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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돈점(頓漸) 진리담론의 상생과 발전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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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7 년 3 월 [통권 제4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4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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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잘 알다시피 청담 스님, 자운 스님, 성철 스님 등이 주도하신 ‘봉암사 결사’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현대불교>에서 신년 특집으로 ‘결사(結社)’를 주제로 한 특집을 기획·연재한 바 있습니다. 지난 호 「고경」에 ‘봉암사 결사 70주년과 해인총림 방장 취임·백일법문 50주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원택 스님과 박태원 교수님이 고심정사 불교대학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2월 초순 무렵쯤에 고심정사 불교대학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문선이 보살님께서 “학장스님! 경전반에서 니까야 강의를 해주시는 울산대 박태원 교수님께서 『돈점(頓漸) 진리담론』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알고 계십니까?” 하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 소식도 못 듣고 있으니 저에게도 한 권 부탁드립니다.”고 말씀드리자 며칠 뒤 책이 도착해서 얼른 제1장 읽어 보고는 얼마나 반갑고 놀라고 감사한지 박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몇 년 전 “교수님! 아직도 학계에서는 돈오점수의 장벽이 우뚝 서 있으니 언제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이 조금이라도 터 잡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고 서명원 교수님께 토설하니, 서 교수님은 특유의 유머로 “원택 스님! 이제 다리 뻗고 주무셔도 됩니다. 이제 한국불교에서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를 논하려 하면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를 논해야 하고,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를 논하려 하면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가 한 산맥을 이루고 있다면 이제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의 산맥이 나란히 달리고 있게 되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박태원 교수님의 책에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라는 부제를 보는 순간 문득 그때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은 1967년 겨울 동안거 ‘백일법문’ 당시였습니다. 그때는 『육조단경』을 위시하여 “선종의 근본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주장하시며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론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해인사 법당에서의 법문에 그치시고 큰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다가 1981년 12월 15일 『선문정로』가 출판됨으로써 학계에 큰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81년 『선문정로』의 제1장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돈오돈수를 정의하시면서 1967년 ‘백일법문’에서는 보이지 않던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 ‘표종장’에서 인용하여 돈오돈수를 펼쳐 보이시는 것이 뚜렷한 차이점으로 드러납니다. 그 설명에서 법문하신 종경록 100권을 회당조심 선사가 3권으로 만들어 『명추회요(冥樞會要)』라고 이름하여 세상에 널리 유통되었다고 하였는데 지난 2015년 7월에 장경각에서 번역 · 출간하였습니다. 『선문정로』가 세상에 빛을 보이자 불교계 안에서도 당혹스러워하고 또 책 내용이 어렵다는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큰스님께서 하루는 소납을 찾으시더니 “그 책이 뭣이 어렵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러나 어렵다고들 하니 『선문정로』를 평석할 교수를 한번 찾아 봐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불교학 교수로 있던 신현숙 교수를 알게 되었고, 큰스님께 여쭈었더니 “한 번 만나 보자.”고 허락하셨습니다. 연락을 드려 신 교수님께서 백련암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게 되었고, 2시간 가까이 비교적 긴 시간 대화를 나누고 배웅 차 해인사까지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신 교수님이 묻고 제가 대답하는 식이었습니다.


“큰스님은 어느 대학 나오셨습니까?”
“큰스님께서는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6년 졸업한 것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배우다가 한문 문리에 통달하신 후 누구에게도 무엇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 당신께서 아는 불교는 29세 때 팔공산 동화사 금당에서 깨치신 후 모두 독학으로 공부하였지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다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대화 중에 엄청난 독서량과 불교학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혼자 공부하신 결과란 말입니까? 대학에 다니신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예! 큰스님 말씀으로는 전부 혼자서 공부하신 것이지 누구의 지도도 받으신 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럼 요사이 일본의 큰 학자들의 학설도 말씀하시는데 그것도 독학이란 말씀입니까?”
“성전암에서 10년 동구불출하고 계실 때 현대의 불교에 관한 불교서적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박태원 교수 저서 <돈점 진리담론>

 

 

신 교수님도 큰스님께서 가지신 불교이론과 지식에 대해서 꽤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신 교수님을 전송하고 큰스님을 뵈오니 큰스님께서도 별말씀 없으시니, 제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쯤 신 교수님이 한국불교학회에서 『선문정로』에 대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 교수님의 발표에 대해서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론을 옹호하는 제1세대 학자들의 공세와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산골의 선사인 성철이 감히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를 무지막지하게 비판하다니 가당치 않다.”는 기세등등함은 저를 아연실색케 하였습니다.

 

1981~2년에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을 받아 드신 성철 큰스님은 “이 두 권의 책을 내었으니 나는 이제 부처님께 밥값 다했다. 이 책들을 제대로 터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바로 아는 사람인 것이다.”고 흡족해 하셨는데, 『선문정로』의 출판으로 인하여 그 유명한 ‘돈점논쟁’으로 불교학계는 용광로처럼 들끓게 되었고 보조학계의 성철 큰스님에 대한 질타는 끝 모르게 이어졌습니다.

