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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인생은 눈 내린 설악산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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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12 월 [통권 제4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8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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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간화선 대법회에 이틀간 다녀왔다. 내게 할당된 업무는 두 스님의 법문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한 선승(禪僧)은 “간절하고 꾸준하게 화두를 들면 인생이 바뀐다.”며 지속적인 정진을 당부했다. 시원시원했다. 또 다른 선승은 어눌하고 더듬는 편이었다. 깡마른 목소리로 더구나 자주 끊기면서 나오는 설법은 그러나 표창(鏢槍)과 같아서, 가슴 한쪽에 피를 냈다. “이 대법회조차 환유(幻有, 헛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다 부처에요.” 왠지 통쾌했다면, 불경(不敬)일까.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는 방법은, 생각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무심(無心)이면 그만이다. 거기가 깨달음이고 삶의 완성이다. 따로 구할 필요도 애써 공부할 필요도 없다. 잡념이든 신념이든 통념이든, 욕심이든 앙심이든 심지어 진심(眞心)이든, 늘 생각이 화근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 마음인데 무엇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나. 실체도 없는 마음인데 어떻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나. 생각은 나의 흔적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 밥 생각이 뚝 떨어진다. 부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제69칙

남전의 암소(南泉白牯, 남전백고)

 

남전보원(南泉寶願)이 대중에게 일렀다.

“삼세의 부처님은 알지 못하는데 살쾡이나 암소는 알고 있느니라.”

 

완전한 지혜를 갖췄다는 부처님이라손 살쾡이나 암소의 삶을 알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단지 당신이 살쾡이나 암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한계다. 그들처럼 피 묻은 날고기나 생풀만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고, 네 발로 걸어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살쾡이와 암소의 삶이라는 조건에선, 살쾡이와 암소가 최고의 권위자이자 심지어 부처님이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의 이용가치를 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그의 약점을 안다는 것에 불과하다. 앎이란 이토록 쩨쩨하고 비열하다. 지행일치(知行一致)는 윤리학에서 주로 이용되는 담론이다. 욕망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도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기란 얼핏 매우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알고 보면 자유자재로 지행일치를 실천하는 편인데, 아는 만큼 도둑질하고 아는 만큼 남을 괴롭히는 데는 너무나 능숙한 까닭이다. 

 

희대의 현자라고 해서 죽음을 알 수 있을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천명(天命)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의 뇌는 진실이 아니라 철저하게 생존에 목적이 맞춰진 채 구성되어 있다는 전언이다. 앎이란 결국, 자기가 본대로 혹은 편한 대로 믿는 것일 뿐이다. 오직 모르는 마음이어야만 겸손해질 수 있고 따뜻해질 수 있다. 앎은 나를 가둔다. 안다는 단정과 착각을 버려야 또 다른 ‘나’들이 내 마음에 기대어 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자란다.

 

제70칙

진산이 성품을 묻다(進山問性, 진산문성)

 

진산주 : 생(生)의 성품과 불생(不生)의 성품을 분명히 아는 이가 어찌하여 생에 꺼들리는가?

수산주 : 죽순은 언젠가 대나무가 되겠지만 아직은 대나무가 아니지.

진산주 : 그대는 마침내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다.

수산주 : 여하간 나의 소견머리는 이러할진대 그대는 어떠한가?

진산주 : 여기는 감원의 방인데 어디가 전좌의 방인가?

수산주는 절을 했다.

 

진산주(進山主)는 청계홍진(淸溪洪進)의 별명이고 수산주(修山主)는 용제소수(龍濟紹修)의 별명이다. 둘 다 지장계침(地藏桂琛) 아래서 공부했다. 같은 문중의 사형사제간이거나 동년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하여 생에 꺼들리는가?’ 수산주에 대한 진산주의 핀잔에선 아마도 수산주가 못난 짓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돈에 욕심을 냈다든가, 누군가를 헐뜯었다든가, 앓는 소리를 했다든가 등등 아무튼 실존(實存)의 비린내를 들켰으리라. 

 


 

 

수행자로서 무척이나 속상했을 법한데 수산주의 반응은 자못 겸손하다. 자기는 다 자란 대나무가 아니라 그저 죽순의 수준이란다. 제대로 걸려들었고 이겨먹었다는 생각에 진산주는 으스댄다. ‘너도 언젠간 나처럼 어른이 될 거야.’ 형이 동생의 머리는 쓰다듬으며 우쭐대는 꼴이다. 도저히 못 참겠던지 수산주는 다시 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그러는 너는?’ 대개 중생은 상대를 무시하거나 깔아뭉갬으로써 마음을 정화한다. 방귀 뀐 놈이 똥 싼 놈을 못 당하는 법이다. 

 

감원(監院)은 암자의 주지라고 할 수 있으며 전좌(典座)는 음식과 이부자리를 담당하는 소임이다. 감원이 전좌보다 높다. 곧 진산주의 뻐김은 알아서 기라는 능멸일 수 있는데, 수산주는 정말로 알아서 기고 있다. 물론 수산주의 절은 비단 굴종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어떤 통찰로 읽히기도 한다. ‘그래, 내가 남과 즉(卽)하느라 나를 잃었구나!’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은 부지기수이나 자기만으로 사는 이는 희귀하다. 

 

제71칙

취암의 눈썹(翠巖眉毛, 취암미모)

 

취암영참(翠巖令參)이 하안거 끝자락에 대중에게 설법했다. “한여름 내내 형제 여러분들을 위해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지금 내 눈썹이 남아있는가를 보라.” 이에 보복유산(保福遊山)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 하였고 장경혜릉(長慶慧稜)은 “아니, 눈썹이 자꾸 자라는데?” 하였고 운문문언(雲門文偃)은 “조심하라.” 하였다.

 

끊임없이 자라는 게 머리카락이다. 승가에선 머리카락에 자꾸만 떠오르는 번뇌를 대입해 무명초(無明草)라 부른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밀어버린다. 삭발은 머리를 파르라니 깎듯이 번뇌를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머리카락과 똑같이 못된 털이라는 맥락에서, 수염도 불허하는 게 원칙이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수염은 불결과 불손의 상징이다. 

 

다만 눈썹은 웬만해선 그대로 놔둔다. 상식적으로 눈썹 없는 얼굴은 거의 화상 입은 얼굴만큼이나 볼썽사납다. 한편으론 간혹 스님들이 그야말로 사무치는 발심(發心)을 할 때, 눈썹마저 밀어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애오라지 초인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마음이다. 눈썹은 마지막 자존심인 셈이다. 

 

인생의 성장은 결국 생각의 성장이다. 잡념은 우리를 어리석게 하고 못 살게 구는 것만 같지만, 묘안과 통찰 역시 잡념에서 나오는 법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육조혜능의 충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눈썹은 눈썹의 소유자가 지닌 법력의 크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안거는 여름 3개월간 두문불출하고 오직 참선정진만 하는 기간이다. 취암은 아직 깨치지 못한 문하생들을 위해 땀띠가 나도록 열심히 가르쳤는가 보다. 눈썹이 다 빠졌다니까. 하지만 다른 선승들은 그의 노력을 한사코 깎아내리는 분위기다. 제아무리 기가 막힌 생각이라도, 한 고비를 넘을 때나 요긴한 법이다. 인생은 눈 내린 설악산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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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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