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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 산책]
부처도 사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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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6 년 12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06 21:16  /   조회8,23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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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엘 간 적이 있다. 상해박물관 소장품이 이동 전시 중이었는데, 글씨와 그림 등이 주로 많았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던 중 눈에 번쩍 띄는 그림이 있었다. 남송 중기의 가태 년간(1201~1204)에 활동하던 궁정화가 양개(梁楷)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선승 여덟 명의 일화를 소재로 한 두루말이였다. 첫째 그림은 달마와 혜가(신광)의 만남을, 둘째는 홍인과 도신의 문답을, 셋째는 조과화상과 백거이와의 만남을, 넷째는 향엄지한의 대나무 치는 소리를, 다섯째는 원택법사와 이원의 고사를, 여섯째는 관계지한선사의 고사를, 일곱째는 누자화상의 고사를, 끝으로는 현사사비와 설봉의존 선사의 일화를 각각 소개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문장으로만 보던 내용을 그림으로 보니 그 느낌이 또 달랐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현이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선도 굵고 움직임을 잘 포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루말이의 네 번째 그림 향엄지한 선사의 일화를 보자. 그림에 보이다시피 대나무 숲이 있고 향엄선사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만 보아서는 그가 누구인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지만, 제찬(題贊)이 적혀 있어 그 주인공을 가늠케 한다. 제찬의 내용은 이러하다.

 

“등주 땅의 향엄지한 선사가 하루는 풀과 나무를 베다가, 마침 기와 조각을 대나무에 집어던지니 ‘딱’하는 소리가 났다. (불법의 이치를) 홀연히 스스로 깨치고는 처소로 돌아와 목욕하고, 향을 사루어 위산영우스님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찬탄했다. ‘선생님의 대자대비하신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높습니다. 그 당시에 저에게 만약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통쾌함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는 게송을 지었다. 한 번 쳐서 알던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고 다스리지 않게 됐네. …….”

 

2.

위의 이야기에는 사연이 있다. <전등록>이나 <오등회원>는 이렇게 전한다. 향엄선사는 청주 지방 사람인데 위산에서 주지하는 영우선사의 제자로 들어간다. 영우스님은 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경전이나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대답하지 말고, 그대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그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말해보아라.”

 

이 질문의 요지는 이러하다. 우리는 흔히 대상 세계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식한다. 아침에 이불 속에서 눈을 뜨면 물체가 보인다. 이렇게 대상 세계가 보여질 때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의식한다. 혹시 꿈을 꾸더라도 꿈속에서 무언가가 보여져야 꿈을 꾸는 ‘나’가 있는 줄 알게 된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나’도 깨고 나면 어디론지 사라진다. 이렇게 의식은 대상에 의존되어 있다. 물론 대상을 의식하는 주체를 다시 대상화시켜 다시 그것을 인식하는 이른바 주관의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대상의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보면 의존성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깊이 잠들었을 때는 자기를 자각하지 못한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주체는 따지고 보면 대상세계에 의존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나 아닌 대상계에 붙어 있는 예속된 존재이다. 위산스님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예속된 존재가 아닌, 자기 존재의 근거가 자기 속에 있는 그런 자아를 말해 보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는 향엄은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지만, ‘나’는 대상에 의존해 있고, 대상이 사라지면 깜깜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나’라고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이 지경에 이르자 향엄은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지만 스승의 반응은 야멸차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의 깨달음이다. 그대의 깨달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 말에 제자 향엄은 탄식을 하며 길을 떠나 등주 백애산에 있는 혜충국사의 부도탑에 이르른다. 거기서 그저 밥이나 죽이면서 세월 보낼 생각이었다. 금생에 깨닫기는 다 글렀다는 자포자기에 빠졌던 것이다.

 

이 탑은 당나라의 대종황제가 세워준 것인데, 양개의 그림에 따르면 대나무 숲에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이 던진 질문이 커다란 의심 덩어리가 되어 가슴 깊이 박혔다. 제자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잊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일생의 화두가 된 셈이다. 화두 한 생각이 사무쳐 일념만념이 된 어느 날 대나무에 기왓장이 부딪히는 소리에 ‘나’를 자각한 것이다. 영원한 자기 본래의 자기를 깨친 것이다. 향엄스님이 뒷날 고백하듯이 만약에 당시에 스승이 일러줬더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체험이지 결코 자신의 것은 아니다.

