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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 산책]
오늘을 사는 임제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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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7 년 6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8,5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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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제선풍의 특징의 하나로 자기 확신을 들 수 있다. 임제선사는 자기 자신을 떠나서 획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부처가 실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임제선사는 자기가 바로 부처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밖으로만 향하는 수행자를 짐을 싣고 얼음판을 가는 당나귀에 비유한다. 깨달아야 할 부처가 있다는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벌벌 떠는 당나귀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수행자에 비유한 것이다. 임제선사의 유명한 말을 보자.

 

 


 

 

그대들이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 데서 구하려 하는구나.

 

임제종풍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자기 확신 내지는 깨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임제록>에서 “수행자들이여!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조상인 부처와 다를 게 없건만, 다만 그대가 믿지 못하고 밖에서 찾는구나.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한다.

 

고려 말의 나옹선사가 말하는 “비로자나의 꼭대기를 밟는다 해도 발을 더럽힌 사람이다”는 말의 의미도 임제선풍에서 이해할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게 비로자나불일 것이다. 왜냐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깨끗한 비로자나불의 꼭대기를 밟아도 발을 더럽히는 것이다. 자기를 버려두고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는 결국 자기를 더럽히기만 한다는 것이다. “위로는 우러러야 할 부처도 없고, 아래로는 구제해야 할 중생도 없다”는 말도 임제선풍을 잘 보여준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은 일상성 속에서 나온다. 울고 웃는 우리 생활 속에서 자신의 본래성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한 스님이 나와 나옹선사에게 물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다.”

 

이런 일상성의 강조는 중국철학 내지는 중국불교의 오랜 전통인데, 마조도일에 의해 한층 부각되었다. 남악회양과 마조도일 사이에 오고간 ‘벽돌 이야기’에서 우리는 일상성을 강조하는 스승 제자의 가풍을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은 황벽을 거쳐 임제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진 것으로 훗날 임제종의 표본이 되었다.

 

2. 

임제의 가풍에서는 주체적인 자기만의 표현으로 자신의 깨달은 경험을 드러낼 것을 강조한다. 선사들치고 말 못하는 이는 드물다. 시의 적절한 언어로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고 나아가서는 학인을 지도한다. 이른바 대기 설법에 능수능란하다. 이런 점은 시인들의 언어 씀씀이 뺨친다. 도연명의 시 가운데 이런 게 있다.

 

山色日夕佳 산은 저녁 노을에 아름답고

飛鳥相與還 나는 새는 짝을 지어 돌아간다.
此中有眞意 여기야말로 참뜻이 있으니
欲辯已忘言 말하고자 하니 벌써 말을 잊는다.

 

연명은 황혼녘에 산새들이 짝을 지어 보금자리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여기에서 ‘참뜻’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풀어내려 했으나, 그 순간 이미 말을 잊고 말았다는 탄식이다. 이 시를 보고 그 누가 연명이 말을 못했다고 하겠는가? 연명은 ‘참뜻’도 깨달았고, 그것을 언어로 멋있게 표현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꼬리를 빼지 않았다. 역시 시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한 셈이다. 깨달음과 언어 표현 사이에는 강한 긴장감이 돌기 마련이다. 저 <벽암록>의 ‘경청우적성(鏡淸雨滴聲)’의 화두로 유명한 경청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그래도 쉽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기란 더욱 어렵다. (<조당집>10권 경청장)

제대로 된 선사들은 자기의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언어와 깨달음 그 자체에 간격이 있는가를 검토한다. 언어를 초월한 깨달음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려고 일등 선사들은 쉬지 않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저 유명한 방거사는 종종 “그대의 깨달음을 그대 자신의 말로 표현해 보라”고 직업적인 선사들에게 다그쳤다. ‘불립문자’라는 담 뒤로 숨기만 한다면, “격조 높은 수행자는 언어를 버릴 수 없다(<조당집>12권 화산장)”는 이야기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선사들에게는 남을 흉내 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부처나 조사의 말까지도 말이다. 부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고 자기의 생생한 체험과 그 체험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드러내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도 끝내는 선방에서 하루 한 끼 죽 먹은 기운으로 지껄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허황된 소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깨달음에서 나오는 ‘참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따위는 결국 자기를 얽어매는 말뚝이다. 그런 느슨한 언어로는 남을 구제하기는커녕, 자신의 영혼마저도 추스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또 하나의 임제선풍의 특징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3. 

