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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정혜결사와 쌍벽을 이루는 백련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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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4:45  /   조회5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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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백련사 ②

 

몽골과 강화가 시작되어 1259년에 태자 전倎(후의 원종)이 몽골에 입조入朝하여 원元 세조 쿠빌라이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밝히고, 그 진의를 보이고자 강화도의 성벽도 헐어버렸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그 간섭은 장장 97년 동안 지속된다. 고려는 이후 10년 동안 최충헌의 노비 아들인 김준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1268년(원종 원년)에는 김준이 그의 양아들인 임연林衍(?~1270)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임연 세력도 친몽정책을 지지하는 문신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1170년부터 1270년까지 지속되던 무인정권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에 복속되어 사위의 나라로 전락하고, 원나라가 정하는 고려왕은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고, 고려에는 화주和州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나 서경西京의 동녕부東寧府와 같은 원나라의 통치기관이 설치되고, 총관摠管과 다루가치達魯花赤(darughachi)들이 고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도대체 그 사이 백성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뻔하다. 권력자들의 삶만 있었을 뿐 백성들은 죽어 나갔고, 백성들의 삶은 권력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동원되었을 뿐이다.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국가란 부국강병富國强兵, 즉 백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고,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천명하고 있다(헌법 제10조).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가가 아니며, 나라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함은 당연하다. 

 

보조지눌과 의기투합해 결사를 맺다

 

명종이 폐위된 후 옹립된 신종神宗(재위 1197~1204) 때인 1198년 봄 요세화상은 36세에 개경에 올라가 고봉사高峯寺의 법회에서 명성을 떨쳤고,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연 법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배우러 몰려들기도 했다. 당시 영천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 화상이 1188년(명종 18)에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여 불교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결사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예천醴泉의 보문사普門寺에 주석하다가 여기로 옮겨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내걸고 뜻을 함께하는 납자들과 시작한 불교혁신의 운동이었다. 보조국사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도 거조사에서 지었다.

 

사진 1. 동화사 소장 보조국사 지눌(1158~1210) 화상 진영.

 

요세화상의 명성을 들은 지눌화상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도반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게송을 한 수 지어 보냈다.

 

파란월난현 波亂月難顯

실심등갱광 室深燈更光 

권군정심기 勸君整心器 

물경감로장 勿傾甘露漿

 

물결이 어지러우면 달은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어두워야 등불은 더욱 빛나거늘 

권하건대 그대여, 마음그릇 반듯하게 하시게 

그릇 기울어져 감로주가 쏟아지면 안 될지어니.

 

이를 받아 본 요세화상은 바로 지눌화상과 결사운동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이후 조계선법을 익힌 요세화상은 1200년(신종 3)에 지눌화상이 순천의 송광산松廣山으로 옮길 때 같이 남행하였다. 오늘날의 송광사松廣寺로 간 것이다. 1202년 지눌화상은 이곳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열고 정혜결사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사진 2. 혜원慧遠(334~416) 선사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맺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이런 결사운동은 그 기원이 동진東晉시대인 402년에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던 천하의 혜원慧遠(334~416) 선사가 뜻을 함께하는 100여 명과 함께 여산 반야대般若臺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행念佛行의 서원誓願을 하고 백련결사白蓮結社를 한 것에서 비롯한다. 그 염불행은 후세의 정토경전이 아닌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바탕을 둔 선관禪觀을 행하는 것이었다. 혜원선사는 동림사에 들어가 30년간 한 번도 속세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는데, 도연명陶淵明(365~427)과 도교의 도사 육수정陸修靜(406~477)과 만났을 때 서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걷는 사이에 깜빡 잊고 호계虎溪를 건너 속세에 발을 딛는 바람에 3인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는 여기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진 3. 송대 화승 석각의 호계삼소도.

