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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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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5 년 8 월 [통권 제2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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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일하는 것보다 앉아서 일하는 것이 편하다. 모임에 갔는데 나에게만 자리가 없다면 자못 당황스럽다. 잠자리를 바꾸면 선잠으로 고생하기 일쑤다. 이렇듯 ‘자리’란 삶의 질을 가늠하는 기초이며 사람다운 삶을 떠받치는 최후의 보루다. 자리가 있는 곳에 텃세가 있다. 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피와 땀은 결국 자릿세다. 정치는 자리를 얻으려는 힘과 자리를 지키려는 힘이 맞서거나 붙어먹으면서 발전한다. 의자는 일견 무서운 물건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자리 없인 아무 것도 아니다. 거꾸로 말해 자리를 떼어놓고 보면 다들 도긴개긴인 셈이다. 제아무리 덕망이 높다 한들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렇게 비춰질 따름이다. 또한 사정이 이러하니 설령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손 거들먹거리지 말아야 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자리가 없어도 개의치 않고, 자리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며, 근근이 살아도 느리게 가는 사람이다. 드러눕기엔 ‘밑바닥’만큼 좋은 자리도 없다.

 

제22칙

암두가 절을 하니 덕산이 할을 하다 (巖頭拜喝, 암두배할)

 

덕산선감(德山宣鑑)에게 간 암두전활(巖頭全豁)이 문지방에 서서 물었다. “내가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덕산은 대뜸 “할!”이라 외쳤고 암두는 절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산양개(洞山良价)는 “활공(豁公) 정도나 되니까 덕산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에 암두가 말했다.

“동산 노인네가 좋고 나쁜 것도 분간하지 못하는군. 나는 그때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렸더란 말이지.”

 

‘덕산방(德山棒).’ 덕산은 학인들을 지도할 때 걸핏하면 몽둥이를 휘둘렀다. 통증과 하나가 되어 분별망상을 그치라는 취지였다. “말해도 서른 대를 때릴 것이요, 말하지 못해도 서른 대를 때릴 것이다”라는 ‘벼랑 끝’ 교육은 유명하다. 

 

덕산이 제시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곤욕스러우면서도 낯익다. 살다보면 몇 번의 중대한 갈림길을 만나게 마련이니까. 덕산방은 여하튼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는 것이, 우물쭈물하다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후회가 덜하다는 충고의 몸짓으로 여겨진다. 일본에는 ‘비를 맞으면 더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속담이 있다. 

 

어느 외도(外道)가 손에 참새 한 마리를 쥐고 부처님에게 다가와 이죽거렸다. “참새가 죽겠습니까, 살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발을 문턱에 걸치곤 “내가 들어갈 것 같은가, 안 들어갈 것 같은가”라고 되받아쳤다. 부처님이 방으로 들어갈지 말지는 부처님만이 안다. 마찬가지로 참새의 생사 역시 오로지 외도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라는 암두의 질문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게, 본칙(本則)에 대한 평창(評唱)의 설명이다. 비에 젖지 않은 자는 비에 젖은 자의 슬픔을 공감할 순 있어도 대속할 순 없다. 

 

자기가 범부인지 성인인지는 자기가 판단할 몫이다. 남이 가르쳐주지 못하며 가르쳐준다손 겉핥기이거나 골리기에 불과하다. 나를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들이다. 아울러 세상이 자신을 망쳐놨다지만 솔직하게 바라보면 결탁이다. 스스로 내심 좋아서 안일하게 따라가다가 맞닥뜨린 자업자득인 것이다. 

 

얼핏 ‘그림의 떡’만 떡인 것 같고 모순이 수순(隨順)처럼 보이는 게 삶이다. 다만 생각 한 번 돌이킬 수 있다면 누구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비참하고 너절한 인생은 없다. 단지 그렇다는 자학만이 있을 뿐이다. 

 

덕산의 고함은 ‘네 문제는 네가 풀라’는 뜻이며, 암두의 배례는 덕산의 지혜에 탄복했다는 의미다. 동산은 대표적인 괴각(乖角)이었던 덕산과의 한판승부를 무사히 치러낸 암두의 용기를 치하했다. 요즘 같으면 쇠고랑이나 차기 십상인 호랑이선생님에게 사자새끼 한 마리가 불쑥 찾아와 들이댄 격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우쭐댔다면 경계(境界)에 휘둘린 꼴이다. 덕산의 법을 이은 암두는, 스승만큼이나 걸출한 ‘독고다이’였다.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린 상태에서 절을 했다면? 부자연스러운 절은 결국 불경한 절이다. 들고 있던 손의 가운뎃손가락도 궁금하다. 

