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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보시, 주기 어려움과 받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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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7 년 8 월 [통권 제5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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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다.
휴가비를 받을 일도 없고 피서를 떠날 일도 없는 잉여생활자에게 휴가철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찜통 속에서 안빈낙도하기 좋은 시절이다. 올해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직장 다니는 친구가 휴가비 탔다면서 봉투를 하나 건넸다.

 

두툼했다. ‘아이, 뭘 이런 걸…’ 하는 절차는 생략하고 “고마워” 하며 얼른 집어넣었다. 헤어진 뒤에 봉투를 열어보고 액수만큼 격하게 감동했다. 친구는 기쁘게 주었고 나는 고맙게 받았다. 받고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친구의 공덕이 큰 줄 알겠다. 나는 인격이 미숙한 탓에, 받고도 기분 나쁜 적이 있었고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 한 끼 얻어먹고 기분 잡쳤다

 

오래 전 일이다. 대출을 받아서 원금은 갚을 엄두도 못 내고 이자만 꼬박꼬박 바치느라 허리가 휘어지던 때였다. 오랜만에 내 소식을 다른 친구한테서 전해들은 선배가 밥 한번 먹자며 찾아왔다. 어머니 상태는 어떠냐, 너 힘들어서 어쩌냐 하는 안부를 마치고 뭘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무 생각 없었다. 선배는 일단 차에 타라며 나를 싣고 어디론가 달려서 근사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종업원이 놓고 간 메뉴. 그것을 펴는 순간 휘둥그레진 내 눈은 가격이 적힌 오른쪽만 위아래로 열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선배가 웃으면서, 메뉴 갖고 무얼 그렇게 깊이 연구하느냐, 대충 보고 맛있는 걸로 고르라 하였다. 나는 결정장애처럼 머뭇거렸고 결국 선배가 알아서 주문했다.

 

그날 어떻게 먹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카운터에서 이십삼만 얼마를 계산하는 선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래, 너 돈 많은 건 알겠는데, 재수 똥이다, 이 인간아! 동네에서 만 오천 원짜리 먹고 이십만 원 날 줄 것이지, 하나도 안 고맙다!’ 그때 심정이 이랬던 건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혼자 누워 있을 엄마가 걱정되어 빨리 집에 갈 생각뿐이었다. 밥 한 끼 먹자고 보낸 세 시간 반이 아까웠다. 알바로 생계를 삼는 사람에게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호의를 베푼 사람은 진심으로 내가 안타까워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겠지만, 비싼 밥을 사기 전에 내 상황과 심정을 살폈어야 했다. 받은 사람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걸리적거리는 걸 보면 선배가 내게 베푼 것을 깔끔한 보시라고 할 수는 없다. 나 또한 선배의 호의를 깨끗하게 받을 능력이 없었다. 밥 한끼가 뭐라고, 비싸든 싸든 맛있게 먹으면 될 것을, 그땐 어려운 처지에 몰리다 보니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주는 것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밥 한 끼 사주고 욕을 들었다

 

한참 지나 벌이가 쥐꼬리만큼 나아졌다. 게다가 조그만 경사가 있었으니, 대출 원금을 갚은 건 아니지만 싼 이자로 갈아탄 덕분에 약간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줄어든 이자만큼 매달 생활비가 늘어난 셈이라, 잠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쁨을 함께하고자, 내가 한 턱 낼게 하며, 친구 둘을 불러냈다. 그날은 평소 가던 데보다 조금 비싼 집으로 갔다. 셋이 먹고 삼만 얼마를 낸 것 같다. 기분 같아선 더 특별한 걸로 살 수도 있었는데 좀 섭섭했다.

 

그래서 며칠 뒤에 한 번 더 사겠다고, 언제 시간 나느냐고 물었다. 친구 하나가 짜증을 섞어서 소리를 질렀다. “아, 됐어! 밥에다 돈지랄하지 말고 그 돈 있으면 현금으로 나 줘!” 그러고는 먼저 휘적휘적 가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쟤 왜 저래?’ 하다가 불현듯 선배에게 밥 얻어먹은 일이 떠올랐다. 아, 쟤는 시간이 아깝겠구나, 삼만 원이 절실하겠구나. 그 친구는 시급 알바를 해서 학교 다니는 아이 둘을 건사하고 암에 걸린 부모를 돌보는 중이었다. 친구 덕분에, 나의 생각 없음을 돌아보고 ‘황새한테 밥 줄 때는 접시에다 주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겼다.

 

보시. 기쁘게 주고 고맙게 받기. 마음에 티끌을 남기지 않고 거기서 끝.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보시에는 상대가 있다. 잘 주는 사람이 있고 잘 받는 사람이 있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있고 둘 다 못하는 사람도 있다. 주기 좋아하는 사람도 상대방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 생각 없이 베푼다면 그 보시는 자기만족에 그치기 쉽다. 자기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보시가 아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는 지위 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싫어도 싫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받는 사람은 도움과 함께 상처도 받는다.

 

따라서 보시를 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성급히 무언가를 주기보다는 차라리 답답한 이의 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견디는 편이 낫다. 비 맞는 사람에게는 우산을 사주는 친구보다 함께 비를 맞는 친구가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보다 못해 무언가를 주려면, 『대보적경』 「가섭품」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
“중생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것을 베풀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하려면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구사론』 「분별업품」에서는 사람들이 행하는 보시를 여덟 종류로 나열하는데, 제대로 보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1.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만 하는 보시(隨至施).
2. 자기 물건이 불에 타거나 상해서 못쓰게 될까봐 차라리 남에게 주는 보시(怖畏施).
3. 보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준 사람에게 도로 주는 보시(報恩施).
4. 다음에 그 사람에게서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求報施).
5. 조상에게서 배운 대로 전통에 따라 하는 보시(習先施).
6. 하늘에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希天施).
7. 좋은 평판을 바라고 하는 보시(要名施).
8.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 간탐을 없애기 위해, 선정을 얻기 위해, 열반락을 얻기 위해 하는 보시(爲莊嚴心等施).

8번 하나 빼고 나면 시커먼 속이 다 보인다. 물건으로 사람을 붙잡아두려는 수작, 아끼다 똥 되기 직전의 물건으로 인심 쓰는 척하기, 하나 받았으면 기어코 하나 갚으려는 고집, 더 큰 이득을 위해 깔아놓는 밑밥, 생각 없이 관행에 따라 인사치레하기… 이 중에 나는 어떤 보시를 하는지, 거울삼아 비춰볼 만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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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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