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 개의 문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전체 기사

월간고경

[백일법문 해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 개의 문


페이지 정보

서재영  /  2017 년 9 월 [통권 제5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10회  /   댓글0건

본문

현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집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현관(玄關)이라고 한다. 어떤 집이든 현관을 통과해야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현관이라는 낱말이 불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래 현관은 방장(方丈)스님이나 고승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의미했다. 밖은 중생의 세계이자 무명(無明)의 세계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공간으로 들어가므로 현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경계는 도처에 있다. 한 나라를 방문하려면 국경을 통과해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대문을 통과해야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려면 방문을 지나야 한다. 어디에나 안과 밖은 존재하고, 경계가 있는 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물리적 공간에만 출입구가 있고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세계, 인식의 세계에도 출입구가 있고 경계가 있다. 물론 그 문은 사찰의 일주문이나 교회의 출입구 같이 물리적 형체를 가진 문은 아니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보이지 않는 문이고, 형체가 없는 문이기 때문에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했다. 무문선사는 도를 알고자 한다면 보이지 않는 그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방대한 화엄의 세계는 깊고 그윽한 바다로 비유된다. 그래서 화엄의 세계를 ‘현해(玄海)’라고 부른다. 물론 화엄의 바다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인식의 세계이며, 정신적 영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를 알고자 한다면 인식의 문이 열려야 하고, 도에 대한 안목이 열려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문(法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정신적 영토에 도달하기 때문에 불법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비유된다.

 

법계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집으로 들어갈 때 현관을 거쳐야 하듯 진리의 세계, 인식의 세계로 들어갈 때도 현관을 통과해야 한다. 화엄의 바다로 들어가는 문,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화엄학의 대가들은 십현문(十玄門)이라고 이름 붙였다. 화엄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열 가지 문이라는 뜻이다.

 

화엄의 세계는 존재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십현문은 존재의 관계성 즉 연기에 관한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십현문은 눈앞에 펼쳐진 무수한 사물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연결망을 통해 그들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결국 십현문은 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십현문을 달리 ‘십현연기(十玄緣起)’라고 부른다. 화엄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려면 연기의 실상을 깊이 깨달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십현연기는 화엄교학의 대표적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좀 더 확장하면 불법의 핵심도 연기사상이므로 십현연기를 아는 것은 곧 불법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을 통해 들어가는 영역이 현실의 삶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에 신비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화엄의 현문을 통해 들어가는 세계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존재들의 실상 그 자체다. 따라서 들어갔으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다. 그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오히려 현실세계로 되돌아 나오는 문이 십현문이다. 신비로운 세계, 진리의 세계는 중생의 세간 저 편, 피안(彼岸)의 언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차안(此岸)에 있기 때문이다.

 

십현문을 법계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니까 열 가지 문이 단계적으로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현문은 법계연기를 열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 것일 뿐 열 개의 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철 스님도 “십현문을 열어 놓았다고 해서 열 가지 문이 각각 있는 줄 알면 오해”라고 했다. 법계의 근본은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걸림 없는 자재함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에 십문(十門) 전체가 구비되어 있고, 십문 그대로가 또 하나의 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법계연기의 세계를 열 가지 키워드를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이 문과 저 문이 다르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 개의 문을 모두 통과해야 화엄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문이라도 통과하면 전체의 문을 통과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열 개의 문을 나열하고 있다고 해서 그 모든 문을 순서대로 통과하라는 것은 아니다. 원융무애한 법계연기의 심오한 세계는 중생의 차별변견의 눈, 미혹한 안목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열 가지 개념을 동원하여 가상의 문을 세워놓았을 뿐이다.

 

십현문, 화엄의 바다로 들어가는 문

 

법계연기의 세계를 십현문이라는 열 가지 키워드로 설명한 분은 화엄종의 2조 지엄(智儼)이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초조 두순(杜順)의 뜻을 계승하여 십현문의 체계를 세웠는데 이를 ‘고십현(古十玄)’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엄종의 3조 법장은 자신의 <화엄경> 주석서 『탐현기(探玄記)』에서 지엄의 고십현을 토대로 새롭게 십현문을 정리했다. 백일법문은 현수스님의 십현문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각 항목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이 문은 십현문의 총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화엄현해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하나의 문에 나머지 아홉 개의 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든 이치가 구족되어 있다. 첫 번째 문을 철저히 이해하면 화엄의 깊은 바다에 들어간 것이며, 그 문을 통해 다시 현실에 펼쳐진 실상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둘째는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이다. 첫 번째 문이 전체를 관통하는 총론이었다면 이 문부터는 각론에 대한 설명이다. 이 문은 ‘넓음[廣]’과 ‘좁음[狹]’이 걸림없이 상호소통하는 이치를 밝히고 있다. 모든 사물은 이(理)라는 보편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광’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물[事]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개별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협’이다.

 

셋째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이는 법계의 두두물물이 갖고 있는 작용[用]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의 개체와 전체가 서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전체는 전체대로, 개체는 또 개체대로 각각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둘이 서로 같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넷째는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는 체(體)의 측면에서 법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모든 존재가 서로를 자유롭게 용납하면 저것이 곧 이것이 되고, 이것이 곧 저것이 되어 불이(不二)의 관계가 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다섯째는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무수한 존재들의 현상에는 숨음과 드러남이 비밀스럽게 작용하고 있다. 꽃이 피면 무(無)가 숨고 유(有)가 드러난다. 반대로 꽃이 지면 무가 드러나고 유가 숨는 이치다.

 

여섯째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미세하게 서로를 수용하여 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이것이 저것을 받아들이고, 저것은 또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법계는 대립과 충돌을 넘어 조화와 안정을 유지한다.

 

일곱째 인다라망법계문(因陀羅網法界門)이다. 모든 존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법계의 관계성은 마치 거대한 그물망처럼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그와 같은 그물망에서 벗어나 있는 고립된 존재란 없음을 밝히고 있다.

 

여덟째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이다. 보편적 진리는 하나의 사물을 의탁하여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법계의 보편적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보편적 이법은 각각의 사물을 의탁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홉째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서로 떨어져 있고 개별적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은 한 생각 속으로 수렴되며, 한 생각은 다시 아득한 시간으로 확장된다.

 

열번째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이다. 주인도 주객의 덕성을 함께 갖추고 있고, 객도 주객의 덕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따라서 주인이 곧 객이고, 객이 곧 주인이 되어 주객불이, 자타불이의 이치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은 십현문의 핵심을 요약하면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모든 존재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통찰이다.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과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임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모든 존재들이 상호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작용과 그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셋째,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된 연기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므로 나와 너, 주와 객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불이(不二)임을 밝히고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서재영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