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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메이지유신의 주역, 인도 땅을 밟은 최초의 일본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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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09:08  /   조회3,01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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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3 |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1838-1911 

 

 

근대일본의 불교와 아시아의 관계를 규명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일본불교가 전쟁에 협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연구자가 근대일본불교의 아시아 포교활동에 대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불교는 나누어 생각하기 어렵고, 서로 협력 관계였다.”라는 공통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후지이 켄지, 1999).

 

근대 일본불교학에 대한 각성

 

다만, 이러한 시각 역시 근래 들어 근대 일본불교의 역할론에 대한 재인식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패전 이후 약 50여 년간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전쟁 전, 즉 일본불교가 전쟁에 협력하기 이전의 일본불교는, 혹은 불교학자(승려 포함)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인도·네팔·티베트·실론섬 등으로 유람을 겸한 체험 활동을 떠났다. 이들은 해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해서 서양문물에 대한 일본불교의 변화와 역할론을 강조했다. 본 지면에서 소개할 시마지 모쿠라이 역시 이들 중 한 명이다. 

 

사진 1. 시마지 모쿠라이. 사진 『蔵から出てきた盛岡』, 国書刊行会제공.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1838~1911)는 메이지 시기에 활동한 정토진종 혼간지本願寺파의 승려이다. 시마지 모쿠라이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인도 땅을 밟은 최초의 일본인 승려’이다. 즉, 그의 평가가 학술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징성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상징성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시마지 모쿠라이(이하 모쿠라이)는 메이지 유신과 깊게 연결되어 있고,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이하 서본원사)의 집행장으로서 아시아 포교에 근간을 마련한 인물이다. 모쿠라이는 조슈長州 번령藩領에 있는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사원에서 태어났다. 번령 내의 진종사원의 개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를 계기로 메이지 유신 직후에 교토 본산에서도 진종의 대정부 교섭을 담당하게 되었다.

 

해외 종교상황 시찰, 인도 상륙

 

메이지 4년(1871),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위시로 한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서본원사西本願寺에서는 원래 해외 종교상황 시찰단을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행시킬 예정이었지만, 준비 부족으로 원래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후, 서본원사의 오타니 고손大谷光尊(1850~1903)은 자체적으로 해외 종교상황 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시마지 모쿠라이를 비롯한 5명에게 의뢰했다.

 

1872년 3월 초, 일행은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약 한 달 뒤인 4월 20일,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통해 유럽에 발을 디뎠다. 일정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를 시찰한 후 귀국길에 아시아 불교 유적을 유람하는 것으로 원래 목적이 아시아 불교 유적지 시찰은 아니었다. 이 들의 여정은 모쿠라이가 기록한 『항서일책航西日策』, 『양외만필洋外漫筆』에 1년 4개월에 걸친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여정 중, 모쿠라이의 인도 시찰에 대한 감상은 그가 오오즈 테츠넨大洲鉄然 등의 동료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잘 드러난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인도 유람에 대한 불안감과 더운 날씨를 호소했고, 더불어 불교도로서 인도 땅을 처음 밟는 것에 대한 중요성 등을 역설했다. 인도에서 모쿠라이의 가장 큰 목적은 ‘인도 내지에 들어가면 석가모니 유적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인도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석가모니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 같다. 이후의 인도 여정에서는 불교 유적에 대한 모쿠라이의 흥미는 급속도로 감소한다. 뭄바이에서는 인도인의 풍속, 경관, 힌두교 사원, 이슬람교 사원 등은 상세하게 기술하지만, 불교 유적이나 불교 사원은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사진 2. 시마지 모쿠라이가 이쿠다 도쿠노와 함께 쓴 『삼국불교약사』(1890). 

 

『항서일책』 6월 6일조에는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아쇼카왕의 돌기둥을 본 감상을 “아육왕이 세운 돌기둥이 있다. 위에 사자를 조성하고 높이 45장丈이다.” 정도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사르나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아쇼카왕의 돌기둥에 대한 감상 역시 기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붓다가 지나간 파트나Patna는 열차 안에서 “도시가 크다.” 정도만 기술했고, 붓다가야는 그냥 통과했다.

