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배타주의를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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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2:07 / 조회2,152회 / 댓글0건본문
표층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종교만이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웃의 종교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며 함께 이 세상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종교만 유일한 참 종교라 믿는 것을 배타주의적 정신이라 하고, 이웃의 종교를 인정하고 협력하려는 태도를 다원주의적 자세라고 합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배타주의
사려 깊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다른 종교를 대하면 우선 배타주의적 정신을 표출하기 일쑤입니다. 캐나다 학자로 오랫동안 하버드 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장을 지낸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교수는 이런 배타적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제도는 외부인들에게는 어리석거나 심지어는 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기이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배타주의적 정신이 약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과 같은 다종교 현상에서 배타주의로 일관하는 종교의 주장들을 일별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의 배타주의 태도와 그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단 이웃 종교의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웃 종교에 대해 배타성을 가장 격렬하게 드러내는 종교는 근본주의 기독교라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 광신도 중에는 사찰에 들어가 불상이나 기물을 파손하거나 심지어는 방화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하고,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배타주의에 대한 경계
이제 기독교 출신 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배타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장을 지낸 크리스터 스텐덜(Krister Stendahl)에 의하면 위의 두 가지 『성경』 절도 문맥을 따져보면 예수님과 부처님, 공자님 등을 모두 비교하고 끌어낸 비교종교학적 결론이 아니라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헌신을 표현한 “고백적 언어”, “사랑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영국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은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식 시각(Ptolemaic perspective)’의 천동설처럼 모든 종교가 내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은 오늘날 같은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인 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지탱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코페르니쿠스적 시각(Copernican perspective)의 지동설처럼 내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태양을 중심으로 함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한 분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도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어느 한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더 위대하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하고, “내 종교가 유일한 진리의 종교라고 믿는 배타적 마음은 죄된 마음 상태로, 그 죄란 바로 교만의 죄”라고 했습니다.
이웃 종교에 대한 태도들
이웃 종교에 대한 태도를 분류할 때, 배타주의(exclusivism),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포용주의란 이웃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참된 구원은 결국 나의 종교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말하자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주장입니다.
종교다원주의를 가장 힘 있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학자로 폴 니터(Paul F. Knitter)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니터는 이 분류를 좀 더 세분화하여, 대체모형(replacement model), 완성모형(fulfilling model), 상호모형(mutuality model), 수용모형(acceptance model)으로 나누었습니다.
대체모형이란 너의 종교로는 안 되니 내 종교로 대체시키라는 것이고, 완성모형은 너의 종교에도 진실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니 내 종교로 그 모자람을 채우라는 것이고, 상호모형은 종교 간에 공통점이 있으니 이런 공통점을 부각시키고 강조하자는 것이고, 수용모형은 서로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고 다름에서 서로 배우도록 하자는 태도입니다. 물론 각 모형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가장 바람직한 모형은 수용모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주1)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태도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는 불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으로 나누기도 하고 외도外道라고 정통이 아닌 것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 중에는 불교가 바닷물이라면 기독교는 접시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기독교를 폄하하는 경향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표층적인 기독교와 심층적인 불교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층적 기독교와 표층적 불교는 다 같이 기복적이라는 면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심층 기독교와 심층 불교는 서로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이상적인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기원전 297년 불교로 개종한 아쇼카 왕이 석주石柱(12)에 새겨놓은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과인 아쇼카 왕은] 모든 종교인들을, 그들이 수도인이든 평신도이든, 한결같이 존경하노라. 과인의 선물이나 존경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과인이 모든 종교의 기본교리를 옹호한다는 것이니라. 기본교리는 각 종교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 자신들의 종교는 자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을 삼가라.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종교도 강화시키고 남의 종교도 돕는 일이 되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에도 해를 주고 남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하하는 것은, 그것이 맹목적인 충성에서 나왔든, 자신의 종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든,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욱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이다. 조화가 최선이니라. 모두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하록 할지니라.”
이후 불교 통치자들은 아쇼카 왕의 권고를 따랐습니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불교 신도들도 아쇼카 왕의 이런 관용의 태도를 언제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위한 비유 하나
내 어머니가 나에게는 가장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복잡한 거리나 시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갈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그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렇다고 시장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내 어머니의 손을 잡으라고 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어머니들은 모두 나쁜 어머니라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내 종교가 지금 나에게는 최고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내 종교만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내 종교 아니면 모두 나쁜 종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각자 자기 어머니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듯 자기가 택한 종교를 가지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주2)
나가면서
이제 어느 종교의 가르침이 진리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내 것이면 진리, 네 것이면 무조건 비진리라고 하던 전 근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대신 인류의 보편적 행복과 안녕에 기여하느냐 여부 등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특별히 사악하거나 변질되거나 퇴폐적이거나 혹세무민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아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게 혁신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모두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각주>
(주1) 폴 니터 지음, 유정원 옮김, 『종교신학입문』(분도출판사, 2007) 참조.
(주2) 다원주의를 위한 비유 9가지는 『오강남의 생각』(현암사, 2022), 376~380 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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