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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선문정로』를 지은 뜻과 『선문정로』를 읽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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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11:35  /   조회3,74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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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1   

 

『선문정로』에 대해 좀 자세한 해설서를 써서 장경각 출판사에 넘기고 얼마 지나서의 일이다. 학교 명상실에서 몇몇 교수님과 참선을 마치고 마침 그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원택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의 해설서가 큰스님의 집필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 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많은 대중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반 독자의 수준에서 쉽게 이해하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책을 한 권 더 쓰실 수 있겠습니까?” 

 

『선문정로』의 쉬운 이해와 바른 실천을 위해

 

사실 그때 교수님들과 하던 얘기도 그런 것이었다. 해설서를 쓰면서 『선문정로』야말로 참선 수행자의 바이블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함께 공부하는 주변 교수님들께 초고를 보여드린 뒤 돌아오는 반응은 대부분 너무 어렵다는 평이었다. 왜일까? 참선 수행과 우리의 정신 활동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참선을 한다는 것은 분별적 사유를 내려놓는 철학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 분별적 사유의 바벨탑을 쌓는 일을 본질로 한다. 참선과 정신 활동이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적 사유를 작동하여 참선을 이해하려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일 수 없다. 

 

사진 2. 2022년 1월에 장경각을 통해 출간한 필자의 책 『정독精讀 선문정로』. 

 

쉽게 이해하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참선 해설서가 없던 것은 아니다. 성철스님이나 역대의 선지식들이 내놓은 선문의 높은 법문들이 바로 그것이다. 성철스님이 내놓은 『선문정로』나 『본지풍광』를 거듭 읽어보면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 불교 서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도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의 명법문들은 오늘날의 독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그 메시지의 전달이 정확하고 강력하며 심지어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문자의 지형이 바뀌게 마련이다. 누구나 걷던 평탄한 길이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 무성한 험한 길이 되는 일이 문자의 세계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선문정로』의 법문 역시 현재의 문자 환경에서 보면 쉽지 않은 어휘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새로운 번역과 해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새로운 울림을 갖는 언어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깨달음에 수반하는 하나의 선물이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선문정로』에 대한 쉬운 이해와 바른 실천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가 또 하나 있다. 돈점논쟁이다. 『선문정로』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기준들을 제시하여 수행자 스스로 자기 수행을 점검해 볼 수 있도록 한 수행 지침서이자 진위 감별서이다. 그런데 『선문정로』의 설법이 극단적 부정과 비판과 배격의 언어로 전개되다 보니 이로 인해 촉발된 논의 역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쟁의 방식으로 진행된 경향이 없지 않다. 돈점논쟁이 그것이다. 물론 『선문정로』로 인해 촉발된 돈점논쟁은 한국 불교학 연구의 역사에서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뜨거운 논쟁으로 인해 『선문정로』가 시비의 틀에 갇혀 수행 지침서로써의 본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 감이 있다. 이 엄청난 저작을 읽어볼 뜻을 낸 사람들조차 십중팔구 여기에 따라다니는 논쟁의 흔적들을 소환하여 함께 시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리곤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문정로』에 정통성의 측면에서 시비를 가려보자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궁극적 지향은 화두참구를 통해 시비분별에서 벗어난 무심의 실천과 완전한 무심의 성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처럼 시비분별을 벗어난 길을 걸어보자고 제안한 이 책이 도리어 시비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성철스님은 어째서 시비분별을 벗어난 무심의 성취를 강조하는 법문을 하면서 이렇게 시비를 가르는 방식을 취한 것일까? 성철스님은 궁극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중간 정거장들을 설정하면 그 순간 분별적 유심에 머무는 일이 일어 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든 중간 단계 를 없애 버리고 마지막 정거장인 궁극의 깨달음만을 남긴다. 여기에서는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로 인한 시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선문정로』의 강력한 부정과 비판과 배격은 예외 없이 각자의 내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유심적 장애를 향한 것이다. 예컨대 10지보살과 등각보살도 견성하지 못했다는 말에 다양한 학문적 논쟁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머물지 않는 수행을 거쳐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한 석가모니의 길을 따르자는 지침을 제시한 것이라면 그 말은 반박 불가능한 절대 명제가 된다. 그 각각의 문장들은 수행자를 윽박질러 옳고 그름의 차원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고함이자 매질이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선문정로』의 고함과 매질 앞에 정직해지고 간절해질 필요가 있다.

 

 『선문정로』의 3대 핵심 주제

 

우리는 『선문정로』의 독서가 우리를 성철스님이 도달한 바로 그 자리로 이끄는 길 안내가 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 법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 『선문정로』는 성철스님의 실참실오적 경험을 압축한 실천론이다. 그러므로 『선문정로』의 독서가 성철선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공리공론을 우리의 머리 위에 얹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실천론이라고 해서 이해와 논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문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이고 체험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선문정로』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주제의 거듭된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돈오원각론頓悟圓覺論’, ‘실참실오론實參實悟論’, ‘구경무심론究竟無心論’이 바로 그것이다.

 

돈오원각론은 선문에서 말하는 돈오견성이 부처님의 원각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심으로 인한 장애가 완전히 제거된 진정한 무심이라야 견성이라 할 수 있으며 만약 수행이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견성이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참실오론은 무심을 직접 실천하는 실참과 구경의 무심을 성취하는 실오 이외의 모든 군더더기를 쳐내 버린다. 

 

구경무심론의 종지란 무엇인가? 성철스님은 유식학의 논의를 적극 활용하여 그 수증론을 피력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구조에 대한 정치한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간파하기 어려운 미세한 번뇌, 그 중에서도 근본무명이 일어나는 최심층 아뢰야식의 차원을 벗어난 궁극의 무심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그 유명한 숙면일여의 기준이 제시된다. 깨어 있는 상태나 꿈을 꾸는 상태에서 무심에 의한 통일적 상태가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해도 그것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며, 꿈조차 없는 숙면의 상태에서 무심의 선정이 유지되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숙면일여를 뚫고 지나가야 아뢰야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진정한 무심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부처 마음과의 통일적 만남이 일어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돈오원각론, 실참실오론, 구경무심론은 삼위일체적 관계로서 뚜렷한 기준을 공유한다. 화두참구에 의한 불이不二적 통일이 영속적인 것인지, 현재 진행 중인 것인지, 철저하고 완전한 것인지를 묻는 기준이 그것이다. 화두참구는 실상과 한 몸이 되는 실천을 통해 완전한 앎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에는 일체의 이해가 배제되어 있다. 안다면 전부 아는 것이고 모른다면 전체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선문의 불가사의한 암호[公案]들에 대해 성철스님은 ‘화두 공부를 부지런히 해 철저하게 깨달아 바른 눈을 갖추기 전에는 절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말로 모든 이해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사진 1. 동의대 연구실에서 선 필자. 

 

『선문정로』를 쉽게 이해하고 바로 실천하도록 이끄는 글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고서 나는 그 일을 퇴직 전까지 해 보겠다고 했다. 말씀 전달자[傳語人]의 역할을 맡아보겠다는 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의 전달이 진실 하려면 그 마음에 통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일을 1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2년 반 안에 해 보겠다고 자임한 것이다. 게다가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 숙제는 덜컥 받았는데 시간은 가고 안목은 여전하다. 절박함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이 숙제는 원래부터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숙제인 것이다. 여기에 위안을 느끼면서 결코 쉽지 않은 이 숙제를 독자들과 함께 풀어 보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독자들의 동참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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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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