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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중생불성(衆生佛性) 중생의 자성이 바로 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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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7,61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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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선문정로>의 첫장, ‘견성즉불’(見性卽佛)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성불(成佛)이란 자기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본래 없던 어떤 것을 밖으로부터 얻거나 새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워낙 갖추고 있는 제 자신의 정체, 본래의 자리를 비로소 보는 것에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 이하가 아니라는 것은, 자성(自性)을 가린 무명(無明)의 구름을 조금도 남김없이 걷어내고 확연히 견성해야만 비로소 성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역으로, 성불이 아닌 견성은 진짜 견성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적어도 선문(禪門)에서 견성의 뜻은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의 그 본래 성품, 자성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것을 보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가? 둘째 장 ‘중생불성’(衆生佛性)에서는 불성이 바로 그 중생의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경문(經文) 인용과 평석(評釋)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다. 중생의 자성이 불성임을 말하는 경문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열반경(涅槃經)>이 꼽힌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유명한 구절도 바로 그 <열반경>에 나온다.

 

그러면, 불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 가지 편리한 설명과 이해의 방법이 고안되어 널리 수용되어 왔는데, 중생이 가지고 있다는 불성은 이를테면 ‘부처가 될 잠재적인 가능성’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또는, 감추어진 본질로서 아직 완전히 발현되지는 않은 것, 앞으로 애써서 차츰차츰 발현시키고 완성해 나갈 것으로 보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불종(佛種), 즉 ‘부처의 씨앗’이라는 말도 있듯이, 씨앗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싹 틔우고 기르면 꽃을 피울 씨앗.

 

그렇게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참 수월하다. 중생과 부처라는 한 쌍의 반대말도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성불하지 못한 존재를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봐라.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냐.” 모두들 머리를 끄덕끄덕 할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 누구든 잘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즉, 중생의 자리에서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쉽고 현실적이며 또 상식에 맞는다. 경험상 우리는 분명히 아직 부처가 아니니까. 개념상으로도 중생과 부처는 반대말이니까. 꽃은 씨앗에서 비롯하지만, 그래도 씨앗과 꽃은 다르며 씨앗이 꽃으로 피우나기 위해서는 분명히 과정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성철스님이 경문과 조사들의 말씀을 인용하며 들이미는 얘기는 그게 아니다. 여기 <선문정로>의 둘째 장 ‘중생불성’에서 성철스님은 <열반경>의 구절들을 동원하여 여러 개념들 사이에 등식을 뽑아내 보여주는데, 그것을 차례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생자성=불성=사무애지(四無碍智)=여래(如來)=제불경계(諸佛境界)=십이인연(十二因緣)=법(法)=불(佛)=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대비(大悲)=사념처(四念處)=중도(中道)=상락아정(常樂我淨)=제일의공(第一義空)=지혜(智慧)=열반(涅槃)

 

위에 나열한 등식에서는, 불성은 단순한 잠재적 성불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불과(佛果)요 불지(佛智)요 불지(佛地)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일체중생실유불성’은 바로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님”의 뜻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이 다 가지고 있다는 그 불성은 문자 그대로 부처로서의 성품에 다름없다. 중생이 이미 다 부처라는 얘기인데, 그래서 예부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었을 터이다.

 

중생과 부처라는 명칭은 워낙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성립하거니와, 이렇게 그것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 그 한 쌍의 반대말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중생의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무의미할 수 없는 그 구분, 불교라는 종교의 성립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본적인 구분을 부인하는 것이니 아리송한 얘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불전(佛典)에는 그런 대목에서 불가사의(不可思議)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가 보다.

 

그러나, 중생으로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는 말을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실감하기 어렵다. 하기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중생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중생으로서 사는 것일 터이다. 아무튼 그래서 중생에게는 위에서 든 것 같은 편리한 설명만이 이해된다. 그러나, 무명의 구름 아래에 처한 중생에게 편리한 만큼 그 설명은 어디까지나 구름 아래에서만 통하는 얘기이다. 짐짓 스스로 지어낸 구름으로 하늘을 가리고서는 그것이 곧 하늘인 줄로만 알고 사는 중생에게는 자기의 세계가 워낙은 진여의 태양과 푸른 하늘까지 다 아우른다는 얘기가 오히려 아리송할 뿐이다. 스스로 구름으로 칸을 막아 놓고 중생을 자처하면서 좁은 사바세계로 자신의 세계를 국한시키고 살아가는데, 구름 위아래가 한 세상이며 자기가 곧 부처님이고 온 세상이 다 자기 자신이라는 얘기에 오히려 겁을 먹는다. 그런 얘기를 듣고 두려워할 중생이 많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부처님 말씀이 경전에 누누히 나온다.

 

자기가 워낙 부처님이라는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의 구름으로 그것을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인데, 번뇌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妄想)일 뿐이다. 부처님인 자기를 부처님으로 보지 않는 망상인 것이다. 그 번뇌망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 망상 속의 중생의 현실과 아울러 부처님로서의 본래면목을 한꺼번에 얘기하는 까닭에, 중생/부처의 구분이 성립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무너지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도(中道)의 구도가 돈오돈수론의 정초(定礎), 적어도 이론적 정초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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