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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거사선]
선교(禪敎)에 통달한 황벽 선사의 아난, 배휴 거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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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4 년 5 월 [통권 제1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3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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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배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 올리자, 대사께서 받으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황벽선사어록』에 보이는 황벽 선사와 배휴(裵休, 797~870) 거사의 선문답이다. 선(禪)은 종이와 먹으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도 드러낼 수 없으며, 나아가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다. 황벽 선사가 『전심법요』에서 “모든 사유와 이론이 끊어진 자리이기에,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졌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한 바로 그 자리다. 배휴 거사는 스승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조사선의 대의(大義)인 일심(一心)과 무심(無心)을 깊이 체득하여, 이러한 종지를 근거로 황벽 선사의 어록인 『전심법요』를 기록하였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이 오직 일심일 뿐 더 이상 다른 법이 없다. 마음은 무시이래로 생겨나지도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형체와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는 유무(有無)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전심법요』의 서두에서 황벽 선사가 배휴에게 설한 ‘일심’ 법문이다. 이러한 일심은 무심을 통해 증득되기에 ‘무심’이 강조되는 것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이라야 여여한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무심할 때 부처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배휴 거사는 『전심법요』 서문에서 스승의 가풍(家風)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선사는 문자의 설법을 떠나 오직 심지법문(心地法門)만을 설하시고 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다. 마음자리의 텅 빈 공성(空性), 만상이 모두 적멸하다는 것이 선사의 가르침 전부였다.”

 

여기서 밝힌 그대로 ‘텅 빈 공성(空性), 만상이 모두 적멸’함을 체득한 무심도인의 경지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진여(眞如) 그대로인 몸이 안으로는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게 무심(無心)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일체처 일처시에 무심할 수만 있다면 깨달음과 해탈이 보장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러나 수행자가 무심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최상승의 근기는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이 되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은 10신(十信)ㆍ10주(十住)ㆍ10행(十行)ㆍ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장 돈오한 것과 보살 10지를 거쳐 깨달은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황벽 선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종은 돈오(頓悟)를 표방하기에,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을 주창한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無心)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되기에,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만법을 통합하여 일심을 밝히다 

 

마조 - 백장 선사의 ‘일심’ 법문을 계승한 황벽 선사의 법을, 제자인 배휴 거사는 어떻게 체득하여 독자적인 살림살이를 펼쳤을까. 배휴 거사는 교가(敎家)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원각경 서문[血氣序]』에서 ‘일심’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가죽 밑에 피와 기(氣)가 있는 무리들은 반드시 앎(知)이 있다. 무릇 앎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체성(體性)이 똑같으니, 그 자리는 이른바 참되고 맑고 밝고 묘하고 텅 비고 사무치고 신령스럽고 통하여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본원이기 때문에 심지(心地)라 하고,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보리라 하고, 서로 사무치고 원융하게 포섭하기 때문에 법계라 하고, 고요하고 영원하고 즐겁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고, 혼탁하지 않고 흘러내리지도 않기 때문에 청정이라 한다.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 하고, 허물을 여의고 그릇됨이 끊어졌기 때문에 불성이라 하고, 선을 보호하고 악을 막기 때문에 총지(摠持)라고 하고, 숨기고 덮고 함용하고 포섭하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한다. 또 온갖 덕을 통합하여 크게 갖추었으며, 온갖 어둠을 사루어 없애고 홀로 비추기 때문에 원각이라고 한다. 그 실제는 모두 일심인 것이다.”

 

일심을 여러 경전이나 선어록에서 심지, 보리, 법계, 열반, 청정, 진여, 불성, 여래장, 원각으로 다양하게 설명하지만 이름은 다르나 모두 같다는 말이다. 교가에서 가장 높은 법문으로 치는 『화엄경』의 대의 역시, ‘만법을 통합하여 일심을 밝힌다[統萬法 明一心]’는 것임을 보면 교(敎)와 선(禪)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규종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로부터 화엄(華嚴)을 배운 배휴 거사가 이러한 일심의 도리를, 황벽 선사를 만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깨치고 여러 대승경전과 어록에 서문을 쓸 정도로 탁월한 안목을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심을 등지면 범부가 되고, 수순하면 성인이 되고, 일심을 미혹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치면 윤회를 종식하게 된다. 결국 부처님의 보리와 중생의 번뇌가 일심을 근원으로 하기에,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정각을 이룰 수 있다. 깨치고 보면 중생이 본래 성불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는 법문도 여기서 나왔다.

 

그렇다면 ‘누구나 본래 부처이고 일심이 청정한데, 왜 그런 자리에서 현실 속의 무명(無明)이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즉, 원각(圓覺)은 본래 청정한데 어떻게 무명이 생겼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이다. 쉽게 해결 되지 않는 이 의문은 마침내 화두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대한 해답은 해인사 장경각 주련에 새겨진 다음 법문에 힌트가 있다.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오.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라.’
깨달음의 도량이 어느 곳이냐? 지금 여기의 나고 죽음, 우리의 일상생활 이 자체가 바로 원각이라는 유명한 법문이다.

 

『선문염송』등에 나오는 선문답을 인용하자면, 장수자선 스님이 낭야혜각 선사에게 “청정본연한데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벌어졌습니까[淸淨本然 云何忽生 山河大地]?”라고 물으니, 이에 낭야혜각 선사는 “청정본연한데 어찌 홀연히 산하대지가 벌어졌겠느냐?”라고 답했다. 이것은 ‘산하대지가 생긴 것이 없고 청정본연 그대로다’라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해인사 장경각 주련

 

이 선문답을 풀어서 다시 요즘 대화체로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문] “만일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다시 일체의 무명이 있으며, 만일 무명이 중생에게 본래 있었다면 무슨 인연으로 여래께서 다시 ‘본래 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 “중생의 망견(妄見)으로 그렇게 보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갈 때 배가 빨리 달리면 옆의 언덕이 달려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치 눈병이 났을 때 허공에 꽃이 보이고 달을 볼 때 달이 둘로 보이는 것과 같이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 여기고 육진(六塵)을 반연하는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 몸과 의식을 본래의 자기로 여기는 오래된 착각을 깨닫고 무아(無我)ㆍ무심(無心)의 삶을 살며 무주상(無住相)의 법보시(法布施)를 행한 이가 바로 배휴 거사이다. 그는 규봉종밀 선사와 황벽선사를 통해 선교(禪敎)를 함께 닦아, 진리를 깨닫고(宗通)과 변재를 갖춰(說通) 훗날 수행자들에게 큰 법공양(法供養)을 한 셈이다.
우리도 배휴 거사처럼 세속에 살면서도, 일심(원각)은 본래 청정하고 무명은 본래 공함을 깨달아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고 부처의 행을 닦는다면, 그보다 더 큰 법공양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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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金聖祐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경북 안동 생(生).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취재부 기자 및 차장, 취재부장을 역임. 현재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와 넷선방 구도역정(http://cafe.daum.net/ kudoyukjung) 운영자로 활동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법음을 전하고 있다. 저서에『문없는 문, 빗장을 열다』,『선(禪)』,『선답(禪答)』등이 있다. 아호는 창해(蒼海ㆍ푸른바다), 본명은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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