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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이야기]
반조返照, 반영인가 반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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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6-14 22:40  /   조회5,21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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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성균관대 초빙교수)

 

1. 반조, 반영, 반성은 일상적으로 혼용되기도 하는 용어인데, 필자는 이 세 용어를 구별해보고자 한다. 반조返照는 되돌아 관조함, 곧 되돌아 비추어 관찰함을 의미한다. 반영反映은 되돌아 비춤을, 반성反省은 되돌아 살핌을 의미한다. 이에 따를 때, 반조返照는 반영反映이 아니라 반성反省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모든 반성이 반조는 아니고, 특수한 반성만이 반조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의식에 대한 반성은 기억이고, “현재”의 의식에 대한 반성만이 반조이기 때문이다.

 

평안한 마음 상태를 불가에서는 종종 관조(觀照, 비추어 관찰함)로 표현하는데, 고려시대의 지눌 스님은 관조를 원조(圓照, 원만하게 비춤)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조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눌은 참된 마음[眞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진심이라면, 앎이 없이 알고[무지이지無知而知] 평온하게 품고 원조圓照하기 때문에 초목과 다르고, 미움과 애착을 생겨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곧 대상을 대함이 텅 비어 밝으며 미워하지도 않고 애착하지도 않는다.”(주1)

 


인도 아잔타 석굴 제26굴 항마성도상. 부처님이 깨닫는 순간을 묘사한 조각이다.

 

여기서 지눌이 진심을 풀이하여 말한 ‘앎이 없이 앎’, 곧 무지이지無知而知는 ‘무분별의 지각’[무분별지지無分別之知]에 해당하고, 서양 현상학의 용어로 말하면 반성 이전의 의식 상태, 곧 선반성적 의식 상태에 해당한다. 수행자들은 이런 무분별의 지각에 도달하는 수행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분별의 지각에, 곧 원조에 도달할 수 있는가? 지눌은 그 방법으로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되돌려 마음을 비추어보는 것, 곧 반조返照를 권고 한다:

 

“만약 몸소 반조返照의 노력이 없고 다만 고개만 끄덕이면서, ‘현재 지금의 아는 마음이 곧 붓다의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확실히 [나의 말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너는] 눈앞에 있는, 거울에 지각된 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 공허한 적막과 신령한 지각내용)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진심과 망심을 변별하지 않는 자가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겠는가? 응당 알아야 하니, 내가 말하는바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단지 언설로 의심을 제거할 뿐만이 아니라, 직접 이 공적영지라는 말을 붙들고 반조의 노력이 있고, 이 반조의 노력으로 인해 생각이 여윈 마음의 본체를 얻은 사람이다.”(주2)

 

여기서 지눌은 반조를 통해 공적영지에, 곧 공허한 적막과 신령한 지각내용(내지 지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해진 공적 영지는 앞서 말한 진심을 가리키는데, 이 진심이 반조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반조가 진심과 망심을 변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심과 망심을 변별하는 의식은 앞서 말한 선반성적 의식이 아니고, 오히려 반성적 의식이다. 지눌은 반조, 곧 반성적 의식을 통해 진심, 무지이지, 공적영지, 원조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는 반성적 의식의 변별작용을 통해 선반성적 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지눌이 말하는 반조는 심4분 중 자증분의 작용인가, 증자증분의 작용인가? 증자증분의 작용이다. 왜냐하면 자증분은 현재의 견분을 반영反映하며 저장하는 작용이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이 저장하는 현재의 견분(달리 표현하면 현재의 견분을 저장하는 자증분)을 반성反省하며 진망을 변별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반영과 반성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반영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자동적 작용인 반면, 반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의지적 작용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증분의 반영과 증자증분의 반성이 모두 현재의 견분에 관련된 것들인 한에서, 반영에 가까운 반성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물어볼 수 있다.

 

3. 심리학자인 아마데오 조지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들과 심리학 속에서의 그것들의 적용에 관해」라는 논문에서 후설의 방법과 하이데거의 방법을 심리학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은 그가 의식에 반성적reflective 기능도 있고 반영적reflexive 기능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적절한 반성적 연구는 반영적 연구에 접근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의식이 언제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의] 지향성은 [의식의] 많은 작용들의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지만, 그러나 지향성이 [의식에게] 본질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지향성에 참여하지 않는 의식 측면들이, 예컨대 질료적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나 후설은 의식이 반성적reflective일 뿐만이 아니라 반영적reflexive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반영성reflexivity을 갖고서, 의식은 지향성에 독립적으로 그 자 신을 안다. 이 점은 의식의[을] 대상화하지 않는 앎을 위해 하나의 기초를 제공할 것인데, 그러나 어떤 유형들의 반성의[에 의한] 이해는 [대상화하지 않는 앎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후설은 반성적reflective 현상학의 맥락 내에서 대부분 작업했다.”(주3)

 

