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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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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6 년 9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7,79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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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지난 호에서는 『선문정로』가 성철스님의 법문 가운데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의도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짚어 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선문정로』의 서언(緖言)과 열아홉 개의 장을 하나하나 들치며 요점을 정리하고, 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함직한 이런저런 사항들을 챙겨 보도록 한다.

 

『선문정로』의 서언은 본문에서 펼치는 이야기의 요지를 압축해 놓은 글이다. 그 많은 이야기의 요점을 군더더기 없이 추려서 간략하게 천명하고 있으며, 간명한 만큼 매우 힘이 있게 느껴진다. 가히 선(禪)의 깨침과 닦음에 관한 성철스님의 일장 선언문이라 할 만하다. 거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이미 잘 알고 있고, 또한 그 명제들이 왜 그렇게 연결되면서 하나의 선언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자세한 설명이 없더라도 이미 이해하는 이라면 굳이 『선문정로』 전문을 읽지 않고 이 서언만 본다 해도 전체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서언은 우선 불가언설(不可言說),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종지(禪宗旨)를 표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언어를 빌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선지식들의 말씀과 글은 아무리 깊고 오묘하더라도 결국엔 “눈 속에 모래를 뿌림”과 같은 짓이며, 심지어는 석가모니 여래가 말씀 없이 연꽃을 들어 보인 것이나,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법을 받고 또한 말 대신에 세 번 절한 것조차도 다 억지를 부린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사(禪師)들이 문자 언어 대신에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할(喝)과 방(棒)도 사실은 법을 전함에 의지할 것이 못되는 헛짓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지식들이 그런 방편을 구사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말의 길이 끊긴 진리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중생을 위한 자비심의 발로임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철스님은 왜 이렇게 번다한 문자언설을 내놓게 되었는가? 그런 수고를 하게 된 이유를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올바른 법을 서로 전하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다 보니까 여러 가지 그릇된 의견이 횡행하여 조사들의 뜨락을 황폐케 하는지라, 보다 못해서 영원한 올바른 법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수고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올바른 법을 깨우친 조사님네들이 그 동안 내려준 가르침의 말씀들을 모아 제시함으로써 선문(禪門)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저절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한 선문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그 요점이 압축되어 피력되고 있는데, 우선은 선문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견성(見性), 즉 본래 진여(眞如)인 자기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데 있으며 그 견성이 바로 성불(成佛)에 다름 아니라는 선문 전래의 기본 명제를 다시 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진여 그 자체인데, 갖은 번뇌 무명 망념이 그것을 가리고 있어서 중생으로 살고 있을 뿐이라, 무명 망상을 남김없이 끊으면 그 자성을 꿰뚫어 보게 되니 그것이 깨달음이요 성불이요 열반이고 보리(菩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견성이란 것은 없던 것을 만든다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습,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니 그것이 바로 선문에서 표방하는 돈오(頓悟), 즉 몰록 깨침이고 선문에서 깨달음이라 하면 그 견성 이외에 다른 어떤 계위(階位)의 경지도 해당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화엄 52지 가운데 50 단계를 다 지난 뒤의 51번째 등각(等覺)조차도 마지막 진짜 깨달음, 즉 구경묘각(究竟妙覺)의 견성이 아니므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아무리 십지보살(十地菩薩)이고 등각이라 할지라도 깨닫지 못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꿰뚫어 보지 못한 깜깜한 중생일 뿐이고 구경묘각의 견성 돈오만이 성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견성하면 곧 부처요 따라서 그 뒤에는 수행이고 공부고 다 필요 없이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지키면서 부처님으로 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오후보임(悟後保任), 즉 깨친 뒤에 그 깨달음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견성 방법을 적시하고 있다. 그 첩경은 역시 부처, 조사들의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공안은 오로지 견성한 지혜, 세상 전체만큼 완벽하게 큰 거울과 같은 지혜, 즉 성불한 경지(佛地)의 대원경지(大圓鏡智)로써만 완전히 타파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공안을 완전히 밝혀내면 곧 견성한 것이다. 그러니 견성 성불할 때까지 선 수행자가 할 일은 오로지 쉬지 않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뿐이고, 경지가 좀 올라갔다거나 다른 이유로 해서 공안 참구를 게을리하는 것는 선 수행자들로서는 가장 큰 병이라고 여러 조사들이 누누이 강조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하면 어떻게 되는가? 위에서도 명시했듯이 그것이 바로 성불이니, 부처의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를 다 완벽하게 갖추고 전기대용(全機大用)이 발현된다. 즉 한 개체로서 한정된 제 살림살이 속에서 옹색하게 뒹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체(體)가 우주 전체와 같은 몸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커다란 용(用)을 발휘하면서 사는 것이다. 선문에서 정안종사(正眼宗師), 즉 올바른 눈을 가진, 또는 올바른 법을 본 조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그래야만 비로소 부처님들과 조사들의 지혜의 소명을 바로 계승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 범부 중생들로서는 그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경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실망하는 기분이 들기 십상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80여 명 제자 가운데 정안(正眼)을 얻은 이는 겨우 한 세 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가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불교의 또 다른 핵심 인간관을 들어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북돋는다. 즉, 우리 모두가 누구나 원래 비로자나 부처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있는 존재라, 노력만 하면 반드시 바른 눈이 열린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다면 자기가 본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낮추고 굴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성철스님이 선사답지 않게 번다한 언어문자에 의지하여 이 책을 내놓게 된 이유를 옮겨서 소개했었다. 긴 세월 속에서 바른 법이 전해 오다 보니까 그릇된 견해가 많이 나와서 선문의 뜨락을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에 선문의 바른 길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다음에는 그 이설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을 지적하여, 그것을 타파하려는 것이 이 책의 초점 가운데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성철스님은 선문에서 돈오점수설의 원조는 하택신회(荷澤神會) 화상이고, 그것을 규봉종밀(圭峯宗密) 선사가 계승했고, 우리나라의 보조지눌(普照知訥) 국사가 선양했다고 계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보조국사 자신도 신회화상을 지해종사(知解宗師), 즉 선문에서는 가장 중한 금기로 되어 있는 알음알이를 신봉한 이라고 말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결국 돈오점수설은 알음알이를 신봉하는 설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돈오점수설을 신봉하는 것은 곧 알음알이를 신봉하는 것이요 이는 곧 선 수행자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셈이라고 매우 강경하게 못 박는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이 보조국사의 글을 본래 뜻과는 달리 인용했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있고, 보조국사가 지해(知解)라고 한 것이 꼭 그런 부정적인 뜻이냐 하는 점도 문제될 수 있겠는데, 이 문제는 뒤에 본문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그리고 도대체 왜 선문에서는 알음알이를 두고 바른 법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로 여기는가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가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 나아가 선문의 수증론(修證論)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데 궁극적인 버팀대로 삼는 지식, 그것이 다 망념(妄念)이고 망상(妄想)이요 번뇌로서 바로 진여자성을 가리는 주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하며 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선수증론의 골간이 되는 관심이라고 하겠으니, 그것은 앞으로 『선문정로』의 본문을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파헤쳐 볼 일이다.

 

다음에 성철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씀으로 서언을 마무리하고 있다. 부디 이설(異說)에 현혹되어 알음알이를 따르지 말고, 올바른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아 용맹정진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부처와 조사들의 지혜의 소명을 계승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이제 그 당부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번쇄함을 무릅쓰고 선문의 바른 길을 문자언어로 풀이해 준 정안종사들의 법문을 새김질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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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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