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독약일지라도 물리칠 때와 받을 때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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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6 년 10 월 [통권 제4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19회 / 댓글0건본문
해인사는 송(宋)씨를 미워하다
추석인지라 가야산을 찾았다. 사명 대사 부도탑을 참배했다. 조선사회의 온갖 모순을 한 몸에 안고서 한 시대를 살다 가신 어른이다. 열반 당시 독침설은 야사(野史)에 구전으로 전한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야사를 전문적으로 수집하였다. 『어우야담』은 그 노력의 결실이다. 그는 「가야산 팔만대장경 상량문」을 남긴 문인이다. 따라서 해인사의 여러 야사도 들었을 것이고 이를 더러 기록으로 남겼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책이름만 남아 있는 『유몽인감난록(柳夢寅勘亂錄)』에 이 ‘사명당독침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진란이 끝난 뒤 왕명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도일하는 사명 대사를 동래부사 송상윤(宋象允)은 전송하지 않았다. 물론 수천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할 때도 마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반신분인 부사가 천민대접을 받는 승려 계급에 예의를 표하는 것이 마뜩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변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 중생심이다. 전쟁 중에는 의병과 승군의 기세에 숨죽이고 일신의 안일을 위해 공직자의 직분도 망각하고 도망을
일삼던 관료들이 이제야 그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제의 잠재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어쨌거나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그 부사를 수신사 자격으로 참형에 처했다.
뒷날 그 아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 한의사를 가장하여 해인사에 왔고 병석에 누워 있는 대사에게 독침을 놓았다고 한다. 전후사정을 들은 사명 대사는 인과응보를 여기에서 멈추고자 절에서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를 몰래 도망치도록 선처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 후 당신은 열반했다. 그 이후 해인사에서 송가(宋家)는 제대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집권세력 노론은 전쟁결과에 대한 사과 및 책임은커녕 오로지 기득권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다. 전쟁영웅 영의정 류성룡은 노론과 견해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면직시켰다. 집권세력의 치부와 전쟁의 맨얼굴을 기록한 『징비록』은 금서목록에 올려 읽지도 못하게 했다. 전쟁을 만나 목숨보다 소중하다면서 신주 받들 듯 모시던 향교의 위패들도 몽땅 버리고 도망갔다. 장수향교를 지켰던 이는 노비출신 정경손이었다. 왜적이 향교로 들어서자 ‘내 목을 치고 가라’며 맞섰다. 그 덕분에 향교를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도망갔던 토호들이 뒷짐 지고 나타나 헛기침을 하면서 그 공로에 대하여 ‘장수삼절(長水三節)’이라는 훈장을 주는 것으로 자기 일을 다한 양 면피했다. 사상이건 체제건 나한테 유리할 때만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일신의 영달과 기득권 유지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신노론세력’들의 갖가지 양태는 변주를 거듭하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독약을 물리치기도 하고 받기도 하다
독약사건은 『보림전』 권6에 보인다. 남인도의 왕인 천덕(天德)은 주술사인 통영(通靈)의 말을 매우 신뢰했다. 그때 25조 바사사다(婆舍斯多)가 나타나면서 왕의 마음을 빼앗았다. 질투심에 독약으로 존자를 해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존자는 복용 후에도 몸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다만 머리 위에 3척 크기의 덮개가 새로 생겼다. 그 덮개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영통이 손으로 만지니 팔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다른 주술사들이 막대기를 이용하여 덮개를 쳤으나 막대기를 허공에 휘두르는 것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덮개를 휘저은 자는 팔이 그대로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던 약기운에 닿지 않는 이들은 모두 존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달마 대사는 혜가 스님에게 『능가경』 4권을 전하는 형식을 통해 전법했다. 이로써 당신 할 일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이 나라에 와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이다. 6번 독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7번째 독살은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천천히 독배를 마셨다.
『보림전』 권8에서 달마 대사는 독살당한 것으로 기록했다. 달마독살설은 북종선의 전등역사서인 두비(杜備)의 『전법보기(傳法寶記)』에 처음 나오며, 6번 시도설은 『신회어록(神會語錄)』에서 시작된다. 사천성을 무대로 활동하던 보당종(保唐宗)의 법맥을 밝힌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와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경덕전등록』은 이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 횟수를 7번이라고 한 것은 『보림전』과 『조당집』이다. 또 역경가이며 지론종(地論宗)의 시조인 보리유지(菩提流支)와 사분율(四分律)을 전공한 광통(光統, 468~537) 율사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역대법보기』가 최초로 기록했다. 뒷날 신청(神淸, ?~1361)은 『북산록(北山錄)』 권6에 “이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런 식의 기록 자체를 엄청나게 비판했다. 어쨌거나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반영한 상징코드로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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