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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나비야 청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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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0:34  /   조회1,94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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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면 여행을 떠났지만, 요즘에는 언제든지 도시 근교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9월 산행 장소가 최정산 남지장사로 정해졌을 때 마음이 설렜습니다.  

 

남지장사는 70년대 초, 친구인 우소현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절입니다. 그 옛날 그와 어울렸던 추억을 생각하면 마치 전생의 일처럼 까마득합니다. 남지장사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성벽 같은 2단 축대의 웅장한 모습에 놀랐습니다. 

 

사진 1. 웅장한 남지장사 축대.

 

옛날에는 축대는커녕 허술한 건물 몇 채만 있던 산골짜기 암자였거든요. 주차장은 물론 없었고 버스를 타고 우록에서 내려 2시간을 걸어야 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상전벽해의 세월을 남지장사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산

 

길 찾기가 어려웠지만 10시에는 모두 18명이 모여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남지장사 부근에는 소나무가 울창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잘 어울리는 산길을 천천히 올라갑니다. 저 모롱이를 돌아가면 경사가 급해지고, 길은 짐승들이 다니는 길처럼 좁아집니다. 등산화를 신고 스틱을 짚고 배낭을 멘 사람을 보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요. 많은 사람이 노쇠를 경험하는 나이에 우리는 활짝 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30분 정도 올라가느라 숨이 턱에 닿을 때, 잠시 앉아 간식을 나눈 다음 다시 올라갑니다. 경사가 가팔라 걷는 데 몇 배로 힘이 들지만, 나무며 바람이 좋아 기분은 좋습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언제나 대자연과 신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일입니다.

 

사진 2. 아름답구나, 배낭을 멘 사람!

 

다시 30분쯤 더 올라가면 능선에 올라섭니다. 힘들게 가파른 비탈에 붙었다가 능선으로 걸으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말없이 산속을 걸어가노라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아 조용해집니다. 이 가라앉음이 좋아서 우리는 산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지껄입니다. 이 지껄이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 경지가 바로 명상의 경지입니다.(주1)

 

1시간 걷고 20분 쉬곤 합니다. 보통은 산기슭에서 어슬렁거리지만, 능선 위에서 휴식하니 색다른 맛입니다. 백 번을 되풀이하더라도 산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2시간 가까이 걸은 다음에 시야가 탁 터진 곳이 처음 나타납니다. 우미산 삼성산 자락이 이어지고 그 너머 화악산, 관룡산 자락이 겹겹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트인 곳에 서면 시야는 원대한 범위로 넓어집니다. 아스라한 산맥의 위용을 바라만 봐도 마음은 터질 듯 부풉니다.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더 걸으면 최정산이 보이는 전망 바위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해발 700m 고지, 최근 들어 처음으로 700고지까지 올라왔습니다. 저기 철탑이 보이는 곳이 905m, 최정산 정상입니다. 오른쪽으로는 아련하게 대구 시내의 고층 아파트들이 보입니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입니다. 노년에는 힘을 남겨두고 산행해야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경사가 급해서 올라갈 때도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는 힘이 더 듭니다. 경사가 급하니 등산화 안에서 발이 놀아 발가락이 아픕니다. 몸은 힘든데 정신이 기쁨으로 넘치는 것은 산행이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로는 산속에서 노쇠하고 초라한 자신의 육체를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 3. 아스라한 산맥의 위용.

 

노랑코스모스 위에서 암끝검은표범나비 암컷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제비꽃을 기주식물(주2)로 살아가는 나비이지만 노랑코스모스도 좋아하나 봅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노랑코스모스 위에 앉아 있는 이 나비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경계선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비 종류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과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니 신비하지 않습니까.

 

호접몽胡蝶夢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장자(기원전 369?~기원전 286)의 호접몽이 생각납니다. 장자는 가난한 동네의 막다른 골목에서 짚신이나 짜면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관직을 거절하고 자유롭게 살아간 사람입니다.(주3)

 

어느 날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유쾌하고 만족스러워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어엿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노라.(주4)

 

장자는 자신이 나비였던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니 자신이 나비였던 것을 꿈꾸었던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이 사람이라고 지금 꿈꾸고 있는 나비인지 헷갈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결정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장자는 호접몽을 통해 자기가 장주가 아니라 나비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 즉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심한다’라는 말은 자기 머리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진 4. 암끝검은 표범나비.

