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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포화(砲火) 속에서도 밭일을 할 수 있는 자의 마음은, 겨울이어도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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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5 년 5 월 [통권 제2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3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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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은 조사선(祖師禪)을 허투루 이해한 자들을 위한 처방이다. 화두를 삼키려 하지 않고 글재주에나 써먹으려 드는 문자선(文字禪), ‘본래부처’이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무사선(無事禪), 좌선한답시고 조용한 장소만 찾아다니는 묵조선(默照禪)이, 대혜(大慧) 선사는 못마땅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오직 화두에만 몰입함으로써, 번뇌를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고 보급했다.

 

사실 역대 조사(祖師)들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소음과 멸시에 분노하지 않았고 누가 때리면 더 맞아줬다. ‘자신이 부처’라는 확신으로 온몸을 꽉꽉 채웠던 덕분이다. 달마도의 서슬파란 침묵은, 어떠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벽창우의 내공을 보여준다.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 임한 자에게만 피어나는 강철 멘탈. 포화(砲火) 속에서도 밭일을 할 수 있는 자의 마음은, 겨울이어도 봄이다.

 

제12칙
지장이 밭에 씨앗을 심다(地藏種田, 지장종전)

 

지   장 : 어디서 왔는가?
수산주 : 남방(南方)에서 왔습니다.
지   장 : 요즘 남방의 불법이 어떠한가?
수산주 : 공부에 여념이 없습니다.
지   장 : 내가 여기에서 밭에 씨를 뿌려 주먹밥을 지어먹는 것만이야 할 수 있겠느냐?
수산주 : 삼계(三界)는 어찌하시렵니까?
지   장 : 그대는 무엇을 삼계라 하느냐?

지장계침(地藏桂琛)과 그의 제자였던 용제소수(龍濟紹修) 사이의 대화다. ‘수산주(修山主)’는 용제소수 선사의 별칭. 지장계침도 이름이 한번 바뀌는데, 장주(漳州) 나한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한(羅漢) 계침이 됐다. 이전의 거주지는 푸첸성[福健省] 석산(石山)에 위치한 지장원. 푸첸성은 타이완에 인접한 중국 남동부의 지방정부다. 곧 지장이 묻고 있는 ‘남방의 불법’이란, 과거 자신이 머물던 지장원의 면학 분위기를 알아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수산주는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동향을 전했다. 본문의 구절은 ‘商量活活(상량활활).’ 다만 ‘상량’은 공부이긴 한데, 글공부이고 문자에 의지하는 공부다. 교학불교가 치성한 듯 보이는데,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금기시하는 선사의 관점에선 마뜩찮은 풍토다. 이에 자신의 지극히 단순하고 정직한 일상에 빗대어 은근히 꾸짖는 모양새다. 쓸데없는 망상 피우지 말고 조그맣게 또한 말갛게 살라는 핀잔.

 

그러나 수산주는 이른바 ‘행동하는’ 수행자였던 것 같다. 삼계란 생명이 윤회하는 세계이고 결국 만인이 살고 있는 세상을 뜻한다. 어리석고 가엾은 중생을 구제하려면 이들을 보듬고 선도할 학식과 역량을 갖추는 게, 진정으로 스님이 할 일 아니냐는 반박이다. 그러나 지장은 삼계란 것도 생각이 빚어낸 허상일 따름이라며 요지부동이다. 서민들의 피해를 덜어주기 이전에, 청정하고 검소한 생활로 아예 피해를 주지 말라는 입장인 셈이다.

 

‘순수’와 ‘참여’ 간의 논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시빗거리다. 잘못 말했다간 따귀를 맞고 한쪽을 편들다간 친구를 잃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침묵을 자청하고 중립을 자처하는 일이 선(禪)적인 삶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거기서 초래되는 고독과 소외를 달게 받는 길이다.

 

말없는 산인(山人)들은 평화에 앞서 평심(平心)을 구한다. 더불어 진짜 평화는 ‘좋은 것을 더 갖는 것’이 아닌 ‘덜 가져도 좋은 것’에서 온다고 믿는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이도저도 아닌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를 위한 변명 : 무심(無心)은 무능하므로 무애(無碍)하다. 끝내 이용당하고 말 수완도, 제 꾀에 넘어가고 말 욕심도 없으므로.

 

제13칙
임제의 눈먼 나귀(臨濟瞎驢, 임제할려)

 

열반을 앞둔 임제(臨濟)가 원주(院主)였던 삼성(三聖)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라.” 이에 삼성은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라며 안심시켰다. 임제는 “혹여 어떤 이가 그대에게 정법안장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고 물었다. 삼성은 곧장 “할(喝)!”이라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임제는 “나의 정법안장이 이놈의 눈먼 나귀 따위에 의해 멸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며 탄식했다. 