임제선풍의 특징의 하나로 본래성을 중시하는 점을 들 수 있다. 남의 손을 타지 않은 자기의 본래성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은 <나옹록>의 다음 게송에도 잘 드러난다.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은 3,000가지 위의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80,000가지 미세한 행에 무슨 신경을 썼는가? 몸에는 언제나 제련되지 않은 쇠옷〔渾金〕을 입고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몹시 꾸짖었으니, 평소에 그 기운은 사방을 둘렀고 송골매 같은 눈은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위의 밑줄 부분의 ‘혼금’은 원래 ‘혼금박옥(渾金璞玉)’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제련하지 않은 금속’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원뜻이 무엇인가이다. 나는 제련하기 이전의 철광으로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뜻이다. 결코 ‘원래의 완전함’의 뜻은 아니다. 이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의 ‘현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공안’은 이른바 관청의 공적인 문서이고, ‘현성’이란 아직 판결을 내리지 않은 ‘원래 그대로 드러난’이란 말뜻이다. ‘탈체현성(脫體現成)’이 ‘쏙 뺀 듯이 있는 그대로’의 뜻임을 상기하면 좋다.

 

그러니 지공화상은 기존의 위의나 규율에 속박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의 체험에 충실한 수행자였다는 것이다. 제련되기 이전의 생짜배기 쇠였다는 것이다. 남의 손 타지 않은 천연의 자기 본분을 자기의 방식대로 드러낸 분이라는 것이다. 남의 말이나 따라하고 부처나 조사들이 남긴 언어로 자기의 체험을 규정짓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제자 나옹이 찬양하는 것이고, 이 찬양 속에서 ‘혼금박옥’한 저마다의 본래성을 강조하는 나옹의 선풍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임제선풍은 나옹선사의 다음 말에서도 분명히 들어난다.

만일 쇠로 된 사람이라면 무심코 몸을 날려 허공을 스쳐 바로 남산의 자라코 독사를 만나고, 동해의 잉어와 섬주의 무쇠소를 삼킬 것이며, 가주의 대상을 넘어뜨릴 것이니, 3계도 그를 얽맬 수 없고 천 분의 성인도 그를 가두어둘 수 없다.

 

밑줄 친 부분의 원문은 ‘약시생철주취저한(若是生鐵鑄就底漢)’이다. 문제는 ‘생철’이다. 이 말뜻을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편찬한 <선학대사전>(404쪽)에서는 ‘잡됨이 없이 순철로 주조하여 견고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생철’은 위의 ‘혼금’과 동의어이다. 제련되기 이전의 본래성을 드러내려는 표현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생맥주’의 ‘생’요, ‘생나무’의 ‘생’이다. 가공 절차를 거치기 이전 본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렇게 어떤 후천적인 가공도 받지 않은 본래성을 드러내는 본분납자라야지만 철저한 자유를 누린다. 모든 중생이 색계, 욕계, 무색계 속에서 제한을 받고 살지만 ‘생철과 같은 수행자’는 3계도 그를 얽매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인도 이런 수행자를 구속하지 못한다. 임제종풍은 바로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저한 자기 확신, 당사자의 직접적인 체험, 자기 본래 면목의 강조이다.

 

 


 

 

4. 

임제선사 자신은 화두를 드는 방법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런 현상은 원나라에서 임제선을 배운 고려의 나옹에게도 잘 드러난다. 나옹선사는 쉬임 없는 화두 참구를 강조하고, 화두를 바꾸지 말고, 혼침․무기․완공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라는 등등을 강조한다.

 

이렇게 공안을 참구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이 저 유명한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이다. 이는 참선 공부해 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특징만을 들면, 우선 나옹선사는 동정일여와 오매일여의 상태가 되면 모든 번뇌가 단박에 끊어진다고 한다. 이렇게 자성을 깨치고 나서는 자성의 본래 작용대로 인연에 맞게 살라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4대가 흩어지면 나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들의 자기 점검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검법은 얼마 전에 입적한 성철선사가 제시한 참선공부 점검법인 (1)동정일여, (2)오매열여, (3)숙면일여를 연상케 한다. 두 선사를 비교하자면 나옹선사는 숙면일여라는 표현 대신에, 신령한 상태가 되어도 화두를 놓지 말라고 표현했는데 그 지시하는 내용은 동일하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나옹선사와 성철선사 둘 모두가 깨닫고 난 다음의 수행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깨친 뒤의 수행생활에 대해 나옹선사는 자성의 본래작용에 따를 것을 말하고, 성철선사는 부처가 되었으니 무심히 부처의 행을 하라고 한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이런 공통점이 있는 것은 두 선사 모두 임제선의 흐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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