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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 산책]
십자가 위의 돌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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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6 년 9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8,2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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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연세대 철학과 조교수, 중국불교철학전공)

 

1

연세대 정문을 지나 백양로를 따라 200여 미터 올라가면 오른쪽에 흰 건물이 보인다. 대강당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 108호실에 불교학생회 동아리방이 있다. 방에 들어서면 정면에 서 있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 큰 붓으로 ‘佛’자를 쓴 2폭의 족자가 걸려 있다. 하나는 송광사의 구산선사께서 쓰셨고, 다른 하나는 통도사의 경봉선사께서 쓰셨다. 구산스님 글씨는 70년대 후반에, 경봉스님 글씨는 70년대 초반에 학생회 회원들이 수련회를 가서 받아온 것이다. 두 고승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글만은 여전하여 그 가풍을 오늘에 전한다.

 

여기서는 경봉선사의 족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佛’자는 크게 쓰여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밑에 작은 글씨로 ‘佛是十字架頭石獅子. 會得麽.’라고 되어 있다. 합쳐서 우리말로 새겨 보면 “부처란 네거리에 있는 돌사자이다. 알 수 있겠는가?”쯤 된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어찌하여 네거리에 있는 돌사자가 부처란 말인가? 당시 어떤 친구는 “부처란 교회당 지붕의 십자가 머리에 앉아 있는 돌사자이다”라고 번역했다. 그리고는 설명하기를, 부처란 특정한 곳에만 계시는 게 아니고 모든 곳에 계신다. 불신은 상주한다. 그러니 교회당 지붕의 십자가 꼭대기인들 부처가 없을 리 없다고 했다. 그럴 듯도 했지만, 그렇다면 왜 돌 사자라고 했는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내가 이 동아리방 문을 출입한 게 1978년 봄부터였으니 어느덧 스므 해가 되어 간다. 후배들은 이 족자를 어떻게 읽을까?

 

2

지나는 세월 속에서 선서를 읽을 기회가 주어져 ‘十字架頭’라는 구절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때마다 저 연세대 불교 동아리방에 걸려 있는 족자 생각이 난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서에 나오는 이 구절의 용례를 종합해 보면 ‘네거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거리’가 담고 있는 의미이다. 크게는 둘로 압축되는데, 하나는 어디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네거리가 있을 정도로 번화한 장소 곧 세속을 뜻한다.

 

번화한 세속의 뜻으로 여겨지는 용례로 <임제록>의 상당법어를 들 수 있다. 당나라 때의 임제선사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드높은 산꼭대기에 있으면서도 몸을 벗어나지 못 하는데, 어떤 사람은 세속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한다.”

一人在孤峰頂上, 無出身之路. 一人在十字架頭, 亦無向背.

고 하였다. 앞 구절은 수행의 궁극에 도달은 했지만 도달했다는 생각마저 초월한 무심 도인이 되지 못함을 나무라는 말이다. 그리고 뒷 구절은 상대적인 일상의 현실에 살면서도 그 상대성을 뛰어 넘은 자유자재한 모습을 칭찬하는 것이다.

 

한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위치라는 뜻의 용례는 <조당집>의 설봉화상조나 경산선사조 등에 나온다. 이 글의 화제가 되는 경봉선사의 족자에 쓰인 화두도 여기에 해당한다. 다시 경봉선사의 글을 풀어 보자. “부처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네거리에 있는 돌사자이다. 알겠는가?” 사자란 불교에서는 지혜와 민첩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민첩하고 지혜롭더라도 돌로 된 이상에야 꼼짝 못한다. 아무리 사통팔달한 네거리에 갖다 놓아도 돌사자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부처란 그런 돌사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봉선사는 왜 이런 대답을 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당시 상황을 머리에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통도사로 수련회를 갔던 일행의 한 사람이 불교의 핵심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경봉선사가 이 족자로 대신한 것이다.

 

우리는 입으로 별별 표현을 다 한다. 남남 끼리였지만 말이 통해 정이 쌓여 애들 낳고 산다. 그러다가 말을 창칼 삼아 싸우다 찔리고 찢겨 헤어지기도 한다. 천냥 빚을 말 한마디로 갚고, 말 한마디에 감옥도 간다. 이렇게 인간은 입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자신을 표현하고 나아가서는 대상을 지배한다. 성경에서도 태초에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갖춘 입을 가지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확 뚫린 네거리에 서 있는 돌사자가 꼼짝 못하는 것처럼.

 

3

부처 또는 부처의 가르침은 경봉 나의 입으로 설명해서 될 게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그대들 자신이 몸소 체득해야 할 몫이다는 대답이다. 이렇게 통도사의 경봉선사처럼, 불교의 깨달음은 남의 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선종의 근본 입장 중의 하나이다.

