 뒤덮이곤 했습니다. 그때 기도하던 사람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큰스님께서는 ‘잘 먹으려고 왔나? 잘 먹으면서 기도하려거든 너거 집에 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하.” 

 

아비라기도를 끝내고 나니 성철 스님은 보살님에게 ‘천진성(天眞性)’이라는 법명을 내려 주었다. 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화두도 받았다. 

 

성철 스님은 아비라 기도가 끝나자 참석 대중들을 한 자리에 불러 ‘생활법문’을 해주었다. 보살님들이 생활 속에서 겪고 있는 고민들에 대해 성철 스님은 명쾌하게 해법을 내려주었다. 부처님 가르침이나 화두참선을 강조했던 성철 스님이 이미 오래전에 ‘생활법문’을 했다는 것이 다소 ‘의외’였다. 천진성 보살님은 “그 후에도 큰스님께서는 기도가 끝날 때마다 법문을 해주셨는데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자기 허물을 바로 알자’, ‘진실한 참회는 성불로 이어진다’, ‘남에게 지고 산다’, ‘사주보다 관상이 좋고 관상보다 심상이 좋다’, ‘지극한 기도는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등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간단한 것 같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들인데, 큰스님께서는 이것들을 아주 쉽게 설명해 주셨다.”며 “아마 그 법문 때문에 백련암에 계속 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살님은 그렇게 백련암과의 인연을 이어 나갔다.  

 

이후에도 백련암에서의 기도는 계속됐다. 1년에 4번 진행되는 아비라 기도는 물론 21일 기도를 비롯해 장단기 기도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한 해의 절반 이상을 집이 아닌 백련암에서 보내기도 했다.

 

“제 나이 40에 시작해 66살까지 아비라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중에 10년 정도 하니까 제 몸도 편해지고 마음도 많이 안정이 됐습니다. 특히 혼자보다 도반 대중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 힘이 생깁니다. 각자 일과로 하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또 때때로 대중들과 같이 정진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심정사 앞에서의 천진성 보살님 

 

‘기도의 맛’을 알아갈 때쯤 보살님은 막내아들을 백련암에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아들 역시 흔쾌히 어머니의 제안을 수용했다. 막내아들은 100일을 계획하고 백련암에서 ‘유발’ 공양주를 하며 기도했다.  

 

“아들은 매일 3000배를 하면서 공양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처음 밥을 하다 보니 돌이 많이 나왔나 봐요. 하루는 큰스님께서 아들을 부르시더니 ‘니 돈 많나?’라고 물으시더랍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 있던 아들에게 큰스님께서 ‘밥을 먹는지 돌을 먹는지 모르겠다. 새로 금니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돈 좀 많이 모아두라’고 농담을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스님들이 일부러 밥을 물에 말아 드셨다고 하네요. 하하.” 

 

보살님은 아들의 100일기도가 끝날 때쯤 백련암에 갔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원치 않게 21일간 기도를 하게 되었고 아들역시 21일간 공양주를 더 했다고 한다. 

 

‘절하기 싫어하는 보살’로 찍힌 이유

 

천진성 보살님이 한참 백련암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시절, 성철 스님은 보살님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주문했다. 특히 절을 많이 하라고 했다.

 

“큰스님께서는 저만 보면 절을 하라고 하시면서 ‘절은 네 생명에 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큰스님께서 저의 미래를 걱정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거든요. 한 번은 방광염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시고 저에게 매일 절을 시키고 또 상태를 체크하셨어요. 저를 볼 때 마다 ‘오늘은 우짜노?’라고 말씀하시며 살펴주셨습니다. 또 무릎이 안 좋아 오랫동안 고생을 했는데, 저에게 하루 1000배씩 하라고 하셨죠. 제가 큰스님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또 제대로 절을 하지 못하자 큰스님께서는 저만 보면 ‘저기 저 절하기 싫어하는 보살’이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매일 1000배를 하던 당시 보살님이 아비라 기도를 끝내고 법당을 내려오고 있었다. 보살님은 “큰스님께서 내리신 것이니 100일 동안 1000배를 하리라.” 다짐하고 실천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성철 스님을 만났다. “잘하고 있나?” “80일 됐습니다.” “내가 언제 날짜 물었나? 무한대로 계속 해라.” 보살님의 얼굴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정도 1000배를 하던 어느 날 잠깐 몸을 누웠는데 꿈속에서 갖가지 크기의 뱀들이 집 대문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그 꿈 뒤에는 또 다리가 없어지는 꿈이 이어졌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 만져보니 다리는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간 따라다니던 무릎의 통증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마 뱀이 나갈 때 같이 나간 모양”이라며 보살님은 웃었다. 그때서야 보살님은 성철 스님이 절을 하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한다. 절이 보살님의 마음공부는 물론 건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이미 성철 스님은 하고 있었던 셈이다. 

 


원택 스님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보살님 

 

천진성 보살님은 평소 성철 스님이 “속이지 않는 삶, 즉 진실하게 살 것”, “남에게 많이 베풀 것”, “남을 위해 기도할 것” 등의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했다. 

 

천진성 보살님은 이와 함께 성철 스님 열반 당시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보살님 역시 구름같이 모여든 인파와 전국적인 추모열기를 상상하지 못했다.

“정말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죠. 조금만 더 계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참회의 절을 했지만 여러 분의 비구니스님들이 문상을 오셔서 3000배를 하고 울고 가시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울었습니다.

 

백련암 뒷산이 온통 붉게 물들 정도가 됐던 방광(放光)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큰스님께서 계시던 방 바로 앞에서 일어난 방광은 빨갛게 일어났고 정념당 쪽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어난 것처럼 방광이 이어졌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천진성 보살님은 성철 스님 선양 사업의 ‘계속성’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조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 못지않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원택 스님께서 수십 년간 큰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옆에서 보면 너무 힘들게 일을 하고 계세요. 이제 좀 편안하게 일을 하시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못하십니다. 후대에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이 널리 펼쳐지도록 초석을 다지려고 하시는 것 같아 감사하기도 하고 또 죄송하기도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좀 더 마음을 모아 큰스님 선양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천진성 보살님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인터뷰를 이어 갔다. 요 며칠 아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보살님이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할수록 백련암 스님들과 불자들의 신심(信心)이 더 견고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결코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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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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