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신화 - 그날의 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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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 / 2013 년 10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8-12 12:21 / 조회6,264회 / 댓글0건본문
올해 12월호까지는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각계 인사들께서 써 주셨던 추모의 글을 모아 독자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추모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각 필자들께서 담아 내 주셨던 추모의 마음을 같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박찬(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지난 10월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동산방화랑’에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젊은 한국화가 김호석의 작품전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그 날의 화엄’. 바로 성철 스님의 법체 운구행렬과 다비식 장면을 시간대별로, 마치 솔개가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한 화면에 그린 것이었다.
전시작품은 단 한 점. 나머지는 밑그림에 불과했다. 작품의 크기는 높이 3m 65cm, 폭 1m 60cm로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다비식 직후부터 그리기 시작, 4년여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그림은 5년 전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그 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림의 윗부분은 해인사 전경과 백련암을 그렸고, 중간부분은 영결식 뒤 스님의 법체를 다비장으로 옮기는 행렬, 아랫부분은 한창 불길이 타오르는 다비 모습이 그려져 있다. 행렬 주변에는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으로 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려져 있다.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의 어깨너머로 행렬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있고, 언론사의 취재진, 떡이나 컵라면을 파는 장사꾼도 있다. 오소리, 담비, 개, 닭 등 동물도 있고 어른들을 따라와 행렬의 앞뒤로 뛰어다니며 노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성철 스님 입적 5주기를 앞둔 시점에 열린 전시회로 전시장 위치도 조계사와 가까워 스님은 물론 수많은 불자, 일반 관람객들로 전시장은 전시 기간 내내 붐볐다.
93년 11월 8일. 그 무렵 신문, 방송 등 전국의 모든 언론 매체는 성철 스님의 입적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때 스포츠 레저 전문지인 <스포츠서울> 문화부에서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던 나도 스포츠지에 어울리지 않게 1면에 보도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문화관련 기사가 스포츠지의 1면에 나가는 경우는 그 이전이나 후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휴가원을 냈다. 해인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런 휴가원에 데스크는 까닭을 묻더니 출장 갈 것을 권했다. 멍텅구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해인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해인사에는 이미 프레스센터가 설치돼 있었고, 각 종합지에서는 특별취재팀을 파견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해인사로 오르는 길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로 꽉 차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올라야 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비구, 비구니 스님은 물론 불자, 구경꾼, 취재진들로 해인사의 경내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해인사는 더 이상 조용한 산사가 아니었다. 온 국민의 눈길이 쏠려 있는 거대한 문화축제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신심 돈독한 불자도 많았지만 단순히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느냐는 둥,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은 뒤에는 다시없을 것이라며 스님의 법력을 찬양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다비를 위해 스님의 법체가 다비장으로 옮겨지는 장면 또한 장관이었다. 법체 뒤를 따라 줄지어 다비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밤새 다비장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밤늦게까지 다비장에 있다가 어디선가 새우잠을 자고 꼭두새벽같이 다시 다비장을 찾는 사람들. 다비장 부근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비닐 따위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
스님은 세상에 처음 얼굴을 보이실 때부터 파격적이었다. 80년대 음울한 5공 군사 독재정권시절,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그 유명한 취임 법어를 내리셨다. 아직도 5·18 광주민주화 항쟁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그때의 어둡고 칙칙한 사회,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스님의 법어는 청량한 바람이었고 동시에 희망이었다. 때때로 중생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법어로 어두운 세상에 광명을 밝혀 주셨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이면서도 한 번도 세간에 나오지 않으셨고, 친견하려는 사람들에게 먼저 삼천배를 할 것을 요구해 속세의 중생에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뒤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사화돼 지면을 장식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스님을 공경하고 한없이 흠모했다.
스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따져 무엇하랴. 스님은 다만 ‘그곳’에 계심으로써 중생을 감화시켰다.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고 불자도 아닌 화가에게 다비식 장면을 그리게 하고, 작가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영화를 만들게 하고…. 다만,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대숲을 지나면 댓잎 부딪쳐 소곤거린다
솔밭을 지나면 솔잎 향기로 소곤거린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
달빛 따라 흐르는데
잔잔히 젖은 목소리
냇가에 나가면 졸졸 물소리로 소곤거린다
들에 나가면 스치는 바람으로 소곤거린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말씀-성철 스님의 법어를 생각하며’ 전문
- <월간 해인> 199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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