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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거사선]
‘무정설법’에 깨달은 동파 거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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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4 년 9 월 [통권 제1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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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년~1101년)는 시와 서화(書畵)에 모두 뛰어난 천재였다. 북송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아우 소철(蘇轍) 역시 당송팔대가로 손꼽힐 정도로 명문가의 재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 그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자기보다 정신적으로 더 뛰어난 지성인은 없을 것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유교와 도교를 깊이 공부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소동파가 처음에는 불교를 우습게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소동파가 형주(荊州) 고을에 머물 때의 일이다.

 


 

 

소동파가 하루는 옥천사(玉泉寺)로 승호 선사(承皓 禪師)를 찾아가 뵈었다.

선사가 “대관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소동파는 “나는 칭(秤: 저울)가요” 하고 대답했다. 

“칭가라니요?” 승호 선사가 반문했다.

그러자 소동파는 거만하게 대답을 했다.

“천하 선지식을 저울질하는 칭가란 말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 선사는 “악~!” 하고 벽력같은 소리(喝)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지요?” 하고 되물었다.

 

여기서 소동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소리가 몇 근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자신만만하던 콧대가 여지없이 꺾이고 만 것이다. 그가 만약, 진실한 구도자였다면 겸손하게 이렇게 가르침을 청했을 것이다.

“선사님, 저는 그 답을 모릅니다. 그 할(喝)의 무게를 일러주십시오.”

이렇게 진솔하게 되물었다면 선사는 오늘날의 후학들도 궁금해 하는 ‘깨침의 한 마디’(一句)를 내렸을 것이다. 

 

이렇듯, 선문답을 비롯한 마음공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곧은 마음 즉, 직심(直心)이다. 이런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인 불심(佛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공부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다행히도 소동파는 승호 선사의 할에 벙어리가 된 부끄러움을 계기고 더욱 분발하여 송대의 대표적인 거사 선지식이 되었으니,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동파는 불교에 인물들이 많고, 그 진리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높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몰래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하고 관직 활동의 여가 때마다 고승들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아 날로 선(禪)에 대한 안목이 깊어져 갔다. 그러나 ‘기한(飢寒: 배고픔과 추위)에 발도심(發道心)이라’고, 그의 불교공부는 정치적으로 고난의 시기를 겪었기에 더욱 깊어진 것이 분명하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듯이, 소동파의 재주는 뛰어났지만 벼슬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기에, 그의 그릇을 알아본 선사들은 한결 같이 관직에서 물러나 수도(修道)에 전념할 것을 권했던 모양이다.

 

선지식 저울질 하다 승호 선사 ‘할’에 발심

 

1036년 12월 19일, 현 쓰촨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난 소식(蘇軾)의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 거사(東坡居士)였다.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구양수 문하에서 공부한 그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호북성 황주(黃州)로 유배를 갔지만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어서인지 6년간의 유배생활을 잘 마쳤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으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광동성 혜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에는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海南島)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黎族)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는 주민들의 인망을 얻어 오두막을 짓고 살 수 있었다.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지만,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1101년 7월 28일,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동파 거사는 1090년 항주(杭州) 태수를 역임할 당시, 무려 19명의 고승들과 수시로 교류했다고 기록(東坡志林)했을 정도로 불교공부에 매진하였다. 이곳에서 고승들의 가르침 아래 선정을 베풀어 서민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전통요리가 탄생된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후 황주(黃州)의 단련부사로 좌천되어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할 때는 부인은 양잠을 하고 자신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스스로 ‘동파(東坡: 동쪽 언덕)’라는 거사 호를 지어 부르며 마음농사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부가 무르익은 증거라 볼 수 있다.

 

동파 거사의 ‘소똥’과 불인선사의 ‘방귀’ 법문

 

동파 거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문장가의 한 사람이기에 그와 얽힌 선화(禪話) 역시 적지 않다. 그는 일생 동안 선사들과 빈번히 교류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통했던 고승이 불인 선사(佛印 禪師)였다. 소동파의 스승인 동시에 벗이기도 했던 불인 선사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선사로서 법명이 요원(了元)이고 자는 각로(覺老)였다. 동파 거사는 호주(湖州)에 있을 때 처음 불인 선사를 뵙게 되었는데, 훗날 황주로 좌천된 뒤 많은 경전과 어록을 열람하기 시작하면서 대사와 더욱 친밀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두 선지식은 자주 왕래하며 차를 즐기고 도담(道談)을 나누었기에, 선림에 적지 않은 공안을 남기기도 했다.

