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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심리학의 만남]
인간에 의한 불교진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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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1:55  /   조회1,1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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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주체에 의해서 인식론이 정립된다면 진리론은 인간의 진리로 나아간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인간의 진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식주체 각각의 진리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진리를 논하고자 한다. 존재 자체, 인식주체, 인간으로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 존재론과 연기론이 짝을 이루고 인식론과 세계론이 짝을 이루듯이 진리론은 인간론과 짝을 이룬다. 불교에서 진리는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 성인이든 범부이든 관계없이 인간의 진리이다. 

 


불교진리론

 

불교의 진리론을 대표하는 사성제四聖諦는 보통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 또는 ‘네 가지 성자의 진리(four noble's truth)’로 번역된다. 성聖 즉 아리야ariya를 ‘고귀한’ 또는 ‘성자의’로 번역한 것이다. ‘고귀한’으로 번역할 경우 사성제는 붓다가 문제로 삼은 것에 대한 해답이기에 ‘고귀한’ 진리이다. 붓다는 생로병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사성제이다.

 

‘성자의’로 번역할 경우 사성제는 성자에게만 진리인 것이 된다. 범부에게는 진리가 아니지만 성자에게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에서부터 나온다. 고苦, 즉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괴로움이라는 상태 자체는 ‘고귀한’ 것이 아니므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고귀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할 수 없다. 다만 성자의 관점에서 보면 괴로움은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苦와 집集은 고귀한 진리는 못 되지만 성자의 진리는 된다는 것이다. 다만 성자의 관점에서 진리라는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정도로 중요한 진리는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이다. 

 

고성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따라서 나머지 성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사성제를 온전히 쓰면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집멸성제苦集滅聖諦, 고집멸도성제苦集滅道聖諦 즉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또는 성자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또는 성자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또는 성자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의 방법이라는 고귀한 또는 성자의 진리가 된다. 단순히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가 아니라 ‘고’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나머지 세 가지 성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고苦(dukkha)’의 ‘√du’는 아직도 영어 ‘dull’, 독일어의 ‘dunkel’에 남아 있다. 어원에서 ‘고’는 ‘바퀴가 제대로 깎이지 않아서 삐꺽삐꺽하는 상태’를 말한다. 바퀴가 둥글게 잘 깎이면 두 바퀴가 부드럽게 잘 돌아갈텐데, 한쪽이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수레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를 고苦라고 한다. 고를 번역할 때, ‘pain’, ‘suffering’, ‘unsatisfactoriness’, ‘disease’, ‘stress’로 번역한다.

 

이제는 고를 ‘통증’으로만 번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것이 고의 핵심임에는 틀림없다. ‘괴로움’으로 번역하는 ‘서퍼링(suffering)’은 보통 ‘겪는 것’을 말한다. 예기치 못한 일을 겪는 것, 당하는 것을 말한다. ‘불만족’으로 번역하는 ‘언새티스팩토리니스(unsatisfactoriness)’는 만족의 반대말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말한다. ‘불편’으로 번역하는 ‘디지즈(disease)’는 편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스트레스’는 긴장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좋은 긴장이든 나쁜 긴장이든 긴장이 있는 모든 상태를 말한다.

 

사진 1. 붓다의 고행상.

 

어원적으로 보면 고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인한 상태 ‘malfunction’, 즉 기능불량을 말한다. 무엇이든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통증 같은 경우도 신체적으로, 괴로움은 정서적으로, 불만족은 만족이라는 제대로 기능하는 상태의 반대이고, 불편은 편안한 상태의 반대이고, 긴장은 긴장 없는 상태의 반대가 된다. 이처럼 어떠한 차원에서 발생하든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고’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붓다가 제시한 진리는 현상론, 원인론, 목적론, 방법론의 네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고성제는 괴로움이라는 범부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현상론(phenomenology)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을 집으로 파악하는 것은 원인론(aitiology)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 인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 바뀌어진 현실을 목적론(teleology)이라 할 수 있고, 목표, 새로운 현실로 나아가는 방법을 방법론(methodology)으로 제시할 수 있다.

 

붓다가 제시하는 네 가지 차원의 진리를 네 가지의 학문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현상을 파악하는 것, 원인을 파악하는 것, 지향하는 바, 지향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 각각이 현대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불교의 관점에서는 진리에 모두 포섭된 형태로 나오고 있다. 이를 포괄론적 진리(inclusiveness theory of truth)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의 진리는 참·거짓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영역을 함께 포괄하는 진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진리’를 두 가지 의미로 주로 사용한다. 어떠한 것이 사실과 부합할 때 그것을 진리, 즉 참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리를 대응론적 진리(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진리인지의 여부를 사실에 대응하는지에 따라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면 우리는 그 말을 진리 또는 참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리를 정합론적 진리(coherence theory of truth)라고 한다. 합리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성제를 보면, 고집멸도 가운데 고와 멸은 붓다가 발견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2.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처음 설하신 녹야원에 있는 다메크 대탑.