 

 




원주(院主)는 세간의 총무와 비슷하다. 사찰의 살림 전반을 맡아보는 소임이다. 일은 많은데 빛은 안 나는 자리다. 주지를 보좌해 상하를 화목케 하고 동료들을 편안케 해야 한다. 주지 스님이 생색을 내고 싶을 때, 원주스님은 고생을 해야 할 팔자다. 더구나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 절에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품팔이를 해서라도 창고를 채워야 하는 게 원주의 몫이다. 결국 남들의 수행을 돕느라 자기 수행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선어록에 등장하는 원주 스님들은 대부분 어리석고 미련해 골림과 무안을 당한다.

 

 

임제의현 선사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주창하면서 선종사(禪宗史)에 크게 이름을 날렸다. 무위진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자리 없는 참사람’이란 뜻이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신분에 개의치 않고 처지에 굴하지 않는 사람’ 등으로 의역될 수 있다. 스스로 본래 부처임을 알고 언제나 평안하고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다면, 누구나 무위진인인 셈이다.

 

특히 걸핏하면 고함을 질렀는데, 이게 바로 할(喝)이다. 제자들의 생각을 일순 중지시켜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 이런저런 망념을 즉각 내려놓은 채, 있는 그대로 고귀한 자기 자신을 똑똑히 보라는 취지다. 삼성은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을 원주이니, 안목은 없어도 본 것은 많았을 것이다. 아울러 ‘할’을 자주 듣긴 했는데, 지독하게 바빠서 ‘할’의 의미에 대해 참구할 시간은 없었을 게 뻔하다. 끝내 다짜고짜 앵무새처럼 ‘할’을 따라하면서, 본인은 거하게 욕을 먹고 스승의 임종을 어지럽히고 말았다.

 

반면 정사(正史)에 나타나는 삼성은 뛰어난 선승이었다. 삼성혜연(三聖慧然). 임제의 법을 이은 것도, 임제의 행장과 법문을 모아 『임제록』을 편찬한 것도 그였다.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 선사는 “어려서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지략이 있었고, 지혜가 우뚝 솟아 사방에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격찬했다. 어쩌면 임제와 삼성의 대화는 농담과 반어법을 판돈으로 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기야 일체의 차별을 걷어내고 문득 대하면, 눈먼 나귀도 부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걸을 수는 있다. 심지어 숨 쉴 줄도 안다.

 

제14칙
곽시자가 찻잔을 건네주다(廓侍過茶, 곽시과다)

 

곽시자(廓侍者)가 덕산(德山)에게 물었다. “그 옛날의 성현들은 다들 어디로 가셨습니까?” 덕산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무엇? 무엇?”이라고 반문했다. 이에 곽시자는 “비룡마(飛龍馬)를 대령하라 했더니 절름발이 비루먹은 말을 끌고 온 격이로군요”라며 짐짓 조롱했다. 덕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날 욕실에서 나온 덕산에게 곽시자가 차를 달여 건네주었다. 그러자 덕산은 곽시자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곽시자가 이르되 “저 노인네가 이제야 비로소 말길을 알아듣는군!” 덕산은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 어두워져서 살만해진다. 젊어서는 거슬렸을 말도 거스르지 않고 흘러간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무덤덤하다. 말의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고, 말의 함정에 빠지려야 거기까지 갈 기력이 없다. 적(敵)을 찾지 못한 말들은 제풀에 고꾸라져 풀숲이 된다. 이런저런 꼬락서니가 한낱 바람소리로 서걱거릴 때, 나는 눈물겹도록 가볍다.

 

젊음은 빨리 걸어서 절름거린다. 빠릿빠릿한 감각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듯하지만, 그게 죄다 죽음을 부르는 활력이고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활력이다. 몸이 낡으면 마음도 고개를 숙인다. 퇴화는, 퇴화에 순응하는 퇴화는, 나를 놀리는 자를 도리어 응원할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킨다. 세월은, 진짜 명약이다.

 

모든 그럴싸한 것들과 결별한 지금은 ‘퇴옹(退翁)’이 되어 뉘엿뉘엿 무너지는 시간. 난청(難聽)이 외려 즐거운 자의 달팽이관엔 아마도 달팽이가 들어있을 것이다. 일어날 일이 없어서 넘어질 일도 없는 미물. 미물(微物)이어서 미물(美物). 그러니 어서 오라. 나이보다 빨리 오라. 내 인생의 이순(耳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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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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