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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알라야라는 빅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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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81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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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법상종의 교학은 현장에 의해 번역 소개된 유식관련 문헌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자연히 인도 유식학의 학설을 답습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호법논사의 학설을 기본으로 하는 법상종의 교학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교설은 팔식설이다. 팔식八識이란 인간의 인식이 여덟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낮은 차원부터 살펴보면 팔식의 구성은 전5식前五識, 제6식第六識, 제7식第七識, 제8식第八識의 순서로 전개된다.

 

제육식과 대상의 인식

 

제인간의 인식은 근경식根境識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유기적 활동의 산물이다. 먼저 ‘근根’으로 불리는 감각기관은 식물의 뿌리처럼 외부 대상의 정보를 빨아들이는 작용을 한다. 감각기관이 인지하는 외부의 대상을 ‘경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눈根이 장미라는 대상〔境〕을 보면 ‘붉은 장미’라는 인식이 성립하는데 이를 ‘식識’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전前5식이란 인식작용의 뿌리가 되는 다섯 가지 근根 즉,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의 작용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작용에 의해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는 다섯 가지 인식이 성립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에 의해 흡수된 다섯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의식意識’으로 불리는 제6식이다. 제6식은 전5식의 정보를 바탕으로 작동하지만 이미 취합된 정보를 토대로 독자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란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육경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12처가 전부라고 보았다. 『잡아함』13권에 따르면 “일체는 12처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에 불과할 뿐, 물어 봐도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라고 했다. 삼라만상은 십이처에 모두 들어가며 그 밖의 것은 이름만 있을 뿐 실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이처에서 ‘처處’란 삼라만상이 모두 ‘들어가는 곳’을 의미한다.

 

하지만 법상종은 유식학에 토대를 두고 있음으로 육식이나 12처로 끝나지 않고 보다 심층적인 인식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욕망하는가?’, ‘자아라는 집착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더해지면서 유식학에서는 12처 외에 더 심층적인 인식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 갔기 때문이다. 

 

제7식과 아애집장我愛執藏

 

이런 고민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육식의 근저에 있다는 제7식과 제8식이다. 먼저 제7식은 달리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는데, 이는 ‘manas’라를 산스크리트어를 음사한 것이다. ‘manas’는 ‘의意’ 또는 ‘의식意識’으로 번역되지만 제6식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 ‘의意’로 부른다. 앞서 살펴 본 6식은 자신보다 하위에 있는 전5식이 수집한 정보를 근거로 작동한다. 하지만 제7식은 거꾸로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제8식에 저장된 정보를 토대로 작동한다. 말나식의 특징은 끊임없이 사량思量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끌어내어 발현시킴으로써 육식을 작동하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역할을 한다.

 

말나식은 기본적으로 번뇌에 물든 염오식染汚識이라는 특징을 띤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의식작용〔견분見分〕을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자내아自內我]로 오인하면서 자신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집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으로 인해 말라식에서 네 가지 근본번뇌가 발생한다. 즉,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는 아견我見, 자기에 대해 애착하는 아애我愛, 자기라는 실체가 있다는 아치我癡, 스스로 잘났다는 아만我慢이 그것이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이와 같은 자아의식은 번뇌에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성도聖道를 방해한다. 하지만 완전한 불선不善이 아니라 무기無記의 성질을 띠고 있다.

 

제8식과 행위의 빅 데이터

 

제8식은 모든 인식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달리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모든 행위 정보가 저장되는 거대한 데이터 센터 같은 것이다. 한 개체가 행한 무시이래의 모든 정보가 저장되기 때문에 선악에 의한 인과응보가 가능하게 된다. 나아가 악인이 벌을 받고, 선인이 복을 받도록 행위의 당사자에게 업의 정보가 상속되도록 함으로 윤회의 주체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뢰야는 ‘ālaya’라는 산스크리트의 번역인데, 이 식이 가진 기능과 역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의역된다. 첫째는 장식藏識이다. 여기서 장이란 ‘저장[藏]’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람이 짓는 삼업三業, 즉 생각〔意〕, 말〔言〕, 행동〔身〕으로 짓는 모든 행위 정보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뢰야에 저장되기 때문에 이를 장식이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은 한 개체가 무수한 생을 거듭하면서 지어 온 모든 행위를 저장하고 있는 행위정보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식에는 숙세에 걸친 행위정보가 모두 담겨져 있고, 그 정보에 의해서 현재의 삶이 영향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정보의 총체를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둘째는 이숙식(異熟識, vipāka)이다. 이숙을 의미하는 ‘vipāka’는 ‘익다ripe’, ‘성숙되다mature’라를 뜻을 담고 있다. 자신이 심은 업이 성숙되어 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데 이숙異熟이란 동일한 성질로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성숙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행한 행위〔인因〕가 결과인 과果로 나타날 때 다른 성질로 숙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착한 업을 쌓으면 즐거움을 받는 선인낙과善因樂果로 나타나고, 악업을 지으면 고통을 받는 악인고과惡因苦果로 성숙한다. 선善이 쌓여서 낙樂으로 성숙成熟되고, 악惡이 쌓여서 고苦로 성숙됨으로 이숙이라고 한다. 행위의 씨앗은 선악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지만 그 과보로 나타나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은 나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아타나식(阿陀那識, ādāna)이다. ‘ādāna’란 말의 뜻은 ‘붙잡아 유지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파에 따라서 아타나식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먼저 지론종이나 섭론종 등에서는 아타나를 제7말나식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아타나는 아뢰야식의 작용을 자아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집아執我’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상종에서는 아타나의 의미를 ‘집지執持’로 해석하고 제8식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아타나식은 범부로부터 부처님의 과보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물질〔색色〕과 정신〔심心〕적 요소에서 생성되는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여 고스란히 저장해 상속한다. 따라서 아타나식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어왔던 업의 종자業種子가 총체적으로 저장된 행위 정보의 빅 데이터이다. 이와 같은 빅 데이터에 의해 중생의 삶이 전개됨으로 근본무명이기도 하다.

 

모든 정보를 저장하는 특성으로서의 아뢰야는 무학위無學位인 아라한과 팔지 이상의 보살위에 도달하면 소멸한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면 제7식에 의한 아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경지인 불과佛果에 이르면 이 식識은 순수한 무루無漏로 전환된다. 성철 스님은 이런 유식설에 근거하여 근본무명을 끊으려면 아뢰야식에 의해 상속되는 미세망념까지 모두 끊는 구경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식의 전환과 지혜의 체득

 

유식학에 따르면 고뇌의 근원은 두 가지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의해 초래된다. 안으로는 자기〔我〕를 집착하는 아집我執과 밖으로는 법法을 집착하는 법집法執이 그것이다. 따라서 아집을 끊는 아공我空과 법집을 끊는 법공法空을 실증하면 안팎의 모든 집착을 끊고 진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면 유루有漏의 번뇌에 덮여 있던 아뢰야식, 말라식, 육식, 전5식의 번뇌가 해소되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된다. 곧 아뢰야식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지혜인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되고, 말나식은 자기중심적 집착을 버리고 나와 남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전환된다. 그리고 육식은 제법의 본성을 잘 분별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되며, 전5식은 다섯 가지기관으로 행하는 일들을 바르게 이루게 하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된다. 원효 스님은 성소작지는 부사의한 일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부사의지不思議智라고 평가했다.

 

결국 법상종에서 말하는 팔식설의 결론은 팔식을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식의 속박을 규명하고 그것으로부터 해탈하는데 있다.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인간을 속박하는 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 팔식설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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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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