 

학회를 마치고 백련암으로 돌아와서 저녁마다 안마를 해드리는 시간에 큰스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국불교학회에 가 보니 모두가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를 연구하는 교수들뿐입니더. 해인사 골짜기에서 큰스님 혼자서 선종 전통사상은 돈오돈수라고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심더. 큰스님 사상을 뒷받침할 인재를 키우셔야지, 이러다간 나중에 큰일 나겠심더.” 누워서 묵묵히 듣고 계시던 큰스님이 벌떡 윗몸을 일으키시더니, 제 왼쪽 뺨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철썩 때리시면서 고함을 치셨습니다. “니 지금 인재양성이라캤나? 이놈아! 나는 평생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 줄 아나? 이놈 봐라, 키울 인재가 없는데 나보고 우짜란 말이고! 뭘 좀 해보자카마 다 못 견디고 도망가고 없는데, 내가 우짜란 말이고, 너거들이라도 내 뜻을 알아 좀 똑똑히 살아줘야지, 다 머저리 곰새끼들만 우글거리니 나도 별수 없지!” 그리고는 또 한 차례 뺨을 치셨는데 여전히 분이 사그라지지 않은 모습이셨습니다.

 

큰스님에게 ‘인재양성’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역린을 건드리는 일인 줄 모르고 크게 혼이 난 며칠 후 “큰스님! 인재양성이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신 역대 조사들의 선어록 가운데 돈오돈수 사상을 주장한 책들을 번역해 알리면 돈오돈수 사상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여쭈어서 겨우 승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87년 11월 30일에 경남 합천군 제1호로 도서출판 장경각을 등록하고 6년여에 걸쳐 『선림고경총서』 37권을 간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옛날 일들이 주마등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박 교수님의 책을 쉬엄쉬엄 들쳐보았습니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이 사상적 · 실천적 · 현실적으로 가장 큰 충격이었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책임 있게 대응해야 할 위치에 있던 송광사 측은, 1990년에 ‘보조사상연구원’을 통해 송광사에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선문정로』 이후 10여년 만에 비로소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에 대한 본격적 학문적 검토를 시도한 것이다.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나 선종 정통성과 관련한 성철의 지눌 비판은 이미 1967년의 『백일법문』이나 1976년에 출간된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제기되었고 『선문정로』는 그러한 관점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성철의 돈점론에 대한 한국불교계의 이론적 대응은 근 20여 년이 넘는 시간을 필요로 한 셈이다.”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한편 성철의 돈오돈수를 선양하기 위해 1987년에 설립된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의 입적 후 1996년에 재단부설의 ‘성철선사상연구원’을 설립하고 이후 매년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돈오돈수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지속한다. 지눌 이래의 돈오점수 전통을 대변하는 송광사 측이 한 축이 되고, 성철을 기점으로 뿌리 내려가는 돈오돈수에 우호적인 해인사 측이 다른 축이 되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각각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탐구해가는 양자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소모적 대립각이 아니라 생산적 상호작용으로 자리 잡은 이 균형 잡힌 양자구도를 매개로 하여, 이후 한국 불교계는 돈점론과 관련된 다수의 탐구 결과를 축적해왔다. 송광사에서 개최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의 국제학술회의는 돈점논쟁에 대한 학술적 검토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현재까지의 돈점론 관련 탐구를 연구자의 관심초점과 경향을 중심으로 편의상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하려는 경향이 하나이고 돈점론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가는 경향이 다른 하나이다.”

 

앞의 두 문단은 이 책 2장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점논쟁’에서 따온 인용에 불과합니다. “요사이 스님들 사이에 태국으로, 미얀마로, 남방의 위빠사나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선의 전통 간화선에 흥미를 잃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방에서도 화두를 들지 않고 남방의 관법을 챙기는 수좌들이 늘고 있다니 큰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고 말하였더니, 박교수님께서 “남방 니까야 불교에서도 배울 점도 있지만 일반적인 중국선의 비판은 또 도를 넘고 있습니다.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론과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론을 한국불교계가 빨리 정리하여 간화선의 뛰어난 점을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새로운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중흥시키는 것이 납자와 불교학자들의 시대적 사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는 취지의 뜻을 비춰보였습니다.

 

박태원 교수님의 『돈점, 진리담론』의 발표는 성철 큰스님의 『선문정로』 출간 이후 35년간의 세월이 흐른 돈점논쟁의 역작 중의 역작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불교 선학계의 분발과 학문적 선학의 연찬이 깊어져 동아시아의 임제종 전통이 살아나 언하대오(言下大悟)의 눈푸른 납자들이 토해내는 방과 할의 울림이 산하를 흔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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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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