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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는 불상의 미학]
미륵도상 오존불과 연기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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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5:15  /   조회1,31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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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제126호에서 윈강 7굴 북벽 불감과 윈강 19a굴 입구 미륵불감의 오존불과 미륵신앙의 반신공양상 뇌도발제 대신을 살펴보았다. 미륵도상 오존불과 뇌도발제는 불교사상의 연기설에 근거하여 해석할 수 있다. 불교의 연기緣起는 시간과 공간에 걸친 일체의 관계이며, 이론적 논리관계도 해결한다. 즉 미륵상생보살과 미륵하생불의 시간성時間性과 도솔천과 예토염부제의 장소성場所性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도솔천이라는 미륵신앙의 장소성은 천신의 공덕으로 지은 미륵보궁과 대신 뇌도발제 공덕으로 지은 선법당이라는 공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진 1. 윈강 8굴 주실 북벽 미륵불감 오존불.

 

예를 들어보자. 지난 호에서 언급한 비석상 황흥 5년(471)명 교각불상(『고경』 제126호 사진 6 참조)은 미륵하생불도상이며, 그의 양발을 떠받치고 있는 반신공양상은 뇌도발제 대신이다.

이와 같이 미륵하생불과 뇌도발제라는 도상 의미가 하나의 비석상에 표현되는 것은, 도솔천과 예토염부제의 공간성과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이 하나의 오브제(objet) 안에 압축적으로 표현된 것을 의미한다.

 

미륵도상 오존불은, 윈강 8굴 주실 북벽 미륵불감에서 또 다른 배열구조를 볼 수 있다(사진 1). 윈강 8굴 본존불은 미륵하생불 의좌상이고, 그 좌우로 교각보살상이 자리하고 좌우 맨 끝에 반가상이 앉아 있다. 특히 본존불 왼편 교각상은 양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고 양손바닥은 전면을 향하고 있다. 왼손은 집게손가락을 위로 하고 나머지 손가락은 오므리고 있는 수인이다. 이와 같은 미륵도상 오존불은 윈강 19a굴 입구 맞은편, 18굴 동벽 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윈강 7굴과 8굴은 쌍굴 형식이다(사진 2). 각 굴의 미륵불감은 주실 북벽에 자리한다. 북벽은 천태종의 지희智晞(556〜627)가 입적을 준비하며 언급한 북서쪽 하늘 모퉁이에 있는 도솔천의 방위와 일치한다(『고경』 제122호 참조). 

 

사진 2. 윈강석굴 건축 2기 쌍굴 형식 전개도.

 

윈강석굴의 쌍굴 형식은 1굴과 2굴, 5굴과 6굴, 7굴과 8굴, 9굴과 10굴이며, 두 동의 석굴이 나란히 놓여 있으며, 대부분 전실과 주실(후실)로 구성되었다. 북위시기 쌍굴 형식은 역사적으로 효문제(재위 471-499)와 풍태후(문명태후)의 관계를 상징한다. 이는 이불병좌사상의 공간성을 표현한 것이다. [북위 석굴사원에서 수없이 많이 조성된 이불병좌불감은 『법화경』 견보탐품의 석가여래상주설법상과 다보여래상주증명상이며 간단하게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의 이불병좌라고 부른다.] 북위 효문제의 조모 풍태후는 죽기 직전(490)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녀는 불교사원 건축을 후원하였으며, 그녀의 정치적 권력은 당시 문헌에서 이성二聖, 이황二皇이라는 표현이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 3. 윈강 19굴 바깥쪽 서벽 미륵하생불 의좌상.

