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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문자주의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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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0:08  /   조회1,1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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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신앙과 심층신앙의 차이 중 하나는 표층신앙이 경전에 쓰인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심층신앙은 문자 너머에 있는 속내, 더 깊은 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문자주의란 근본주의와 같은 말입니다.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는 사실 어느 종교에나 부분적으로 다 있는 현상입니다. 

 

조선시대 유교에도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가 상당했고, 불교에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문자주의가 상대적으로 심각한 종교를 든다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말이 우리 귀에 더욱 익숙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둘 중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기독교를 중심으로 문자주의의 불합리성을 이야기하고 여기서 불교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사항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에서 보이는 문자주의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20세기 초 미국 일부 기독교 교인 중 새롭게 등장하는 과학, 고고학, 심리학, 문헌비판학 등의 학문에 의해 기독교의 초석이 무너진다는 위협을 느끼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의 ‘근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The Fundamentals』라는 12권의 소책자를 만들어 전국에 뿌렸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성경 무오설’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장하고 거기에 따라 성경에 언급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 기적, 부활, 대속, 재림 등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성경에 우주가 엿새 만에 창조되었다고 하면 그것도 그대로 믿고,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도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진 1.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고 주장한 이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이었습니다. 그는 성경, 특히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신화적(mythological)이라고 보았습니다. 신화는 마치 호두와 같아서 그냥 그대로 먹을 수는 없고, 껍데기를 깨야만 속살을 먹고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화를 대할 때 ‘호두까기 인형’이 필요하다고 할까요. 이처럼 신화가 깨어져서 속살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불트만은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라고 했는데, ‘de’가 없앤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신화를 송두리째 없앤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어서, 폴 틸리히(Paul Tillich, 1986~1965)라는 또 다른 신학의 거장은 그것을 ‘탈문자화(deliter alization)’라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진 2. 신학의 거장 폴 틸리히(Paul Tillich, 1986~1965).

 

폴 틸리히는 성경을 문자주의(literalism)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대표적 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세 권짜리 저서 『조직신학』을 보면 ‘상징(symbol)’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상징’, ‘천국의 상징’ 등등 십자가가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천국이 정말로 무슨 뜻인가 그 속살, 속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가 쓴 『믿음의 역동성』이라는 책 제2장을 보면 상징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합니다. 그 장 첫 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의 궁극 관심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상징적인 언어만이 궁극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Man’s ultimate concern must be expressed symbolically, because symbolic language alone is able to express the ultimate.)”

 

여기서 ‘궁극 관심’이라는 것은 그가 말하는 ‘신앙(faith)’입니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이 나온 다음 문단에서 상징(symbols)과 표지(signs)가 다 같이 “그 자체를 넘어 다른 무엇을 가리킨다(point beyond themselves to something else).”라고 했습니다. 상징이나 사인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적 용어로 표월지標月指,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진 3. 미국 성공회 신부 존 셸비스퐁(John Shelby Spong).

 

문자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분으로 미국 성공회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책 대부분은 문자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외친 셈이지요. 이런 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책이 『성경을 근본주의로부터 구해내기』인데,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문자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2016년에 「마태복음」 주석서로 쓴 책 『성경 문자주의: 이방인의 이단』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는 2천 년 가까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느라 성경의 본의와 관계없이 헛다리를 짚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을 위해 쓰인 「마태복음」이 유대인이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이른바 ‘미드라시(Midrash)’라는 유대인 기법으로 기술한 이야기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사라지고 이방인들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느라 성경 저자의 종교적 메시지를 놓치고 엉뚱하게 문자적 뜻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 4. 오강남,『예수는 없다』(현암사, 2017)의 표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다가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울 때”라고 말하면 한국인은 그것이 오랜 옛날이라는 뜻으로 금방 알아듣지만,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 사람이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한국에서는 호랑이도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호랑이는 담뱃대로 피울까 궐련으로 피울까, 궐련으로 피운다면 하루에 몇 갑이나 피울까 하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성경뿐 아니라 모든 경전은 transformation(변혁)을 위한 것이지 information(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이나 과학적 정확성은 성경 저자들의 일차적 관심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이상스런 얼굴 그림은 인체 구조에 관한 생물학적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내면적 변화를 위한 것이라 것입니다. 제 책 『예수는 없다』 제2부의 60페이지는 몽땅 문자주의를 경계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불교에서 보이는 문자주의

 

불교의 경우 기독교나 이슬람에 비해 이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서 비교적 자유스럽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계된 많은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믿고 있는 불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출생하여 나오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자들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조명하는 책으로 유명한 E.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London: Routledge and Kenan Paul, 1927)라는 책도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legend’(전설, 설화, 신화)와 ‘history’(역사)가 혼재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용수가 용궁에 내려가서 『화엄경』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사실로 믿어야 한다고 하는 불자는 없을까요? 

 

사진 5. 부처님의 삶을 조명한 책 E.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London: Routledge and Kenan Paul, 1927) 표지.

 

캐나다의 문학비평가 및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노드럽 프라이(Northrup Frye, 1912~1991)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보고한다는 것은 성경 저자들에게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들은 신화나 은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다.”고 했는데, 이것이 불경에는 적용될 수 없는 이야기일까요?

 

사진 6. 캐나다의 문학비평가 노드럽 프라이(Northrup Frye, 1912~1991).

 

불교에도 문자주의가 들어올 소지가 있기에 선불교에서도 단연코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특히 깔라마경(Kamala Sutta)에서도 부처님이 “되풀이해서 들어서 얻어진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전통에도, 소문에도, 경전에 쓰여 있는 것에도, 추측에도, 경구에도 그럴듯한 사유” 등등에도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여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을 받들고 실천하면 이익과 행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육도윤회도 죽어서의 문제라기보다 지금 이 생에서 육도를 돌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축생이나 아귀, 아수라의 삶을 살지 않도록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면에서 종교적 진술은 일종의 암호(cypher)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암호 그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것을 올바르게 해독(decypher)할 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실존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해석(hermeneutics)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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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서울대학교 종교학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화엄 법계연기에 대한 연구’로 Ph.D. 학위취득.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저서로는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도덕경』, 『장자』, 『세계종교 둘러보기』,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종교란 무엇인가』, 『예수는 없다』,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오강남의 생각』 등. 번역서로는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예수의 기도』, 『예언자』 등.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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