 

1208년(희종 4) 봄 요세화상이 월출산月出山 약사난야藥師蘭若에 잠시 머물며 당우들을 수리하고 묘관妙觀 수행을 하고 있었을 때, 문득 천태의 묘해妙解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선사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말한 120가지 병폐를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천태지의天台智顗(538~597) 대사가 가르친 법을 깨치고 실천하는 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증득하였다.

 

연수선사는 천태덕소天台德韶(891~972) 화상에게 불법을 배워 영명사永明寺에 15년 동안 주석하며 1,7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길러 낸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다. 그는 유식학, 화엄학, 천태학, 정토교 등을 모두 통합하여 심종心宗으로 통일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선정쌍수禪定雙修, 선교일치禪敎一致 등의 흐름으로 물길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명성은 고려에도 알려져 광종光宗(재위 950~975)은 36명의 승려들을 송宋나라로 보내 그의 종지를 배우게 했을 정도였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종경록宗鏡錄』은 지금까지도 읽힌다.

 

사진 4. 천태덕소天台德韶(891~972) 화상.

 

백련사 도량을 일구고 백련결사를 맺다

 

이후 요세화상은 천태교법만을 설하고 결사의 실천으로 대중들과 함께 참회행懺悔行을 닦는 것에 중점을 두었는데, 추우나 더우나 매일 53부처들에게 12번씩 예경하는 행을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탐라耽羅를 오가는 곳인 탐진현耽津縣의 유력 가문인 탐진 최씨의 최표崔彪, 최홍崔弘과 이인천李仁闡 등이 요세화상을 찾아와 대중들은 늘어나고 절이 좁으니 자기 고을의 만덕사 터에 절을 지으면 좋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요세화상이 보니 과연 터가 좋아 1211년(희종 7) 봄에 공사를 시작하고 문인인 원형元瑩, 지담之湛, 법안法安 화상 등에게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 불사를 시작하기 1년 전인 1210년에 지눌화상은 이미 입적하였다.

 

1216년(고종 3) 가을에 절이 어느 정도 지어지자 법회를 열고 문도인 천인天因(1205~1248) 화상 등과 함께 천태 수행을 본격적으로 행했다. 1221년(고종 9) 봄에는 대방帶方(지금의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관내 백련산白蓮山에 또 다른 백련결사를 개설하여 2년간 머물기도 했다. 1223년에 최표 등의 간곡한 요청으로 백련사로 다시 돌아와 도량을 크게 열었다. 1229년(고종 17) 개성에서 온 유생儒生 몇 사람이 참학參學을 하자 제자로 받아들이고 『법화경』을 가르쳐 통달하게 했다. 이로부터 원근에서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어 큰 모임이 되었다.

 

요세화상에 의한 백련사 중건의 대역사는 1211년부터 1232년까지 21년 만에 완료되었는데, 당시 목백牧伯도 재물을 크게 보시布施하였다. 1232년(고종 19) 4월 요세화상은 백련사에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를 닦고 극락정토에의 왕생을 구하되 오직 천태대사의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를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이것이 송광사에서 지눌화상이 수선사를 결성하여 전개한 정혜결사운동과 쌍벽雙璧을 이룬 백련사의 백련결사白蓮結社운동이다. 보현도량을 연 것에 즈음하여 제자인 진정眞靜 국사 천책天頙(1206~?) 화상으로 하여금 <만덕사법화도량소萬德寺法華道場疏>를 짓게 하고, 1236년에는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도 짓게 하였다.