 

윈강석굴 미륵하생불 의좌상은 오존불뿐만 아니라, 단독상으로 조상되었다. 5세기 중엽 조상된 윈강 19굴 바깥쪽 서벽(사진 3)의 미륵하생불 의좌상은 약 520cm 크기이다. 불상의 상호는 윈강석굴 초기에 조성된 담요오굴 중 20굴 본존불과 같은 양식이다. 상호는 타원형이며 윗입술이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 미소를 띠고 있다.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이다. 의좌상의 상반신이 하반신보다 크다. 복식은 통견이며, 윈강 16굴 본존불과 같은 북위양식을 착용하였다. U자형 앞트임 통견대의(승가리)는 가슴 부분에서 내의가 보이고 통견대의 끝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고 내려와 왼쪽 무릎 위의 왼손에 놓인다. 전형적인 계단식 옷주름이 부피감 있게 몸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대의가 두꺼워 몸이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미륵하생불도상 의좌상은 윈강 6굴 후실 중심탑의 서면과 9굴 전실 북벽 2구, 10굴 전실 북벽, 11굴 서벽 소불감, 12굴 전실 북벽 2구와 서벽 1구, 19굴 바깥쪽 동·서벽 각 1구, 29굴 북벽 2구, 38굴 서벽 소불감 등에서 볼 수 있다.

 

사진 4. 경주 남산 삼화령 본존불.

 

경주 남산 삼화령 삼존불(사진 4)의 본존불은 미륵하생불도상이다. 본존불은 162cm 이며 조성년대는 7세기 중엽으로 추정한다. 상반신 비율이 하반신보다 크다. 눈두덩이가 두툼한 눈은 반개하였고 코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다.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곡 발견 당시 코 부분은 온전한 상태였다.] 통견대의는 U자형 열린 가슴부분에서 내의(승기지, 안타회)와 하의(긴치마 형태의 군의, 울타라승)를 고정시킨 허리띠 매듭이 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덮고 내려온 통견 끝자락은 본존불의 오므린 왼손가락으로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복식은 북위 양식의 특징이며 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존불 복식에서도 보인다. 특히 삼화령 미륵하생불 통견주름은 양쪽 무릎 위의 와문형(소용돌이) 주름이고, 하반신까지 덮은 통견의 U자 주름과 합류한다. 5세기 북위양식이 7세기 신라불상의 복식에서 보이는 상위문화 전이轉移의 대표적인 예이다.

 

본존불의 수인 중 오른손은 네 손가락을 오므리고 오른 엄지가 검지의 끝부분과 맞닿아 있다. 손바닥은 전면을 향하고 있다. 불교미술에서 엄지와 네 손가락을 오므린 수인은 금강역사의 수인에서 볼 수 있지만, 역사상力士像은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쥔 수인이고, 삼화령 미륵하생불의 수인과는 차이가 있다.

 

사진 5. 윈강 3굴 북벽 본존불.

 

윈강 3굴 북벽 본존불(사진 5)을 보자. 미륵하생불도상의 특징인 의좌상이며 약 10m 크기이다. 윈강 3굴 본존불은 불신의 윤곽이 드러나는 통견복식이다. 풍화작용으로 불상 표면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상반신과 무릎 위의 U자형 주름이 확인된다.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의 통인이다. 윈강 3굴은 북위 때 착공했지만 미륵하생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당나라 초기 옹용대도雍容大度가 특징이다. 수·당시기 불상에서 보이는 풍만하고 늠름한 풍채를 말한다. 본존불의 둥근 상호는 인자하며 여유롭다. 옹용대도는 사마천의 『사기』 고조본기에서 언급된다. 윈강 3굴 미륵하생불도상은 당나라 통일왕조의 풍격이 보인다.

 

이러한 풍격은 그동안 살펴 본 북위시기 미륵상생보살 교각상의 특징인 수골청상秀骨淸像과 대조적이다. 길고 갸름한 얼굴과 좁은 어깨의 야윈 모습을 말한다. 불교미술에서 불상의 용모가 시대상을 표출하는 한 예이다. 

 

미륵하생불도상과 불기佛器

 

『고경』 제121호에서 태안 동문리 마애불(『고경』 제121호 사진6 참조)을 언급하며 그 도상의미를 『법화경』 이불입상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다보불의 왼손 손바닥 위에 놓인 불기를 사천성 중경 대족북산(『고경』 제121호 사진 7 참조) 이불도상의 불기와 비교하였다. 대족북산 이불도상은 의좌상이며 송(960〜1279) 때 조상되었다. 다보불 왼손 위에 발우가 놓여 있다. 