 

물론 당시, 붓다가야를 비롯한 불교 유적지가 발굴되기 전이어서 모쿠라이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낮았다. 이는 정토진종의 승려 입장에서 진종의 본 뿌리를 인도에서 찾기 어려웠고, 일본불교와의 이물감이었을 수도 있고, 찬란했던 인도 불교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서였을 수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모쿠라이가 인도불교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귀국 후 인도불교를 순례한 것을 위대한 업적으로 자평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쿠다 도쿠노生田得能와 함께 쓴 『삼국불교약사三國佛敎略史』(1890)는 인도, 중국, 일본 3국에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불교사의 내용들을 열거한 책이다. 이 중 일본편에서, “모쿠라이가 유럽 시찰 후, 귀국 길에 인도 내지를 역사적으로 유람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861년 다카오카高岳 친왕이 입당 후 인도로 가려고 했던 사실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모쿠라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인도 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 승려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서구 종교에 맞선 교세 확장과 해외 포교 역설

 

해외 종교 시찰을 통해 모쿠라이는 ‘religion’, 종교라는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고, 이 개념을 이용해 불교를 변증해 나갔다. 일본에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교뿐이고, 불교만이 서양의 기독교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양의 문명에 압도당해 서양의 문명은 기독교의 성과이며,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 했다.

 

모쿠라이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일본이 문명화를 지향한다면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쿠라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으로 그는 다시 “유럽의 문명은 종교가 아닌 학술에 근거한다.”라고 번복하고 회피했다. 당시 일본불교는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에 의해 종래의 봉건적 특권을 빼앗기고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모쿠라이는 불교가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판단해 활동의 자유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진 3. 모쿠라이가 동인으로 활동한 잡지 <일본인> 사진. 위키피디아. 

 

모쿠라이는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불교의 세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정토진종의 포교활동을 선택했다. 1876년에 교도직敎導職 안에서 교정敎正이 되고, 1893년 해외선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1905년에는 오우개교총감奧羽開敎總監으로 은퇴할 때까지 정토진종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나아가 일본만이 불교를 포교할 수 있다고 주장 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불교가 황폐해진 인도에서의 경험이 근간이 되었다.  

 

“중국, 조선의 불교는 소문과 냄새만 있을 뿐, 논하기에는 부족하다. 남부불교는 소승으로 대승에 비해 조잡하다. (생략) 일본불교는 금구金甌가 빠지는 것이 없고, 불도와 교리는 대승, 소승, 현밀 그 어느 것과도 비견될 만한 것이 없다. 오래된 수천 권의 경전을 갖춘 불가사의한 호연好緣이라 할 수 있다.” - 『三國佛敎略史』 중에서

 

모쿠라이는 주변 국가들의 불교와 비교해 일본불교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일본불교를 보존·포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모쿠라이의 주장이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은 데에는 그가 인도불교의 현황을 보고 왔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모쿠라이 시각은 이후, 일본불교의 우위성에 순수성을 더한 불교의 정통성은 일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시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유럽 포교에 대해서는 『대승교서점大乘敎西漸의 기운機運』(1892)에서, “유럽에는 스리랑카의 실론섬나 타이의 소승불교만 전해졌고, 대승불교는 일본만이 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기술한다. 흥미로운 점은 모쿠라이가 유럽에 불교를 포교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지만, 불교가 쇠퇴한 인도나 실론섬, 중국으로 불교를 역유입시킬 필요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포교에 대한, 혹은 일본불교의 방향성은 어디까지나 서구를 철저하게 의식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한발 더 나아가 모쿠라이는 『뭐지 이 기회를 타지 않으면何ゾ此機会に乗ゼザル』(1891)에서, “일본불교를 구미 각국에 선교할 호기회에 이르렀다.”며 적극적인 해외 포교를 주장했다. 구미 포교를 통해 유럽과 미국에서 불교가 성행하면, 서구에 심취하는 풍조가 있는 일본인이 서구의 풍조를 따라 해 일본 내에서 불교가 더욱 융성해질 것이라고 기술했다.

 

모쿠라이의 주장은 당시 일본불교가 처한 위기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메이지 20년(1887) 이후 일본 전역에 확산되었다. 다만, 이 시기는 일본 내에서 국수주의 운동이 크게 지지를 받고 있던 시기로 모쿠라이 역시 국수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모쿠라이의 일본불교 우위성이나 해외 포교의 중요성은 그의 국수주의 운동과 연결되어 있고, ‘인도 땅을 밟은 최초의 일본인 승려’라는 그의 위업 역시 이를 위해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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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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