 

요세화상은 사부대중의 청으로 각지를 다니며 전법하니 인연을 맺은 이가 30묘수妙手이고, 득도 제자가 38인이며, 가람과 난야를 창건한 곳이 5곳이고, 왕공王公과 대인大人, 현직에 있는 관리 등 높고 낮은 사부대중으로 결사에 참여한 사람이 300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대몽항쟁과 입장을 같이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고 있던 터이라 서로 전도하

여 인연을 맺은 사람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따라서 당시 문원文苑에 이름을 날린 학사들도 결사에 많이 동참하였다. 비서학사秘書學士 김구金坵(1211~1278), 학사 조문발趙文拔(?~1227), 임계지林桂之, 좌정언지제고左正言知制誥 임계일林桂一,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1201~1272), 평장사平章事 유경柳璥(1211~1289), 김녹연金祿延, 지제고知制誥 곽여필郭汝弼,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 정흥鄭興, 진도현령珍島縣令 우면于勉, 김서金㥠 등이 결사에 참여하여 쓴 뛰어난 글이 남아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각자 노력하여 법을 위해 힘써라

 

당시에 요세화상은 왕실과 최우를 중심으로 한 최씨 무신정권의 성원도 있었지만 세속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고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않았다. 시주받은 옷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주었고, 방장실에는 옷 세 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 매일 선관禪觀을 하고 『법화경』을 외우고, 준제신주準提神呪를 천 번 외우고, 나무아미타불을 만 번 불렀다. 요세화상은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하고 천태지의 대사의 저술이 복잡하여 공부하는 이들이 갈피를 잡기 어렵다고 보아 『법화문구法華文句』(20권), 『법화현의法華玄義』(20권), 『마하지관摩訶止觀』(20권)에서 핵심만을 뽑아『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만들어 이를 유행시켰다. 고종은 1237년(고종 24)에 그에게 대선사大禪師 다음 품계인 선사禪師의 호를 내리고 세시歲時마다 하사품을 보내고는 했다.

 

백련결사운동을 펼쳐 가던 요세화상은 1245년(고종 32) 4월에 상수제자上首弟子인 천인화상에게 불사를 부탁하고, 그해 7월에 “30년 산 속에서 낡은 물건이 오늘에야 가는구나. 각자 노력하여 법을 위해 힘써라.”라는 말을 대중에게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왕은 그를 국사國師에 봉하고 시호를 원묘圓妙, 탑명을 중진中眞이라 하였다. 국사는 사망하였을 때 책봉하는 것이고 생전에는 승통이나 왕사로 대우한다. 왕명을 받아 한림학사 민인균閔仁均(?~?)은 원묘국사로 제수하는 교서敎書를 특별히 지어 존숭하였고, 최자선생은 백련사주白蓮社主 요세화상의 비문을 지었다. 천인화상은 최우의 두 아들 만종, 만전과 법형제의 의를 맺고 최씨정권과 가까이 해 온 터였다.

 

주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이 하나 있다. 지눌화상과 요세화상이 결사운동에 뜻을 같이하기로 하고 조계산 즉 송광산으로 거처를 옮긴 1200년은 나중에 고려와 조선의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송宋나라의 주희朱熹(1130~1200)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사진 5. 한말의 어진화가 채용신이 그린 주자 초상화. 사진: 한국미술정보센터.

 

주자는 불교를 적극 배척하고 유학을 정통으로 정립시킨 인물이고,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유가들의 배불론은 그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늘 논란이 되는 문제가 주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주자의 불교배척론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도 불교배척의 거친 바람이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주자의 학설을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받들던 조선에서 이념논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젊은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가에 잠시 의탁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마저 진짜 유자儒者가 맞는가 하는 의심과 공격을 받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지식 이전에 이념이 경직화되고 거기에 자신들의 이익까지 모두 걸고 싸웠으니 철학과 지식이 졸지에 사람 잡는 무기로 변해 버렸다. 조선 500년 동안 이런 싸움에서 희생된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그 가운데는 참으로 못된 인간들도 적지 않지만, 실로 나라에 필요한 인물들도 많이 있었다.

 

아무튼 조선에서는 배불이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로 되었고, 주자학이 목숨을 건 이념전쟁의 기준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에서는 지식사회에서 학설논쟁을 넘어 죽고 사는 심각한 것이 되었다. 주자에게 불교의 영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불가에서는 극대화시킬 것이고 유가에서는 최소화하거나 덮어 버릴 성질의 것이 되었다. 

