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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발우에 담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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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8 년 5 월 [통권 제6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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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문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고, 판다곰도 대나무 숲에서 종일 잎을 찾아다닌다. 먹어야 사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운명이다. 먹이를 찾아 거의 하루를 소비하는 동물에 비해, 사람은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먹는 시간을 하루 세 끼로 줄였다.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을 유희와 연구개발에 써서 오늘의 문명을 누리게 되었다. 문명 중에 문명이신 부처님은 먹는 일을 대폭 줄이셨다. 하루 한 끼, 그것도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빌어서 먹으라 하고 나머지 시간을 온전히 도에 매진하도록 승가의 제도를 만드셨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을 것이다.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걸어가는 동안 배고픈 몸을 관찰했을 것이다. 부잣집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고 순서대로 걸식하는 동안 평등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남의 집 문 앞에서 밥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목숨이 남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인연법을 매일같이 새겼을 것이다. 더러는 밥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 한 끼 허락된 밥인데 얻지 못하면 난감한 일이다. 밥을 주지 않는 집에 대고 욕을 하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말라고 경계하신 게송이 『장아함경』에 전한다.

 

의식주 중에 가장 급한 것이 밥이다. 그 다음이 옷이고, 그 다음이 집이다. 잠은 한 데서 잘 수도 있고, 옷은 대체물을 찾아서 급한 대로 몸을 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먹지 못하면 몸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 한 끼 걸식은 실제로 생사문제였다. 따라서 밥을 담는 그릇은 생명의 도구인 셈이다. 다 버리고 출가했어도 생존을 위해 최소한 필요한 개인물품이 바로 밥그릇, 발우인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만큼 부처님이 계율을 정할 당시에 발우를 두고 벌어진 일들이 많다. 발우에 대한 규정을 정하신 과정은 『오분률』에 자세히 전한다.

 

발우에는 쇠로 만든 것, 소마국에서 나는 것, 흙으로 구워만든 것이 있고, 각각에 상중하품이 있었다. 상인들이 파는 것을 신도들이 사서 승가에 보시하는데 다들 상품을 원했다.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것, 모양이 비뚤어지지 않은 것, 깨지지 않을 단단한 것, 손에 잡기에 편한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재료와 모양이 다양하다 보니 취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직 쓸 만한데도 좋은 것으로 바꾸려는 스님들도 있었고, 때 아닌 때 신도에게 사적으로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자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석가의 제자들은 입으로는 소욕지족을 말하면서 욕심을 부린다. 아무 때나 억지로 달라고 하니 사문의 행실도 없고 사문의 법을 깨뜨리고 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모았다. 동네 평판이 나빠지면 사람들이 문을 닫고 밥을 주지 않으므로 승가 전체가 위험에 처한다. 비상시국이다. 부처님은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비구들을 꾸짖은 뒤에, 지금 가지고 있는 발우를 네 번까지 기워 쓰라고 정해주셨다. 옷만 누더기가 아니다. “다섯 군데 깁기 전에 더 좋은 것을 갖기 위해 새 발우를 구하면 바일제에 떨어진다.” 바일제란 옷이나 발우 등을 법에 맞지 않게 취득하거나 소유할 경우, 그 물건을 승가의 공용물로 내놓고 네 명 이상이 보는 앞에서 참회해야 하는 죄이다. 몰수와 함께 적절한 부가조치가 내려졌다. “승가에서 제일 나쁜 발우를 가져다 그에게 주면서 ‘깨질 때까지 쓰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는 담당자를 정해서 발우를 나눠주고 바꿔주는 일을 맡겼다. 새 발우가 들어오면 대중이 보는 앞에서 일을 처리한다. 임자를 정해 발우를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너의 발우이니 잘 아껴 써라. 땅에 놓지 말고 씻는 데 쓰지 말아야 한다. 묵은 음식을 담지 말고 물을 데우지 말고 향이나 약을 담지 말라. 깨지면 다시 구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뒤에도 사건들이 이어졌다. 혼자서 여러 개의 발우를 보시 받은 경우도 있고, 두 개 갖고 있다가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는데 열흘 뒤에 자기 것이 깨진 경우도 있다. 한 사람이 두 개를 동시에 받은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화상과 아사리에게 둘 중에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물어서 결정한다. 그들이 결정해주지 못하면 직접 닷새씩 써보고, 좋은 것을 자기가 갖고 못한 것을 남에게 준다. 이런 식으로 일이 생길 때마다 세부사항을 하나씩 추가했다. 그러나 발우에 관한 규정은 옷이나 주거에 비해 그리 복잡하지 않다. 분배는 공평하게, 위생은 철저하게. 이것이 발우에 대한 기본 규정이다.

 

발우는 남에게 맡길 수 없고, 죽을 때까지 지닐 수밖에 없다.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법의 수명을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물건이다. 빈 몸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 허기를 다스리며 죽을 때까지 밥그릇을 놓지 않았기에 법이 전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밥을 담는 그릇이었던 것이 법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선가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할 때 “옷과 발우를 전한다”는 표현을 쓴다. 혜능선사의 발우가 바위에 놓인 채 꿈쩍 안 했던 것도 그의 법력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 사람의 법력도 법력이지만, 발우에는 계율을 정하신 부처님의 노고와 승가 전체의 정신이 담겨 있다. 부처님이 정해주신 제도 덕분에 승가는 하루 한 끼 먹고 발우 하나를 지니는 간편한 식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출가했다고 해서 먹고사는 문제가 결코 쉽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편, 재가의 밥그릇은 복잡하고 치열하다. 밥그릇을 가지고 갑질하는 사람도, 그 갑질을 당하는 사람도, 똑같이 밥그릇을 꼭 잡는다. 재가의 먹고사니즘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는 『오분률』에 전하는 아나율 형제의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오자 석가족의 아들 중에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한 이들이 많았다. 집집마다 출가하는 것을 본 부처님의 사촌동생 석마남은 고민에 빠진다. 너무 부잣집 아들이라 큰살림을 놓고 출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생 아나율을 불러 의논한다. “다른 집들은 다 출가하는데 우리 형제만 빠질 수 있느냐, 너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살림을 맡고 하나는 출가하도록 하자.” 아나율은 선뜻 대답한다. 자기가 집안일을 맡을 테니 형님이 출가하라고. 형은 “너는 지금까지 내 덕에 집에서 편히 살며 어려움을 몰랐는데, 출가하여 도를 닦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네가 집을 맡아라. 내가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제껏 맡아왔던 집안일을 동생에게 넘기면서 살림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농사짓는 일, 장사하는 일, 재산 관리하는 법, 사람 부리는 법… 아침부터 밤까지 해야 할 일들을 다 말해주었다. 듣고 있던 아나율은 그 자리에서 경영권승계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집안 살림이 이런 거라면 저는 하루도 해낼 수 없습니다. 형님이 집에 계십시오. 제가 출가하겠습니다.” 금수저도 포기할 만큼, 재가의 먹고살기는 힘든 일이다.

재가든 출가든 짐승이든, 몸이 있는 한 먹이고 길러야 산다. 몸은, 스님들에게 주어진 발우처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몫이다. 이 그릇에 어떤 밥을 담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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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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