 


소동파와 불인선사 

 

동파 거사는 어느 날, 금산사에서 같이 좌선을 하던 불인 선사에게 갑자기 물었다.

“내가 앉은 자세가 어떻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 위엄이 부처님 같습니다.” 

거사가 매우 기뻐하자, 선사가 되물었다.

“거사님, 내가 앉은 자세는 어떻습니까?”

거사가 대답했다. “한 무더기 소똥 같은데요(像牛糞).”

 

동파 거사는 오늘은 불인 선사에게 ‘한 방 먹였다’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그 유명한 스님을 이겼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자 불심이 깊고 안목이 높은 여동생 소소매(蘇小妹)가 물었다. “오라버니, 어떻게 그 선사님을 이겼습니까?” 소동파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여동생은 크게 나무랬다. “오라버니가 졌습니다. 그 선사님은 부처님과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부처님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라버니 마음은 소똥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선사님이 소똥으로 보인 것이지요.”

서로를 부처와 돼지로 본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문답처럼, 동파 거사는 아직 ‘오직 마음 뿐’인 유심(唯心)의 도리를 철견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여동생에게 한 방망이를 맞은 동파 거사는 분한 마음에 더욱 발심해서 공부를 했음에 분명하다.

 

진정 팔풍에 휘둘리지 않는 경지에 들었는가

 

동파 거사는 어느 날 참선을 하다가 도(道)가 날로 통하는 듯한 환희심이 나서, 불인 선사에게 깨침의 경계를 담은 시를 써 보냈다.

 

稽首天中天 毫光照大千(계수천중천 호광조대천)

八風吹不動 端坐紫金蓮(팔풍취부동 단좌자금련)

 

하늘 중 하늘에게 머리 숙여 절하오니

한줄기 빛으로 천하를 비추는 이

팔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금색 연꽃 위에 단좌하고 있네.

 

여기서 팔풍이란 ‘칭찬과 나무람’(稱譏), ‘영예와 훼손’(榮毁), ‘얻고 잃음’(得失), ‘고난과 즐거움’(苦樂) 등 여덟 가지 경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이제는 천하를 비출 만큼 마음의 광명이 밝아져 갖가지 삶속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장애와 고통, 칭찬과 비방에도 흔들림 없는 부동(不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화자찬을 담은 시이다. 

 

하인으로부터 이 시를 받아 본 불인 선사는 ‘방비(放屁: 방귀 뀌었군, 헛소리)’라는 두 글자를 적어서 보냈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소동파는 이 글자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고 너무 화가 치밀어 당장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불인 선사를 만나 따졌다.

“선사님! 내 공부의 결과를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고 무시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불인 선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八風吹不動 一屁彈過江(팔풍취부동 일비탄과강)

팔풍이 불어도 꼼짝 않는다더니,

방귀 하나에 불려 강을 건너왔구려.

 

불인 선사의 ‘방비(放屁)’는 동파 거사의 ‘우분(牛糞)’에 대한 시원한 ‘카운터 펀치’라 할 수 있다. 평소 의기양양해서 겸손함이 부족했던 동파 거사의 경지를 잘 알고 있던 불인 선사는 이렇게 멋지게 제자를 단련시킨 것이다. 동파 거사는 자신의 공부가 선사에게 크게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워했으며, 훗날 그 유명한 ‘무정설법(無情說法: 무생물의 설법)’이란 깨침의 일성을 낳는 큰 계기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과 인격을 갖춰 대자대비행을 갖추는 증오(證悟)에 이를 때까지, 끝없이 초월하며 묵묵히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걷는 수행자들은 동파 거사의 구도행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무정설법’을 중심으로 그의 살림살이를 공부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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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金聖祐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경북 안동 생(生).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취재부 기자 및 차장, 취재부장을 역임. 현재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와 넷선방 구도역정(http://cafe.daum.net/ kudoyukjung) 운영자로 활동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법음을 전하고 있다. 저서에『문없는 문, 빗장을 열다』,『선(禪)』,『선답(禪答)』등이 있다. 아호는 창해(蒼海ㆍ푸른바다), 본명은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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