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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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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0:07  /   조회6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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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표층신앙은 일반적으로 이웃종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 심층신앙은 이웃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는 다원주의적·수납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지난 8월호에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구체적인 예로 심층 불교와 심층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불교와 다른 이웃종교들, 예를 들어, 유교나 천도교와의 대화도 가능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인만큼 우선 이 두 종교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는 어느 면에서 서로에게 거울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대화를 통해 자기에게 있는 장점과 단점을 더욱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협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논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일단 세 가지 면에서 서로 소통과 대화의 접촉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란 1) 깨침 vs. 메타노이아, 2) 염불 vs. 예수 기도, 3) 자비 vs. 사랑입니다.

 

깨침과 메타노이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불교는 ‘깨침’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불佛, 불타佛陀, 부처라는 말은 범어의 ‘붓다(Buddha)’를 옮긴 말인데, 모두 ‘깨친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성불하셨다고 하는데, 보리수의 ‘보리(bodhi)’란 말도 깨침이라는 뜻이고. 성불成佛하셨다는 것도 ‘깨침을 이루셨다’, ‘부처님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불교佛敎는 ‘깨친 분의 가르침’이며 동시에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불교학자가 말한 것처럼 깨침은 불교의 ‘알파와 오메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D.T.Suzuki(鈴木大拙 貞太郞, 1870∼1966)의 말처럼, 깨침이 없는 불교는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 같다.”고 하는 말이 역사적 진실입니다.

 

사진 1.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물론 불교 안에서도 여러 종파가 있어 정토종淨土宗에서처럼 깨침보다도 염불을 강조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염불도 염불선念佛禪이라는 말이 있듯이 깨침의 수단입니다. 또 화엄종華嚴宗에서처럼 이론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처럼 이론도 결국에는 깨침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교리를 믿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라 여깁니다. 이른바 대속代贖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는 이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최초로, 그리고 계속해서, 선언한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라는 말의 그리스 원어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에서 메타가 ‘넘어서다’, ‘변화하다’라는 뜻이고, 노이아는 ‘의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을 한다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물을 보는 눈이 바뀌는 ‘의식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은 ‘의식을 바꾸라’, ‘깨달음을 얻으라’라고 하는 것이 원의에 더욱 부합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 2.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

 

스위스 출신으로 독일 튀빙겐대학의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 교수에 의하면, 메타노이아는 “인간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변화하는 것,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에서 신과 이웃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변화된 의식, 변화된 사고방식, 변화된 가치 체계”를 의미하고 나아가 “전 인격적으로 철저한 의식의 재구성이 일어나는 것, 되돌아옴, 삶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태도가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1945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초기 복음서 중 하나였던 『도마복음』은 현재 그리스도교 성경에 포함된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깨침(gnōsis)’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gnōsis’는 불교의 ‘prajňā’(반야)와 대칭을 이루는 말이라 하여도 무방합니다.(주1)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의식의 변화라는 깊은 차원에서 만나 대화하고 이런 체험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도록 하는 데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3. 1945년 온전한 문서로 발견된 『도마복음』.

 

염불과 예수 기도

 

불교에서 염불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야심경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영문자로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라든가 ‘옴마니반메흠(Om mani padme hum)’, 그 외에 정토종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있습니다.

 

염불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염불은 정신을 한군데 모으는 일을 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염불선念佛禪이라는 것입니다. 염불을 통해 궁극적으로 깨침을 얻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용어로 고치면 간단한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움으로 가능하게 되는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염불과 같은 것이 없을까요? 그리스도교에도 염불 수행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동방정교 전통에서는 ‘헤시캐즘(hesychasm)’이라고 하여 3, 4세기경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수 기도(Jesus Prayer)’라는 수행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고 했는데, 그 권고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짧은 기도문을 처음에는 하루에 3천 번, 그러다가 6천 번, 다시 1만 2천 번까지 늘여 가며 외우기를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세지도 않고 심장이 뛸 때마다 기도가 속에서 저절로 나오도록 하는 수련법입니다. 심지어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기도가 계속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육체적, 심리적, 지적 변화가 오고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온몸을 감싸게 된다고 합니다.(주2)

 

그리스도교에 이런 ‘예수 기도’의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통이 동방정교회에서 실행되던 것이기 때문에 서방 가톨릭이나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개신교에서는 거의 망각되다시피한 형편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통해 주문呪文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주문을 활발히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자비와 사랑

 

‘깨침과 메타노이아’, ‘염불과 예수 기도’를 통해 의식의 변화를 체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 가지 수행 효과가 나타나겠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우주 공동체의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의존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보살의 자비심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처럼 이웃과 나를 하나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입니다. 자연히 동료 인간들을 경쟁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일도, 자연을 인간 중심적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동으로 자비와 사랑을 더욱 널리 퍼지게 하여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소외와 불안이 줄어들도록, 그리고 동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위해 절실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나가면서

 

오늘같이 다원화된 세상에 아무도 고립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또 오늘같이 복잡한 세상에 누구도 자기 혼자 이 복잡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종교만 홀로 세상의 필요를 다 충족시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형국에 한국의 양대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데 더욱 적극적이 된다면 한국의 종교 지형도 많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도 더욱 맑고 향기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주3)

 

<각주>

(주1) 『도마복음』에 대해서는 오강남 풀이, 『살아계신 예수님의 비밀의 말씀』(김영사, 2022) 참조.

(주2) ‘예수 기도’에 대해서는 어느 러시아 청년의 체험을 기록한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오강남 엮음, 『기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대한기독교서회, 2003) 참조.

(주3)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강남,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부록에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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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서울대학교 종교학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화엄 법계연기에 대한 연구’로 Ph.D. 학위취득.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저서로는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도덕경』, 『장자』, 『세계종교 둘러보기』,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종교란 무엇인가』, 『예수는 없다』,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오강남의 생각』 등. 번역서로는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예수의 기도』, 『예언자』 등.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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