여기서 조지는 어떤 특정한 반성적 이해는 반영적 이해에 가깝고, 반영 적 이해는 탐구되는 의식을 “대상화하지 않은 앎”에 해당한다고 본다. 의식을 대상화하지 않는 앎이라는 말로 조지가 의도하는 것은 의식을 의식의 대상 같이 사물화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의식을 분별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연구는 다양한 의식작용을 분별하여 서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의식의 자기반영(자기의식, 자증분)은 자동적으로, 곧 비의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의지적 행위로서의 현상학적 연구가 의식의 자기반영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게다가 현상학적 연구는 다양한 의식작용들을 서술하기 위한 분별적 반성이고, 이런 분별적 반성은 무분별적인 자기반영과는 다른 것이다. 조지는 “반영성reflexivity을 갖고서, 의식은 지향성에 독립적으로 그 자신을 안다”고 말하여, 자기의식이 지향적 의식이 아닌 듯이 말하지만, 이는 현상학자인 이조 케른의 견해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것이다. 이조 케른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현장은 자증분(자기의식)을 특징짓기 위해 ‘지향적으로 자기 자신을 붙잡음’(holding intentionally itself, 자연自縁), ‘지향적 반성’(intent ional reflection, 반연返縁) 같은 더 나아간 표현들을 사용한다. [하지 만] 내가 지적하였듯이, 자기의식 속에서의 이러한 지향성은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이 아니고, 어떤 대상화하는 작용이 아니다.”(주4)

 

여기서 이조 케른은 자증분이 대상화하는 작용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향적 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자증분을 “지향적 반성”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억”으로서의 반성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증분과 증자증분을 반영과 반성에 의해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자증분도 지향적 작용이라고 보는 이조 케른의 견해를 수용하면, 현상학적 반성이 지향성을 떠난 반영적 앎에 가깝게 될 수 있다는 아마데오 조지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으로부터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역설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 곧 분별적 반성이 아닌 무분별적 반성은 반영에 가까운 반성일 수 있고, 지눌이 의도하는 반조도 바 로 반영에 가까운 무분별적 반성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눌은 반조가 진심과 망심을 변별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변별은 서술을 목표로 삼아 다양한 의식작용들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분별적 반성이 아니다.

 

4. 반조는 쥐들이 출몰하는 어두운 광에 빛을 비추는 일로 비유된다. 빛이 비추어지는 동안에는 광에 쥐들이 출몰하지 못한다. 증자증분이 견분을 반조하는 동안에는 견분에서 망념적 분별이 출현하지 못한다. 물론 반조하는 동안에도 가끔은 망념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조의 진행 중에 반조가 잠시 중단되어 망념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망념이 반조의 능력을 이겨내면서 출현한다는 것은 아니다. 태양빛이 빨래를 오래 비추면 빨래의 색깔이 탈색되듯이, 반조가 오래되면 망념은 출현할 힘을 상실하고, 또한 의식 저편에 숨어 잠재의식으로 머무는 망념의 종자도 점차 힘을 상실한다. 반조는 견분에 빛을 비추어 망념의 출현을 막고 또 잠재적 망념의 힘을 탈취하는 과정이다.

 

5. 심4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견분이 현재의 상분을 지향하는(연緣하는) 것은 지각이다. 2) 견분이 과거의 상분 및 이와 결부된 과거의 견분을 지향하는 것은 기억이다. 3) 자증분이 현재의 견분을 지향하는 것은 반영이다. 4) 증자증분이 (자증분이 반영하며 저장하는) 현재의 견분을 지향하는 것은 반성이다. 5) 그런데 현장에 따르면, 자증분은 견분만이 아니라 증자증분도 지향한다. 이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는 자증분이 견분만이 아니라 증자증분도 반영하며 저장한다는 의미이다. 자증분은 (견분의) 지각작용은 물론 (견분의) 기억작용도 저장하고, 현재의 견분을 반성하는 증자증분의 작용, 곧 증자증분의 반조작용도 저장한다. 반조작용의 저장이 반복될수록, 반조작용은 이전보다 쉽게 활성화될 수 있다. 달리 말해, 반조작용이 반복될수록 반조작용이 습성화되는 이 유는 자증분이 매번의 반조작용을 저장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어떤 능동작용actus의 지속적 수행은 그 능동작용을 습득성Habitualität으로 되게 하고, 더 나아가 자아의 인격적 속성으로 되게 한다고 말한다. 자아의 속성이 달라진다는 것은 자아가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지눌이 “반조의 노력”을 통해 “원조”(원만한 관조)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은 반조를 습득성으로 갖추게 되면 저절로 원조에 이르게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된다는 취지의 말은 고려시대의 지눌과 현대 현상학자인 후설에게서 함께 나타난다. 진리는 고금에 두루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주1) 若眞心者. 無知而知. 平懷圓照故. 異於草木. 不生憎愛故. 異於妄心. 即對境虚明. 不憎不愛.(지눌, 「眞心直」說, 『普照全書』, 普照思想硏究院編, 佛日出版社, 1989, 65쪽)

(주2) 若無親切返照之功, 徒自點頭道, 現今能知, 是佛心者, 甚非得意. 豈可認目前鑑覺爲空寂靈知. 不辨眞妄者, 爲悟心之士耶. 當知吾所謂悟心之士者, 非但言說除疑, 直是將空寂靈知之言, 有返照之功, 因返照功, 得離念心體者也.(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普照全書』, 159쪽)

(주3) Giorgi, A., “Concerning the phenomenological methods of Husserl and Heidegger and their application in psychology”, Collection du Cirp, Vol. 1, 2007, p.73.

(주4) Iso, Kern, “The Structure of Consciousness According to Xuanzang”, Journal of the British Society for Phenomenology, 19: 3, 1988,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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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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