 

보르헤스(1899~1986)는 장자의 이 은유를 가장 훌륭한 은유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이것은 꿈으로 시작하며, 그래서 그가 깨어난 후에 그의 삶은 여전히 꿈과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일종의 거의 기적과 같은 행복감을 품은 채 그는 적절한 동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이 호랑이였던 꿈을 꾸었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비는 무언가 가냘프고 덧없는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주5)

 

보르헤스 외에도 수많은 동서양의 석학들이 장자의 호접몽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장자로부터 천 년이나 지난 후, 송나라의 비구니 묘총(1095~1170)은 장자의 호접몽을 읽고 난 다음 아름다운 게송을 남겼습니다.

 

한 척의 조그만 배를 큰 바다에 띄우고

노를 들고 춤을 추니 별세계의 곡조로다

구름과 산, 바다와 달을 모두 던져버리고

남은 세상 장주의 나비 꿈을 꾸며 살리라.(주6)

 

묘총은 장자의 호접몽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그 감동을 감출 수 없어서 노를 들고 춤을 춘다고 말합니다. 일엽편주 위에서 노를 들고 춤을 추는 순간이야말로 순전한 기쁨이고 더없는 희열의 순간이며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할 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에 청중이 감동하듯이, 우리 또한 이 게송을 읽으면 묘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쁨에 “아아, 좋구나!”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소박한 여성이 때로는 이름난 시인보다 삶으로부터 훨씬 풍부한 의미를 찾아내기도 하는데 묘총이 그러합니다.

 

사진 5. 최정산의 부드러운 능선.

 

우리나라에도 나비에 대한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전해 내려옵니다. 운율이 경쾌하고 글자 한 자 한 자가 환하게 빛납니다. 이 시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축적된 노래입니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주7)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기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루 동안 하는 온갖 생각들 가운데 가장 기분이 저조해지는 주제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주8)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킬 때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나비가 되어 다른 세계로 건너가자고 권유합니다. 자신의 밖을 향해 눈을 돌려 청산으로 가자고 권유합니다. ‘범나비 너도 가자’라는 구절에서는 개체를 넘어선 관계 속에 생물학적 진실과 행복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비록 짧은 시이지만 이 시는 우리를 더 큰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나비는 자신의 삶을 계획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시적 화자는 나비와 청산에서 천국을 본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이든 나비 한 마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환하게 빛이 납니다. 

 

최정산 남지장사

 

최정산 남지장사 경내를 둘러봅니다. 사문(광명루)은 축대 위에 있는 누각인데, 종루, 누각, 불이문 역할까지 합니다. 사찰은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문화적으로 고안된 것이라 그 의미가 심원합니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대웅전과 극락보전이 있습니다. 50년 전 우소현 스님이 기거했던 초라한 옛날 건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부근 어디에 앉아서 시를 쓰던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추억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진 6. 최정산 남지장사 사문(광명루).

 

오늘 하루 11,000보를 걸었습니다. 경사가 급한 산이라 숫자보다 배로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우리 나이에는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만한 산행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사람은 선택의 여지없이 한 걸음 한 걸음씩 걷는 수밖에 없습니다.

 

<각주>

(주1) 오쇼, 『행복한 동행』, 2007.

(주2) 특정한 곤충이나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식물.

(주3) 『莊子』, 雜篇 列禦寇.

(주4) 『莊子』, 內篇 齊物論 : “昔者莊周夢爲胡蝶,栩栩然胡蝶也,自喩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

(주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2003.

(주6) 『五燈會元』, 卷第二十, 無著妙總禪師條 : “一葉扁舟泛渺茫,呈橈舞棹別宮商.雲山海月都抛卻,贏得莊周蝶夢長.”

(주7) 金天澤, 『靑丘永言』, 1728, 無名氏.

(주8)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재발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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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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