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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마당]
조사(祖師)들의 가르침 되새기는 방생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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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6 년 5 월 [통권 제37호]  /     /  작성일20-05-29 12:32  /   조회5,19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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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 불자들이 방생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보살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잘 지내셨지예?”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아이고! 보살님도 오셨네예!”

“반갑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알리는 연등이 도량을 장엄했다. 연등과 함께 백련문도 불자들의 미소도 빛이 났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4월 12일(음력 3월 6일), 성철 스님 탄생 성지 겁외사는 서울, 하남, 의왕, 대구, 마산, 부산 등에서 모여든 1,000여 명의 불자들로 북적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피곤할 만도 했지만 불자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밝고 활기찼다.

 


겁외사 대웅전 마당에서 예불을 올리는 백련 불자들 

 

불자들은 먼저 대웅전으로 향했다. 겁외사 부처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마당으로 나와 성철 스님 상에 예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겁외사 맞은편의 성철스님기념관으로 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기념관을 둘러봤다. 신심(信心)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짧지 않은 동선을 따라 백련문도 불자들은 숨 가쁘게 다녔다. 한숨을 돌릴까 싶었는데, 예불이 시작됐다. 대웅전과 마당을 가득 메운 불자들의 예불 소리가 경내에 스며든다.

 

용성, 동산, 성철……, 그리고 한국불교

 

예불을 마치고 불자들은 백련문도 스님들을 따라 다시 기념관으로 갔다. 1층의 성철 스님 설법상에 예를 올리고 2층 퇴옹전으로 갔다. 3월 20일부터 27일(음력 2월 19일)까지 성철 스님 탄신 104주년을 맞아 40여 명의 불자들이 철야정진을 해서인지 제법 대중선방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자리를 정비한 스님과 불자들이 ‘조사전’ 앞에 섰다. ‘불·법·승’ 구호에 이어 하얀 천이 걷어지자 용성 스님과 동산 스님, 성철 스님의 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들은 박수로 조사(祖師)스님들을 환영했다.

 

지난 몇 달간 조사스님들의 진영을 모시는 작업을 진행했던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이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백련 문도스님들이 조사전 제막을 하고 있는 모습 

 

“성철 큰스님 기념관을 낙성한 뒤 많은 분들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러 어른들께서 성철 큰스님의 스승이신 동산 큰스님과 노스님이신 용성 대조사님도 함께 모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큰스님 선양 사업을 하면서 용성, 동산 두 큰스님도 더 잘 모셨으면 하는 고민을 하던 차에 이렇게 진영을 함께 모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무를 도와준 원암 스님과 우리 문도 스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항상 마음을 써 주시는 불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 용성, 동산, 성철 스님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용성 스님(1864~1940)은 설명이 필요 없는 ‘대조사’다. 스님은 16세 때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다가 3년여 간의 옥고를 치렀다.

 

용성 스님은 특히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줬고,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항일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용성 스님 열반 후 대각사를 찾은 김구 선생은 “용성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시어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셨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주시어 만대의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 주셨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성철스님기념관 내 조사전 모습 

 

이후 대각사에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적 색채가 짙어가던 불교 정화에 주력했다. 대각교 운동은 사회개혁과 민족정기 승화에 연결되어 한국사회에 역사적 전환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스님은 『조선글 화엄경』을 비롯해 30여 종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겼고,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도 한글화 했다.

 

용성 스님은 성철 스님과도 인연이 있었다. 출가 직후 스승인 동산 스님을 따라 부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 철을 난 성철 스님은 범어사 내원암으로 가서 용성 스님을 시봉했다. 용성 스님은 다른 스님들을 모두 선생이라 불렀는데, 손자뻘인 성철 스님에게만은 꼭 ‘성철 수좌’, ‘성철 스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스님이라고 부를 만한 중이 있어야지. 그런데 너를 대하니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참선 정진 열심히 해라.”

용성 스님이 범어사에서 서울 대각사로 주석처를 옮겨가면서 성철 스님은 용성 스님 시봉을 마무리했다.

