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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봉선사 조실스님의 작명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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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8 월 [통권 제2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2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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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에 다녀왔다. 청록의 광릉 숲을 지나 봉선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몇 발짝 옮기다 보면 처음 만나는 당우가 염불원이다. 염불원의 주인이 기거하는 방 입구에는 ‘猶在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오히려 유(猶), 있을 재(在). 허사(虛辭)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현판을 처음 보았을 때, 한문으로 밥 먹고 사는 실력으로 해석을 해보려 했으나 ‘아직 있다’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방 주인에게 물었더니 조실스님이 지어주신 이름이고, 『법화경』 “猶在本處”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검색을 해보니 「신해품」에서 집 나갔던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와 만나는 그 유명한 비유에 ‘유재본처’가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버리고 타국으로 떠난 아들은 옷과 밥을 위해 품팔이로 고생하면서 여기저기 떠돌다가 우연히 본국을 향하게 된다. 한편 아들의 생사를 모르는 아버지는 노쇠해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남아 있는 많은 재물들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아들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던 중 극적으로 아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몰라보고 오히려 번쩍한 위세에 겁을 집어먹고 놀라서 기절한 뒤에 깨어나서 도망친다. 아버지는 아들을 잡지 않는다.

 

아들은 다시 가난한 동네에 가서 옷과 밥을 위해 거름치는 일을 하며 고단하게 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작전을 짠다. 집사 두 사람을 초췌한 형색으로 꾸며 아들이 일하는 곳에 일꾼으로 보낸다. 감쪽같이 위장취업을 한 집사가 품삯을 두 배로 주는 일자리가 있다고 유인하자 구미가 당긴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온다. 일단 아들을 안심을 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아직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편히 있으라 하면서, 이름을 다시 지어주고 아들과 맞먹는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아들은 이런 행운을 만난 것이 기쁘긴 했으나 여전히 자신을 고용살이나 하는 천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무려 이십년 동안 거름을 치면서 그 집에 살고 나서야 겨우 서로 간에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 처소에 어려움 없이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직 본래 있던 처소에 있었다.(후략)

 

爾時 窮子 雖欣此遇 猶故自謂客作賤人 由是之故 於
二十年中 常令除糞 過是已後 心相體信 入出無難 然其
所止 猶在本處

 

이 대목에 ‘유재’가 나온다. 좋은 거처를 누릴 자격이 있는 아들이 자기가 누군지 몰라 아직 행랑채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아들은 소승법에 머물러 있는 제자를 비유한다.

 

이 비유를 읽고 나서 유재당을 보니, 거기 사는 사람과 건물의 위치와 이름 지어준 사람과 이름의 의미가 잘 어울린다. 게다가 ‘본처’같이 의미를 갖는 글자가 아니라, 허사 두자만 따서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대표한 운용의 묘가 기막히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평생 경을 읽고 번역하신 월운 스님이고 유재당 주인은 범패의 명인 인묵 스님이다. 봉선사는 옛날부터 국가지정 교종본찰이고, 지금도 교학을 하는 절이다.

 

그곳에 소리하는 제자 하나가 한동안 다른 절 주지를 맡아 떠나 살다가 몇 년 전에 다시 들어와 절 입구 행랑채 쯤 되는 자리에 거처한다니,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든 유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작명이라고 혼자서 해석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 가서 조실스님을 뵈었다. 스님이 닳아질까 두려워 올해 들어 몇 번 찾아뵙는 중인데,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 속에 나를 골탕 먹이시는 걸 보니 아직(猶) 건재(在)하시다. 유재당 이야기를 꺼내며 이름 지은 뜻을 물었더니 내 해석과는 다른,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거, 왜, 있잖아. 자장율사 예참에 나오는 거.” 하시면서 단숨에 예참문을 줄줄 외우신다. 자장 율사가 지은 게송이라고는 하는데 옛 전거는 정확하지 않고 『석문의범(釋門儀範)』에 실려 있다고 가르쳐주신다. 그러면서 자장 율사가 중국 가서 어느 탑에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고 감격하여 ‘진신사리금유재’라고 했는데, 거기서 ‘유재’ 두 자를 따왔다고 하신다. “아니 그럼, 『법화경』은요?” “아, 그건 그거고.” 아마 두 마음을 다 담아서 중의법을 쓰신 것 같다.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쌍림에서 가신 지 몇 천 년인가
진신사리 지금도 여기 계시어
뭇 중생 예배가 끊이지 않네.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

 

이 해석을 따르자면, 유재당은 상좌가 아직 그 자리에 있어줘서 감격스럽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 된다. 그러고 보니 그 건물이 절 입구에 수문장처럼 듬직이 서 있다.

 

조실을 나오는 길에 염불원에 들르니 유재당 주인이 친정오빠처럼 반갑게 맞아주신다. 방바닥 한 편에 프린트된 문서들이 쫙 펼쳐져 있다. 의례에 관계된 문헌들을 다시 보고 있다고 한다. 몇 장 읽어보니 아름다운 문장들로 짜여 있다. 이런 문장들을 읽고 그것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니 좀 부럽다.

 

유재당 주인의 아버지는 서도 범패를 전수하신 인간문화재 일응 스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물학적 유전자를 물려받고 스승에게 교학적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인묵 스님의 염불은 소리가 좋고 내용도 잘 전달된다. 범음을 펼치기에 최적화된 몸이다. 유재당 염불소리가 유재하기를 바라면서, 능엄도량 다경실에 스승님이 아직 계심에 감사하면서 절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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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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