 

3.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그림을 자세히 보자. 그림 설명은 “풀과 나무를 베다가”라고 했는데, 그림에는 대숲 옆에서 비질을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점은 이상하다. 불교학자들 사이에는 향엄선사가 풀을 베다가 낫에 기왓장이 걸려, 기왓장을 대숲으로 휙 집어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마당을 쓸다 기왓장을 던졌든, 아니면 풀을 베다 기왓장을 던졌든, 분명한 것은 대나무와 기왓장이 부딪치는 소리로 인해,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의 본래 자기를 깨친 것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을 귀하게 여기는 향엄의 이러한 정신은 뒷날의 표본이 되기에 족했다. 돌아가신 해인사의 성철선사도 향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성철선사의 공안집인 <본지풍광>에도 나온다.

 

향엄지한 선사가 하루는 상당법문을 하는데 어떤 선객이 물었다. “어떤 성인도 사모하지 않고, 자기의 심령마저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지는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대단한 질문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것에 끄달리지 않는 경계를 물은 것이다. 부처도 사모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기에게 있는 불성마저도 사모하지 않는 완전히 자유자재한 수행자의 이상향을 내놓았다. 이에 대한 향엄스님의 대답은 자못 명쾌하다.

 

“모든 사량분별이 끊어져, 수많은 성인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그러니까 질문한 선객을 긍정한 셈이다.

이 대화를 듣던 사숙(師叔) 소산스님이 역겹다는 듯이 구역질을 한다. 그러면서 사숙은 “성인을 긍정하고, 자기의 심령을 승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듣자 사숙에게 향엄은 지독한 말을 내뱉는다. “사숙님은 평생 똥을 거꾸로 누는 벌을 받으실겁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하고도 입 싼 악담이 어디에 있을까? 사숙이라면 속가로 치면 작은 아버지이신데, 조카가 이런 독한 소리를 하다니? 어찌하였던 이 악담대로 소산님은 일생 토하는 병을 앓았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를 비롯한 여러 불 보살들을 받들고 있음은 불교의 역사가 말해준다. 그런데 그것들을 받들지 말라니 이 무슨 날 벼락인가? 게다가 자기의 심령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니 선사가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선문에서 공인하는 향엄스님의 말씀이기에 망정이지, 만일 필자가 향엄스님이 한 대로 말했다가는 불교 신자들이 난리 법석을 피웠을 것이다. 부처를 모독하고 선을 모독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참 자아를 탐구하는 향엄선사의 안목에서 보면 석가를 비롯한 무수한 보살들도 진실한 존재는 아니다. 이것을 다시 성철선사의 말로 바꾸면, 일상생활 속에서 대상세계가 나타나건 말건 화두일념이 되면 이것이 바로 동정일이고, 꿈속에서 대상세계가 나타나건 말건 화두일념이 되면 이것은 몽중일여이고, 깊은 잠에 들어 대상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화두일념이 되면 이것이 바로 숙면일여이다.

 

4.

대상과 관계없이 자각되는 자아 이것만이 영원한 자기이다. 이것이 바로 선불교의 자아관이다. 이런 영원한 자기를 찾는 방법은 향엄지한 선사가 보여준 바대로 의심이 사무쳐 사량분별이 끊어져야 한다. 우리 의식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바로 대상을 지각하고 판단하고 기억하는 일들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사량분별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런 의식의 기능은 반드시 대상과의 관계에서 작용한다.

 

대상이 사라지면 의식의 이런 기능들도 사라진다. 이렇게 생멸하는 의식에 우리의 인생을 내 맡길 수는 없다. 게다가 이런 의식을 발동시켜서는 영원한 자기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식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대상세계에 얽매인다. 여기에서 종래의 선사들이 개발한 방법이 화두참구이다. 화두참구를 통해서 일체의 의식을 쉰다. 그리하여 보여 지는 대상도 보는 주체도 사라질 때에 영원한 자기를 깨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닦을 번뇌도 없고 다스릴 업장도 없어진다. 향엄선사는 이런 심경을 “한 번 쳐서 알든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고 다스리지 않게 됐네” 라고 노래했다.

 

요즈음 비파사나라는 남방외도들의 수행이 항간에 도는가 본데, 대상을 매개로 한 자아를 설정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대승의 논사들이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불교사가 말해 준다. 선종의 역대선사들도 이 문제점을 잘 지적해 놓았다. 의식의 지향성이 사라진 상태에 침잠하여 거기서 되살아나지 못하면 영원한 공에 빠지고 만다. 주․객이 사라진 상태어서 화두가 또렷할 때에 비로소 참 자아를 자각한다.

 

조사선을 개발한 선사들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향엄선사의 위의 일화가 좋은 예이다. 화두일념으로 자신의 참 모습을 체험했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체험을 절대화시키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심령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비파사나처럼 마음의 표상을 소중히 여겼다가는, 그 표상에 다시 자신이 구속된다. 이런 오류들을 조사선에서는 이미 경험했었기 때문에 다시 범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들 도가 저기에 있는데 그 도를 미혹하여 고통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도에 홀려서 생동하는 진실에 눈 머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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