 

동산 스님역시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을 세운 대종사다. 스님은 젊은 시절 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나 용성 스님을 만나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1950년대 이후 진행된 불교정화불사를 진두지휘했고, 범어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성철 스님이 재가자 신분으로 산청 대원사에서 정진하다 해인사로 가 출가를 할 때 제자로 맞아 준 스님이 바로 동산 스님이다. 출가 당시 동산 스님을 만났던 성철 스님의 회고가 재미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중은 정말 안 될라 캤는데, 그 노장을 가만히 보니까 싫지가 않더란 말이야. 그래 어째 하다보이 영 이상하게 돼버렸어. 강제로 계를 받은 거야. 동산 스님의 상좌가 된 거라.”

이렇게 성철 스님은 출가했다. 동산 스님과의 인연, 출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처럼 시작됐다.

 

조사전 제막식이 끝나고 대중들은 함께 예를 올렸다. 오늘날 불자로서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는 가르침을 준 어른들을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같이 존중하라”

 

기념관에서 대중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호강이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방생(放生)을 하기 위해서다. 경호강 옆 공원에 모든 대중이 모여 방생의식이 시작됐다.

 


방생을 하고 있는 원택 스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은 여러 겁 동안 윤회하면서 지은 업장을 조금이라도 소멸하고자 조촐하게나마 무참히 죽어가는 약간의 미물을 살려주는 방생의 법요를 거행하고 있나이다.

이 중생들이 업장은 두텁고 정신은 흐리오니 바라옵건대 제불보살님의 위신력으로 호념하여 보살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자비로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옛 어른들의 격식을 본받고, 대승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묵은 빚을 갚고, 오는 세상의 밝은 복을 짓고자 간절히 참회하옵고, 이 불쌍한 미물들을 위하여 삼귀의 계와 여래의 십호와 십이인연의 감로법을 들려주려 하오니 영원히 해탈의 씨앗을 맺게 하여 주시고 무연대비를 청정법수에 내려 주시와 이 자리에 잡혀온 미물을 비롯하여 유형무형의 대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생의 때를 벗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위없는 법락에 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무 청량지 보살마하살 나무 청량지 보살마하살 나무 청량지 보살마하살”

 

의식이 끝나고 대중들은 줄을 지어 경호강으로 갔다. 컵에 담긴 작은 생명들이 넓은 경호강에서 맘껏 뛰어놀며 평화롭게 지내기를 기원했다.

 


원공행 보살님이 방생을 하고 있다 

 

부산 고심정사에서 온 원공행 보살님은 “성철 큰스님께서는 생전에 모든 생명을 부처님같이 존중하라고 하셨다.”며 “매년 이렇게 방생을 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중들은 방생을 마치고 공원 곳곳에서 맛있는 점심공양을 했다. 불자들의 모습이 흡사 소풍 나온 여고생과 같았다. 

 

공양을 마치고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삼사순례가 이어진 것이다. 부산 고심정사와 마산 정인사 신도들을 지리산 길상선사를 찾았다. 산중 벚꽃은 이제야 절정을 맞고 있었다. 대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웅전에 모여 능엄주를 독송했다.

 

고심정사 불자들은 길상선사에 이어 고성 운흥사를 찾았다. 운흥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군영으로 활용된 곳으로 사명 대사 휘하 승군 6,000여 명이 왜적과 맞선 곳이다.

 

운흥사는 매년 음력 3월 3일 영산대재를 봉행하고 있다. 영산대재는 조선 숙종 때부터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다 숨진 승병, 지방의병, 관군, 수군들의 영혼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화행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생소했던 운흥사의 역사를 알고 나니 불자들도 뭔가 반가운 표정으로 절을 참배했다.

 


운흥사 대웅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고심정사 불자들 

 

천진성 백련암 신도회장은 “1년에 한 번이지만 큰스님 가르침대로 방생법회를 봉행하고 세 곳의 사찰을 참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수행이 된다.”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 정진하는 백련불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운흥사 참배를 마친 고심정사 불자들은 저녁공양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를 폈다. 음력 3월 6일, 긴 하루가 짧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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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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