 

사진 6. 빙링쓰 171굴 미륵하생불 의좌상과 상부 169굴.

 

빙링쓰炳靈寺 171굴 미륵하생불 의좌상(사진 6)은 27m 크기이며 8세기 초 당나라 때 조성된 대불이다. 빙링쓰 석굴은 란저우蘭州 용징현永靖縣에 위치한다. 빙링쓰는 서역문물이 유입되는 중원 서쪽 끝에 위치한다. 용징현 서쪽은 실크로드 하서회랑의 시작이다. 빙링쓰 169굴 6호감 좌측에 있는 서진西秦(385〜400, 409〜431) 걸복치반(재위 412〜428)의 연호 건홍建弘(420〜428) 원년 묵서제기는 420년경 빙링쓰가 이미 현존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석굴이 분포된 곳은 모두 세 구역이고 상사上寺, 중사中寺, 하사下寺로 분류된다. 총 196개의 불감 중 184개의 크고 작은 불감이 하사에 위치한다. 특히 당시기 조성된 굴감이 130여 개에 이르고, 그 중 2/3가 하사에 현존한다.

 

빙링쓰 소불감의 미륵하생불 의좌상을 살펴보자. 불감 30호(사진 7)의 본존불은 U자형 앞트임 통견대의를 걸치고 왼손 위에 발우가 놓여 있다. 또 다른 불감 86호(사진 8)의 본존불도 앞트임 통견대의를 걸치고 왼손 위에 발우가 놓여 있다. 현존하는 하사의 소불감에서 미륵하생불 의좌상 불감이 적지 않게 눈에 띠고 또한 이들 의좌상은 거의 발우를 들고 있다.

 

사진 7. 빙링쓰 소불감 30호. 

 

그렇다면 대족북산 이불의좌상 중 한 분이 들고 있는 발우와 빙링쓰 소불감의 의좌상이 들고 있는 발우는 무슨 의미인가? 이는 또한 고려불화에서 살펴본 대가섭존자(『고경』 제123호 사진 5, 6 참조)가 미륵하생불에게 전달하는 승가리와 발우와 연관성이 있는가?

 

발우는 비구육물[여섯 가지 필수품: 승가리(대의, 가사), 울다라승(긴치마 하의), 안타회(내의), 니사단(깔개), 녹수낭(거름망), 발우]의 하나이다. 『불본행집경』 40권의 제석천은 석가모니의 삼의三衣와 발우를 대신 들고 가며 그의 제자라고 말하였다. 

 

『고승법현전』 1권에서 법현은 인도여행 중 도인을 만나 석가모니 발우의 이동 경로를 들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성도 이후 사천왕으로부터 석발우 4개를 받은 것처럼 미륵 또한 성도 후 사천왕으로부터 네 개의 발우를 받게 될 것이라 하였다.

 

사진 8. 빙링쓰 소불감 86호.

 

석가모니는 왼손 위에 석발우 4개를 올리고 오른손을 덮어 하나의 발우로 만들었다. 현겁의 천불은 모두 이 한 개의 발우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발우가 없어지면 불법도 소멸하고, 사람의 수명도 짧아진다. 점점 사람들이 악하게 되어 말법시대에 이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시 신의를 행하고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 8만 세가 되면 미륵이 예토에 내려온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대족북산의 다보불과 대가섭존자, 빙링쓰 미륵하생 불도상이 들고 있는 발우는 석가모니가 사용했던 하나의 발우이며, 이는 불법佛法 중 연기緣起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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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Prof. Heyryun Koh.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도자기 등 유물을 분류하고 사진작업을 하다가 독일유학을 갔다. 독일에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논문 자료수집을 하며 항주대학(현 절강대학) 대학원과정을 수료하였다.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학위를 받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예술사학과 중국학 복수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뮌헨대학(LMU) 중국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 귀국하였다. 2017년 5월 하이델베르크대학 연구년으로 나가기 전까지 부산대와 단국대학교에 재직하였다. 현재 뷔르츠부르크대학 동아시아학과 한국학 교수(국제교류재단 파견교수)로 재직 중이다.
herionk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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