 

마음이 시험에 드는 까닭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구린 데가 있어서다. 사실 덕산방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은 선택이 아니라 반격이다. 웃어른의 으름장에 쫄거나 무엇을 고를까 전전긍긍하는 대신, 그의 몽둥이를 냅다 빼앗아버리는 것이 선가(禪家)의 정석(定石)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초월한 만큼 누가 뭐란다고 해서 동요할 내가 아니라는 자신감에 근거를 둔다. 물론 그것은 ‘내가 최고’라는 독선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무아(無我)의 정신에 힘입은 결기다. 산인(山人)들은 시험지로 딱지를 접거나 여차하면 그냥 씹어 먹는 자들이다.

 

제23칙

노조가 벽을 향하다(魯祖面壁, 노조면벽)

 

노조보운(魯祖寶雲…)은 누가 찾아오면 돌아앉곤 했다. 남전보원(南泉普願)이 이를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내가 평소 그에게 이르기를 ‘공겁(空劫) 이전에 알아차리라’ 했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 알아차리라’ 했거늘, 아직 한 개는커녕 반 개도 얻지 못했구나. 그래가지고서야 당나귀띠 해(驢年, 여년)에나 깨달음을 만나겠군.”

 

‘말띠 해’는 있어도 ‘당나귀띠 해’란 없다. 곧 면벽(面壁)으로는 천년만년이 흘러도 깨달을 수 없다는 질책이다. 그래도 ‘수행’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대번에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장시간 버티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속세를 떠나 시비에 초연하겠다는 ‘액션’은 진지하고 멋지다. 한편으론 탈속(脫俗)에 대한 집착이자 깨달음에 대한 탐욕으로 비친다는 점에서, 고약한 액션이고 재미도 없는 액션이다. 

 

사방이 꽉 막힌 벽에 갇히면 다들 괴로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도인은 거기서 낙서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인간이다. 남전의 간덩이는 붓다 못해 딱딱하다. 그의 핀잔은 따로 벽을 찾아다닐 일이 아니라, 만물과 만인과 만사가 본래 벽임을 알아야 한다는 법문으로 들린다. 

 

횡단보도, 나무그늘, 곤욕, 성가신 사람……. 길에서는 문득문득 벽을 만난다. 돌아가거나 기다리거나 가끔 기대어 쉬면 그만이다. 벽이 고맙다 해서 짊어지고 다니거나, 실망한 마음에 애써 벽을 세울 필요는 없다. 무너뜨리려다 먼저 무너지기 십상이다. 다들 잊은 것 같은데, 마음은 원래 벽이었다.

 

제24칙

설봉이 뱀을 보다(雪峰看蛇, 설봉간사)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이 대중에게 설했다. “남산(南山)에 한 마리의 독사가 있으니 그대들은 부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를 들은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이 말했다. “오늘 승당 안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스님이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에게 이날의 광경을 전했다. 현사는 “모름지기 우리 사형(師兄)쯤이나 되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스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화상(和尙)께서는 어찌 하시렵니까?” 현사의 대답이다. “굳이 남산까지 들먹여서 무엇 하겠는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주장자를 설봉의 얼굴에 냅다 던지고는 두려워하는 시늉을 했다.

 

남산이란 설봉산이며 곧 설봉이 머무는 거처다. 스스로를 독사에 빗댄 설봉은 자신의 법력(法力)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 뻐기고 있다. 설봉보다 서른두 살 아래인 장경은 스승의 비위를 맞춰줬다. “목숨을 잃었다”는 건 감화됐다는 역설(逆說)이다. 왠지 진지하기보다는 능청스러운 어투로 들린다. 

 

“됐냐?!” 이런 식이다. 설봉의 후배인 현사도 한마디 거들었는데, 띄워주는 척하면서도 짐짓 먹이는 모양새다. 구태여 남산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는 ‘내가 갑(甲)’이라는 자긍심이 묻어난다. 그중에서도 ‘멘탈갑’은 운문이겠다. 가장 나이가 어린 하판이 방장(方丈)을 우롱한 꼴이다. 

 

일언이폐지하면 ‘본래부처’들이 한데 모여 제 잘난 멋을 자랑하는 장면으로 요약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위대하다’라는 논리 앞에선 직위도 무의미하고 법랍(法臘)도 거품이다. 깨닫는다는 건 ‘날것’으로 돌아가는 일이고 ‘날것’으로도 족한 삶일 것이다.

 

한편 뱀은 징그러운 짐승이지만 무위(無爲)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일견 영물(靈物)이다. 다리가 없어도 잘만 다닌다. 무엇보다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킨다. 모름지기 맛을 가리고 간을 보는 자들은 뱀을 배워야 한다는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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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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