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의 각별한 인연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사진 기사]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의 각별한 인연


페이지 정보

창주향산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3,992회  /   댓글0건

본문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이 두 분을 빼고 한국 현대 불교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분은 어떤 때에는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길을 가고, 또 어떤 때에는 현실을 보는 시각과 해결 방법이 달라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두 분이 각각 30세와 40세 무렵에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만공 스님을 모시고 참선 정진할 때 처음 만나서 도반이 된 뒤, 두 스님의 우정에 금이 간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세속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출가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이견異見과 이해 다툼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 원수처럼 변하는 일들이 많지만, ‘성철과 청담 - 청담과 성철 스님’은 이런 세상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던 위인偉人이었다.

 


 

 

이 사진은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1964년 서울 강북구 도선사에 ‘실달학원悉達學園’을 개설하고 그 현판을 단 뒤 두 분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한 것이다. ‘실달학원’은 본래 승려들에게 현대 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에서 승가대학 설립의 준비 단계로 추진했던 것이다. 각별한 도반인 두 분은 이때에 도선사에 함께 주석하며 한국불교 미래의 희망을 찾고 있는데, 함께 작성한 ‘서원문誓願文’에서 “불조의 대도大道를 중흥하고 말세정법末世正法을 부양扶養하고자 한다. … 항상 고불고조古佛古祖의 유법遺法과 청규淸規를 시범역행示範力行하겠다.”며 원을 세우고, 수행요강에서 “천상천하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이 성교聖敎를 수습역행修習力行하여 무상대법無上大法의 철두철미한 수호자 양성을 목표로 한다.”고 다짐하였다.

 

이 사진 말고도,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많이 남아있다. 두 분이, 어떤 때에는 향곡스님을 더하여 세 분이, 북한산을 등산하며 찍은 사진도 여러 장이고, 서울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함께 방생법회에서 활짝 웃는 장면도 있다. 1950년대 말에는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재가 수행자들과 함께 한 사진도 있으며, 조선 초 대찰이었다가 폐허가 된 양주 회암사를 함께 찾아 나옹과 무학 대사의 자취를 더듬으며 의견을 나누는 사진도 있고, 승가대학 설립에 적합한 부지를 찾으러 다녀오는 차 안에서 서로 장난을 하며 활짝 웃는 사진도 전해온다.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으며, 두 분이 상좌들(혜성과 천제)을 데리고 서울 중심부에 있는 종묘宗廟 나들이를 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흔적도 있다.

 

오늘날처럼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닌데, 두 분이 함께 한 사진이 이처럼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내 “우리는 평생 도반 아니오!”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가슴이 통하여 그냥 자연스럽게 ‘두 분이 함께 찍혔을’ 것이다.

 

두 분의 우정을 보여주는 일화 두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성철 스님은 손목시계 대신에 회중시계를 좋아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청담 스님이 입적한 뒤 어느 때인가부터 그 회중시계를 넣는 주머니가 닳고 닳아 잘 열리지 않게 되자, “청담 스님이 있었으면 벌써 새 시계 주머니를 갖다 주었을 터인데. … 청담 스님이 없으니 시계 주머니가 닳아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네. ….”라며 청담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에둘러 드러낸 적도 있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찾았을 때에는 두 분이 함께 찍힌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는데, 지팡이 하나를 어느 사진에서는 청담 스님이 또 다른 사진에서는 성철 스님이 번갈아가며 짚고 산을 올랐던 자취가 남아 있다. 

 

두 분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면 성철 스님에 비하여 청담 스님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많다. 아마도 성철 스님은 참선 수행자의 길만 가서 세속의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불교가 놓인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으로 여기며 사판事判의 길을 간 청담 스님에게는 재판문제 등 ‘세속적인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창주향산
창주향산
창주향산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