 

괴로움이라는 현실과 붓다가 새롭게 성취한 멸이라는 현실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제와 멸성제는 사실과 대응하는 대응론적 진리 개념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원인을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집성제와 도성제는 정합론적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고와 집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합론적 진리라고 할 수 있고, 결과와 방법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멸과 도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합론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성제에는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 진리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진리 개념에는 두 가지를 넘어서 또 하나의 진리 개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붓다가 사성제를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이를 실천함으로 이루어지는 진리의 개념이다. 대응적이고 정합적이라는 관점에서 사성제를 진리라고 하지만, 붓다는 이를 넘어서 이것들을 철저하게 알고, 제거하고, 실현하고,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리를 ‘실현론적 진리(realization theory of truth)’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리, 실현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진리를 말한다. ‘진리(sacca, satya)’에서 ‘삿sat’은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진리와 존재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진리, 참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존재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진리에 대한 네 번째 개념이 나오게 된다. 이렇듯 불교에서의 진리는 서구의 두 가지 진리 개념을 포함하는 동시에 불교 특유의 진리 개념이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포괄론적 진리와 실현론적 진리는 불교 고유의 진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론

 

진리는 인간의 진리라고 이야기한다. 진리를 고정불변의 진리라고 보는 관점도 있을 수 있지만, 불교적 관점에서의 사성제에 기초한 진리는 인간의 진리이다. 인식주체에 따라서 다양한 진리가 가능하겠지만, 사성제가 제시하는 진리는 인간의 진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성제를 인간의 진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리는 인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다. 존재론이 연기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인식론이 세계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진리론과 인간론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성제에서 ‘고’를 해석할 때, 어원적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러한 상태를 전제하고 다양한 차원에서의 고가 성립한다는 것을 고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볼 수 있었다.

 

진리가 인간의 진리가 되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가능해진다. 고라는 현실과 멸이라는 현실이다. 고를 ‘기능’에 중점을 맞추고 바라보면, 인간은 잘 기능하는 존재와 잘 기능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기능하는 존재가 된다. 멸이라는 새로운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존재와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목표의 실현가능성에 따라 나뉘어서 볼 수 있다. 인간은 가능적 존재가 된다. ‘기능적 존재(functional being)’와 ‘가능적 존재(potential being)’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현실이 된다.

 

보통의 인간을 오온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기능적 차원에서 인간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육체적인 차원에서 기능하는 존재이면서 정서적 차원에서 기능하고, 사고적 차원, 의도적 차원, 인식의 차원에서 기능한다는 말이다. 단순하게 심신이원론이 아니라 색수상행식 오원론五元 論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인간을 불성, 여래장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이러한 불성을 가리고 있는 번뇌를 제거하면 그 원래의 가능성인 불성佛性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을 가능적 존재로 보는 전형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붓다가 실현한 새로운 현실인 ‘멸滅’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나아가 이를 모든 존재의 본래적 가능성으로 두는 사고방식이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은 붓다가 처음부터 이야기한 사성제라는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론인 동시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인간에 대한 관점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가지 차원에서 잘 기능하고, 나아갈 수 있는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진리인 것이고, 인간이 실현해야 할 것이다.

 

불교심리치료적 함의

 

먼저 인간론에서 심리치료적 함의를 볼 수 있다. 잘 기능하고,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 자체가 심리치료적 함의가 된다. 이는 불교심리치료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차원의 기능을 잘 실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사고적으로, 의도적으로, 인식적으로 어떤 기능이 존재하는지, 그러한 기능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능성과 가능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기능적 존재와 가능적 존재로 구분하지만 둘은 연결되어 있다. 기능성이 잘 발휘되는 것이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가지 차원에서 기능성이 잘 발휘되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은 인간으로서의 기능성이 극도로 발현된 것이다. 기능의 발현이 곧 가능의 실현이 된다.

 

진리론의 차원에서 고에 대한 심리치료적 해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야ariya’ 에 대한 해석을 ‘고귀한’, ‘성자의’ 두 가지로 하였는데, 이때의 아리야를 방향을 의미하는 도구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성자로 나아가는’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는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진리가 되고, 성자로 나아가는 진리가 된다. 즉 ‘고라는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진리’, ‘고라는 성자로 나아가는 진리’가 된다. 이렇게 되면 고는 단순히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발자trigger로서의 고苦가 된다. 즉 고는 더 이상 범부의 고, 괴로움 자체가 아니게 된다. 고는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촉진자가 되고, 고는 멸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선어禪語에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깨달음이 된다는 말이 있다. 모든 현상이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유발자가 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촉진자가 된다. 그에 따라 고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달라지게 된다. 고는 멸을 향해 나아가는 부정적 현상이 아니라 촉진자로서 긍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도道’는 무위법을 추구하는 유위법이 되듯이, ‘고苦’도 역시 무위법을 추구하는 유위법이 된다. 사성제의 처음과 마지막인 ‘고’와 ‘도’가 모두 무위법이라는 멸로 나아가도록 촉진하는 자, 멸로 나아가는 방법론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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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ㆍ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ㆍ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전공 지도교수. 한국불교상담학회 부회장, 슈퍼바이저. 한국불교학회 부회장. 저역서로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의 언어관』, 『불교심리학사전』 등이 있다.
heecho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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