 

조주종심(778-897) 선사에게 한 객승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모든 존재는 마음으로 환원되는데 이 마음은 어디로 환원되는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조주선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청주 땅에서 베옷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베옷의 무게 일곱 근이다. 나도 이 일곱 근 장삼을 입었고 그대도 이 일곱 근 장삼을 입었다. 마음이란 이렇게 일곱 근 장삼 입은 너와 나 모두에게 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장삼 입은 수행자들 각자가 모두 스스로 깨쳐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조주선사는 이렇게 곧잘 말한다. “그대가 물어올 것도 아니요, 내가 대답할 것도 아니다” 라고.

 

이런 입장은 어느 한 선사만의 톡특한 입장은 아니다. 당나라에 대수법진(834-919) 선사의 일화를 보자. 그는 위산영우선사의 회상에서 밥 짓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당시에 많은 수행자들이 영우선사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대수선사만은 몇 년이 지나도록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위산선사가 묻자, “제가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위산선사는 질문 거리를 만들어 준다. “정 무슨 질문해야 할 지 모르겠거든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게.” 이 말을 듣던 대수선사는 위산선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위산영우선사는 칭찬하여 이르기를 “이처럼 모두를 싹 쓸어버린 참 수행자를 내 앞으로 만날 수 있을까?”라고 했다. 깨달음은 남이 설명해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자신의 몫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런 반문을 할 것이다. 스승에게 묻고 지도받아서 될 일이 아니라면, 수많은 불경과 역대 조사들의 어록이 저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도 훌륭한 선사 밑에 몰려드는 수행자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로 대답할 수 있다. 달을 가리는 손끝을 따라가다 그것이 지향하는 저 쪽의 달을 보는 것은 스스로가 할 일이다. 남이 대신 봐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철저한 자기의 수행과 깨침을 강조하는 선종의 특색이 제대로 드러난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가풍 속에서 경봉선사의 족자도 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답은 혀를 굴려 이리저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돌사자처럼 꼼짝 못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4

‘돌사자’와 이미지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선서에 ‘좌단(坐斷)’이라는 용어가 종종 나온다. 이 말은 좌단설두(坐斷舌頭), 좌단요진(坐斷要津), 좌단보화불두(坐斷報化佛頭) 등으로 쓰인다. 여기에 씌인 좌단에서의 ‘단’은 동사 뒤에서 그 의미를 강조시키는 조사이다. ‘절단하다’의 뜻은 없다. 의미는 ‘좌’에 있다. ‘坐’는 원래는 ‘挫’와 음이 통하여 섞어 쓰는데, 그 의미는 ‘꺾다’, ‘박살내다’이다. 그러니까 위의 원문을 번역하면, 혀를 꺾어 박살내다, 핵심이 되는 나루터를 박살내다, 보신 부처와 화신 부처를 박살내다가 된다.

 

깨달음 그 자체는 스스로 각자가 터득해야 할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천하 조사스님들의 혀도 옴짝달싹도 못하게 꺾어버리는 것이다. 또 이 번뇌의 세계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중요한 나루터 역할을 하는 방편으로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그것도 자신의 깨침이 없으면 공허한 개념들의 모임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나루터도 쳐부수는 것이다. 나아가 보신불 화신불의 영험을 말하지만, 그것도 자기의 깨침에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제껴 두고 밖에서 부처를 찾는 그런 생각을 쳐부수는 것이다.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의 조화인데, 이 마음은 일반화되거나 추상화된 영어의 대문자 Mind가 아니라, 이 마음은 각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울고 웃는 소문자 mind이다. 때문이 이 mind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그 사람의 문제이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반 명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환원되면 그것은 죽는다.

 

그래서 사실 ‘선학개론’이라는 말만큼 모순되는 것도 없다. ‘개론’에서의 개(槪)란 쌀집에서 말이나 되로 쌀을 될 때 평평하게 깎기 위해 사용하는 평미레이다. 높고 낮음을 없애 일정하게 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인생과 그 인생이 투여된 체험은 평미레로써 일정하게 깎을 수 없다. 내가 마신 물맛을 네가 알 리 없다. 차고 더움은 스스로가 알 뿐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깨침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둘러싼 선사들의 이야기를 ‘개론’이란 틀 속에 꾸겨 넣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으려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어설픈 ‘선학개론’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선서 한 줄 제대로 읽는 게 낫다.

 

경봉선사에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부터가 잘못이다. 이 문제는 남에게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선사께서는 이 점을 잘 아셨기 때문에 정답을 말해주신 것이다. 그 대답의 내용이 정답이라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일깨워주신 것이다. 어설픈 수행자였더라면, 불교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연기법이 어쩌니 팔정도가 어쩌니 사성제가 어쩌니 해서, 결국은 부처의 씨를 말리고 선법을 문란시켰을 것이다.

부처란 네거리에 놓여 있는 돌사자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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