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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지혜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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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1 월 [통권 제4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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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가르치려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옛 선사(禪師)들은 ‘깨달음’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보여줄 뿐이었다. ‘깨달음은 생각 이전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방편이 바로 선문답이다. 도(道)는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똥 막대기’라는 말을 들으면 부지런히 굴러가던 머리에 제동이 걸린다. 뚱딴지같은 대답은, 도(道)라는 게 고귀하고 오묘한 무엇일 거라는 선입견에 내리치는 일종의 방망이다.

 

생각이 화근이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너’, 생각대로 되어야 하는 ‘나’와 생각대로 움직여줘야 하는 ‘너’…. 온갖 탐욕과 분별과 증오의 유래다. 생각이 이기심을 낳고 생각이 살인을 낳는다. 결국 무념(無念)은 평화에 다가가는 가장 단순하고 간명한 길이다. 가르고 비교하고 질투하는 분별심만 없다면 행복은 보장된다.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마음을 진득하게 앉혀두면, 생각지도 못한 지혜 그리고 자비가 드러날 것이다. 그냥 자기 살자고 살아갈 뿐인 나무가 달콤한 열매와 울창한 그늘을 내어놓듯이.

 

제72칙
중읍의 원숭이(中邑獼猴, 중읍미후)

 

앙산혜적(仰山慧寂)과 중읍홍은(中邑洪恩) 간의 대화

앙산 : 어떤 것이 불성의 이치입니까?
중읍 : 내가 그대에게 비유를 들어 말하리라. 어떤 방에 여섯 개의 창문이 있고 그 안에 원숭이 한 마리를 넣었는데 밖에서 누가 ‘성성(猩猩)아’하고 부르면 원숭이는 곧 대꾸를 한다. 여섯 창문에서 각각 부르면 각각 대꾸한다.
앙산 : 만약 원숭이가 잠이 들면 어떡합니까?
중읍이 법상에서 내려와 앙산을 꽉 잡으면서 일렀다.
“성성아, 나와 네가 만났느니라.”

『서유기』의 손오공은 원숭이다. 재주와 신통이 탁월해 원숭이들의 우두머리 그러니까 미후왕(美猴王)으로 불렸다. ‘성성이’는 오랑우탄을 뜻한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주 서식지이니, 옛 중국인들도 그 존재를 알았을 법하다.

 

알다시피 원숭이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선상에 서 있다. 인간의 유전자와 97% 일치한다. 사람과 엇비슷한 신체구조에 사람처럼 걸을 줄도 안다. 그러나 너무 산만하다. 점잖음과 진지함이 인격의 높이를 가늠하는 주된 지표가 되는 까닭은 동물원에 가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줄곧 소란스러운 유인원들의 우리는, 닭들의 처소가 아니어도 닭장이다.

 

여섯 창문이란 여섯 구멍이다. 인체에 대입하면 감각기관 전체를 가리키는 육근(六根)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피부로 두뇌로…. 우리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한다. 족족 반응한다. 인간도 원숭이가 되기 쉬운데 중생심에 취할 때 축생의 성질이 두드러진다.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에 맛의 노예가 되고 무언가를 갖고 싶은 마음에 소유의 노예가 된다. 원숭이처럼 화내고 원숭이처럼 혹하면서, 사람은 기껏해야 옷이나 입을 줄 아는 원숭이로 산다.

 

제아무리 미후왕이라도 사실은 원숭이일 뿐이다. ‘아름다울 미(美)’라는 치장으로 가렸다손 ‘원숭이 미(獼)’라는 본질이 세탁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허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껍질이다. 육근이 잠들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다.

 

제73칙
조산의 탈상(曹山孝滿, 조산효만)

 

어떤 승려가 조산본적(曹山本寂)에게 물었다. “영의(靈衣)를 걸치기 전의 일이 어떠합니까?” “나는 오늘 탈상했다.” “탈상한 뒤에는 어떠합니까?” “술에 곯아떨어지지.”

영의(靈衣)는 수의(壽衣)다. 효만(孝滿)이란 ‘효도를 다 했다’ 또는 ‘효도할 만큼 했다’는 뜻으로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장례를 마쳤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혼식장만큼이나 가기 싫은 장소가 장례식장이다. 시체를 치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과 체력을 소진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몹시 측은하다. 나는 나의 임종도 이러한 마음으로 버려져있기를 간곡히 기도한다.

 

‘영의를 걸치기 전의 일’이란 삶을 가리킨다. 곧 ‘어떻게 살아왔느냐 잘 살아왔느냐’는 게 승려의 물음에 배인 속뜻이다. 그리고 탈상을 했다는 건 살아온 내용이나 가치에 대해 가타부타 하기 싫다는 거다. 이미 삶을 초탈했는데, 성품이 어땠느니 업적이 컸느니 인맥이 화려했느니…. 부질없는 껍데기를 가지고 나를 희롱하려 드느냐는 핀잔이기도 하다.

 

몸에 의지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혼곤하다. 몸을 먹이겠다고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일이 서글프다. 더구나 결혼을 하면 남의 몸까지 먹여야 한다. 이렇게 내게 할당된 몸을 먹이겠다고 남의 몸을 건드리고 골려야 하는 일은 치사하다. 글줄 몇 개를 쓰겠다고 줄담배를 무는 처지가 너무나 한심스럽다. 이승에서 드는 마지막 술잔이 그립다.

 

제74칙
법안의 본질과 이름(法眼質名, 법안질명)

 

어떤 승려가 법안문익(法眼文益)에게 물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머묾 없는 근본으로부터 온갖 법이 세워졌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머묾 없는 근본’입니까?” “형상은 본질 이전에 일어나고 이름은 이름 없는 데서 일어나느니라.”

문수 보살이 유마 거사에게 물었다. “몸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탐욕으로 근본을 삼는다.” “탐욕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는가?” “허망한 분별을 근본으로 삼는다.” “허망한 분별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왜곡된 생각으로 근본을 삼는다.” “왜곡된 생각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는가?” “머묾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머묾 없음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머묾 없음은 근본이 없다.”

 

형상의 기반은 본질이지만 정작 본질은 없다. 이름의 기반은 이름 없음이건만 정작 이름은 없다. 그러고 보니 ‘무엇으로 근본을’이라 쓰든, ‘무엇을 근본으로’라 쓰든, 문맥이 통한다. 이러구러 살아간다. 어떻게든 굴러간다. 강에 둑을 쌓는다 해도 강물은 흘러간다. 앞쪽으로 가던 길을 위쪽으로 선회할 뿐. 흐름이여 진정한 근본이여. 흘러가는 흐름이어도 좋고 흘러넘치는 흐름이어도 좋다. 그대를 믿고 흐르리라. 천하의 근본 없는 놈이 되어 밟혀도 흐르고 욕되어도 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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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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