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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비움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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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15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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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내게 들어왔던 뺀질이들. 얼굴도 고향도 각자 다르건만, 내 마음 한쪽을 부숴놓고 간 건 똑같다. 그들은 건방졌고 때로는 잔인했으며 하나같이 입으로 일했다. 탄탄하고 날카로운 방어기제로 살아가는 것들이 나는 싫었다. 나의 성실과 재능은 그들 앞에서 한 마리 미련곰탱이가 되어 무명(無名)의 뻘밭을 굴렀다.

 

그러나 억울하고 기진한 와중에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사실 그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증오심의 절반이 열등감이란 걸 알게 되자, 나는 비로소 편안히 늙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는 재주가 서로 달랐을 뿐이다. 내가 열매를 취하려 나무에 오를 때, 그들은 농장주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은 서로 방향만 다르다. 공통적으로 부정적인 기분 혹은 결핍의 감정이다. 스스로 못났다는 생각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욕심과 분노를 낳는다. 그리고 욕심에 사로잡히든 분노에 휘둘리든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러면 괴롭다. 탐진치 삼독. 탐심과 진심의 쳇바퀴 안에선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증오심이 볼썽사납다고 열등감 속으로 파고드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공성(空性). 마음의 바깥엔 아무 것도 없다는 자각이 사람을 제정신으로 이끈다. 그래서 명상도 하고 심호흡도 하는 것이다.

 

밖으로는 친절 안으로는 만족. 종교가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다.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 밖으로는 실례 안으로는 스트레스다. 누구 말마따나 모든 타인은 지옥이다. 친절해야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만족해야 바람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뜨거운 그들이 더욱 열불내지 않도록, 심기를 거슬려선 안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내가 다 쓰기에도 너무 짧으니까.

 

제60칙 

철마의 암소(鐵磨牸牛, 철마자우)

 

유철마(劉鐵磨)가 위산(潙山)에 오니, 위산이 일렀다. “늙은 암소가 왔구나.” 철마가 응수했다. “내일 오대산에 큰 재(齋)가 있다던데, 큰스님께서도 가시겠습니까?” 위산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철마는 나가버렸다.

유교문화에 속한 한국인들은 제사에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불교 고유의 의식인 재(齋)와 혼동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재’를 ‘천도제’라 표기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재(齋)’와 ‘제(祭)’는 한끝 차이의 글자이지만, 엄밀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영원히 떠나시오’이고, 후자는 ‘언제든 오시오’로 상반된 특징을 갖는다.

 

‘祭’라는 한자는 月+又+示의 조합이다. 여기서 ‘月’은 하늘의 달이 아니라 고기[肉]를 일컫는 ‘육달월’이다. 육달월에 ‘또 우(又)’와 ‘보일 시(示)’가 붙었으니, 종합하면 ‘고기를 겹겹이 쌓아 내보인다’ 곧 ‘돌아가신 혼령을 위해 진수성찬을 대접한다’는 의미다. 결국 유교의 산물인 제사의 핵심은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으니 어서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후손들을 음덕(蔭德)으로 보살펴 달라”는 청원이다. 죽은 자들을 위한 봉양과 추모의 성격도 적지는 않으나, 요점은 살아 있는 자들의 이익과 행복에 맞춰져 있는 셈이다.

 

반면 ‘齋’는 ‘가지런할 제(齊)’에 ‘보일 시(示)’를 합친 것이다. 제사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만들어 내보인다는 행위는 비슷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음식을 바치는 마음이 청정하고 반듯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식의 규모보다는 의식을 치르는 정신을 중시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런 맥락에서 재(齋)는 계(戒)와 통한다. 내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올곧게 기도해야만, 영가가 윤회의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세계에서 영영토록 편안히 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욕되고 억울했던 이승일랑은 빨리 잊으라’는 권고도 담겼다.

 

제사와는 달리, 죽은 자들을 향한 위로와 자비가 재(齋)의 진면목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제’에든 ‘재’에든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의 음식이 제공된다. 사람들은 음식을 마구 밀어 넣은 입으로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의 서글픔을 논하고 먼저 간 인생의 곡절과 단점을 안주삼아 씹으면서 거하게 한 끼를 때운다.

 

유철마는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에게 출가한 비구니 스님이다. 성미가 날카로워 ‘철마’라고 불렸다 전한다. 문답은 전반적으로 ‘한가로움’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다.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에 크게 잔치가 열리니, 온 산이 입들로 미어터질 것이다. 착어(着語)에는 “어린 중일수록 부처를 자주 들먹이고 늙은 장수는 병졸의 일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쓰였다. 완전한 삶은, 스스로에 대해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제61칙 

건봉이 한 획을 긋다(乾峰一畫, 건봉일획)

 

어떤 승려가 건봉(乾峰)에게 물었다. “시방의 박가범(薄伽梵)이 한 길로 드신 열반문이 있다는데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건봉이 주장자로 땅 위에 줄을 하나 주욱~ 긋더니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승려가 같은 질문을 운문문언(雲門文偃)에게 했다. 운문이 말했다. “이 부채가 뛰어올라 33천에 올라가서 제석천왕의 코를 비틀고 동해의 잉어를 두들겨 패니, 빗줄기가 동이의 물을 쏟는 것과 같다.”

‘박가범(薄伽梵)’은 산스크리트 ‘Bhagavat(바가바트)’의 음차(音借)다. 모든 복덕을 갖추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자, 곧 부처님을 가리킨다. 열반문(涅槃門)이란 깨달음의 길을 의미한다. 건봉 선사는 땅 위에 줄을 하나 그어 거기에 해탈이 있다고 가르쳤다. 진정한 행복은 가늘고 짤막하다.

 

일심(一心)이 만법(萬法)이다. 오만 가지 생각의 근원은 한 생각이다. 운문의 입담은 현란하지만, 건봉이 그은 줄 한 가닥에서 벌어지는 소동일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부처님 손바닥 위인 세상살이에서, 너무 나대었고 너무 흔들렸다. ‘Bhagavat’는 박가바(薄伽婆)로도 번역된다. 바꿔봐.

 

제62칙 

미호의 깨달음에 의지해야 하는가?
(米胡悟否, 미호오부)

 

경조미호(京兆米胡)가 어느 승려에게 앙산혜적(仰山慧寂)에게 가서 이렇게 물으라 했다. “요새 사람(今時人, 금시인)들도 깨달음에 의지해야 합니까?” 앙산이 답했다. “깨달음이 없지는 않으나 둘째 것(第二頭, 제이두)에 떨어진다면 난들 어쩌겠는가?” 승려가 돌아와서 미호에게 이 말을 전했다. 미호는 깊이 수긍했다.

자고나면 신제품이 나오고 순식간에 톱스타가 뒤바뀌는 세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물(外物)에 마음을 빼앗긴다.누군가가 밉다거나 또는 부럽다거나 하는 마음이 들면 내 삶은 이미 상대에게 종속된 것이다. 심지어 ‘그리움’이라는 아름다운 마음도 본래는 망상이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면, 무심(無心)이 아니라면, 모든 생각은 ‘둘째 것’이다. “유행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세간의 채근은, 사실 제풀에 노예가 되라는 저주다. 그러나 권모술수가 이기는 게 또한 사바세계다. 깨달음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위대하나, 돈으로 바꿀 수 없어서 무시당한다. 한잔의 비움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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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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