 

주자는 어린 시절 유불도儒佛道의 삼학三學에 열린 태도를 취하며 대금對金 주전론자主戰論者이기도 했던 아버지 주송朱松(1097~1143)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14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절친인 적계籍溪 호헌胡憲(1082~1162),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1101~1147),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1091~1149) 등 세 선생에게 의탁하여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유면지는 주자를 사위로 삼았다. 그런데 이들 세 선생들은 모두 유학자였지만, 호헌은 불교와 노장老莊을 좋아했고, 유자휘는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유면지는 선禪을 상당히 선호하였다. 학자라면 모든 지식과 사상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 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당대의 문집이나 편지글 등을 보면, 주자가 6살부터 18살 사이에 당대 최고의 선장들인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개선도겸開善道謙(?~?)으로 이어지는 세 선사들을 만나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불법을 익히거나 가르침을 얻은 부분이 나타난다는 점이고, 스스로도 불가의 이치에서 많은 것을 깨쳤고 선적 체험을 한 것

을 드러내 보인 점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사진 6.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4) 선사.

 

이와 관련하여 주자가 17살 때 직접 찾아가 선에 관하여 문의한 개선선사에게 보낸 편지나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보면, 주자가 스승 유자휘의 집에서 만나 그로부터 어떤 깨달은 바를 얻은 승려가 어쩌면 대혜선사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부정하는 견해는, 정치권에도 관여했던 대혜선사는 당시 남송南宋(1127~1279) 조정의 실세였던 진회秦檜(1091~1155)의 대금對金 화친책에 반대한 장구성張九成(1092~1159)의 사건에 연루되어 주자가 12살 때인 1141년에 형양衡陽으로 유배를 가서 6년 동안 지냈기 때문에 15살 때와 18살 때 주자가 만난 승려는 아니라고 본다. 반면 긍정하는 견해는 대혜선사가 유배가기 전에 주자가 만났을 수 있다고 한다. 문제의 그 승려가 누구이든 간에 주자가 승려를 직접 찾아가 선에 대해 진지하게 배움을 구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주자는 24살이 되던 해에 스승 연평延平 이통李侗(1093~1163)을 만나 유학으로 학문적 전환을 확고히 하면서 인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 삶에 대해 탐구하는 길을 가게 되었고 불교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평생 100여 차례 이상 여러 사찰을 방문하여 시도 짓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주자가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대상은 불교라기보다는 그 당시 풍미했던 선종禪宗 특히 홍주종洪州宗이었다.

 

이를 모아보면, 주자는 24살 이전에는 그가 배운 선생들의 학문적 경향과 승려들을 만나 직간접으로 불교를 접한 경험에서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선 체험도 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주자가 전개한 성리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심론 등에서 구사하는 개념은 불교적 개념을 유가적으로 용어를 바꾸었을 뿐, 그 개념은 불교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입장은 이러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표층종교에서는 그 양상이 다를지는 몰라도 심층종교 내지 심층철학에서는 유교철학과 불교철학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어쩌면 노장의 핵심 사상도 포함하여 말이다.

 

주자보다 바로 앞 시기에 사물의 본성인 성性과 우주 만물의 원리인 리理를 탐구하는 성리학을 정립한 북송北宋(960~1127)의 5대가, 즉 주돈이周敦頤(1017~1073), 소옹邵雍(1011~1077), 장재張載(1020~1077),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頤(1033~1107) 같은 학자들은 승려들과도 교유하며 불교를 수용하거나 영향을 받아 그들의 학설을 전개해 나갔다.

 

지눌화상이나 요세화상은 이처럼 주자가 남송에서 살아간 시기와 일부 겹쳐지는 시기를 한반도 고려 땅에서 살았다. 그들 간에는 아무런 소통도 없었을 것이고 교류도 없었겠지만, 불교와 관련하여 ‘주자의 불교 연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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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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