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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논쟁 / 기무라 vs. 우이 · 와츠지의 제1차 연기논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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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6-26 14:12  /   조회5,5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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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역자주 : 본 번역은 미야자키 데츠야宮崎哲弥의 『불교논쟁佛敎論爭―‘연기緣起’에서 본질을 묻는다』(ちくま新書[1326], 筑摩書房, 2018.5)의 내용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본서 및 번역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고경』 제74호 「서두」 참조. 

 

제1차 연기논쟁의 해부(상) [2]

 

기무라 불교학의 ‘근대성

[p.98-13. 『불교논쟁』의 페이지- 행수, 이하 동일] 또 기무라는 『원시불교사상론』 「제1편 대강론」의 제3절에서, 범천이나 악마와 같은, 니카야에 빈번히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주체의 실재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다. 범천에 관해서는 ‘헛되이 내실없는 명칭을 동경하는 것은 마치 공상空想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말을 인용해 배척하고, 악마에 관해서는 ‘요컨대 수도의 장애가 되는 것을 당시의 세속신앙에 빗대어 이름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또 같은 책에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 천으로 이루어지는 윤회의 6도에 대하여 ‘요컨대 인간과 축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화적 존재’라고 인정하고 있다.(「사실적세계관」 제4장 6절) 지극히 근대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회설을 긍정하는 색체가 한층 강해진 저작에서 조차, 기무라는 “불타는 당시 세상에 행해지고 있던 세계관을 채용하여 수미산須彌山을 설하고, 남염부주설南閻浮州說을 말하고, 지옥, 귀신을 언급하는 등 역시 어느 정도는 사실문제를 다루었지만, 이것이 곧 불교에 있어서 사실세계에 대한 관찰의 기원이다. 게다가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의 언급은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믿어지는 것에서도 상당히 다수가 나타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들은 그 하나하나에 대하여 어떤 시대 어떤 면에서 행해진 세계관을 채용한 것인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불타시대 전후 어떤 지방에서 행해진 것을 불타는 설명의 편의상 채용한 것임은 의심할 수 없다”라고 신중하게 유보하고 있다(『소승불교사상론小乘佛敎思想論』 대법륜각大法輪閣).

 

이 인용문 앞 단락의 ‘사실문제’라는 것은 가치론에 대해서 사용된 용어로서, 구체적인 ‘사실적 세계의 문제’라는 의미이다. 결코 붓다가 ‘수미산’(세계의 중심에 솟아있는 전설상의 성스런 산)이나 ‘남염부주’(남쪽에 위치한다고 하는 전설상의 대륙), ‘지옥’, ‘귀신’을 실재한다고 믿고, 교리의 중심에 두고 설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 붓다의 목적은 좀 더 보편적인 가치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지만, 널리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사실문제’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인도 각지에 유포되어 있던 세계관을 ‘채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기무라는 논의가 더해 갈수록 우이, 와츠지의 주장에 대항하기 위함인지, 삼세양중설, 나아가서는 윤회설에 대한 태도를 조금 바꾸어, 긍정적인 논조를 앞에 내세우게 된다. 단 거기에서도 붓다에게 있어 “삼세에 걸친 윤회의 양상을 설하는 것이 처음부터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라고 하는 주장에 관한 한, 나도 우이, 와츠지 양씨의 주장에 찬성한다”라고 표명하며(「원시불교에 있어 연기관의 전개 ―(특히 赤沼, 宇井, 和辻 諸敎授의 설을 읽고) ― 상 『원시불교사상론原始佛敎思想論』 더욱이 「원시불교에 있어 연기관의 전개」는 이하 「연기관의 전개」로 약기), 또 “불타는 어디까지나 현실존중주의자로서 해탈도 열반도 ‘현법에 있어 증지證知하고 실현해 나간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후세와 같이 삼세에 걸친 윤회론 자체의 설명에 힘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는 유보를 붙이고 있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연기관의 전개」하 『원시불교사상론』)

 

아카누마 치젠의 ‘전통설

 

[p.101-2] 좀 더 부언하면 제1차 연기논쟁에서 기무라보다도 전통교리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윤회를 전제로 한 연기설을 주장했다고 하는 아카누마조차 윤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윤회에 관해서는 잡니가야雜尼柯耶 15·1-20에 갖가지 기사가 있지만, 모두 다 ‘생사에 시작이 없고 고의 본제本際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고뇌를 통감하는 것에 구원의 과거가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근거가 있고, 또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인생을 믿고, 인생에 대하여 적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회의 무궁함을 말하는 것은 의의가 있지만,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석존의 윤회는 결코 범서梵書 이래의 윤회와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윤회도 정신적인 윤회감인 것과 동시에 지옥과 삼계설도 석존에 있어서는 정신적 의의를 가진 것은 의심할 바 없다”(「아함경강화」 제6장 6절 『原始佛敎之硏究』 所收 法藏館)

 

문장 가운데 니가야는 니카야Nikāya이고, 잡니가야는 상유타 니카야를 가리킨다. 아카누마는 “윤회에 관한 기사는 석존에게도 있었지만, 이것은 실재적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까지 말하고, 결론을 짓고 있다.(赤沼 前揭書)

 

같은 저자의 『불교교리지연구』에 수록된 「불교개론」가운데서도 “불타에 있어서는 그 교설이 일반 민중에 대한 유도의 의미와 그것에 윤회관이라고 할 만한 일종의 인생관의 심미深味를 의미하는 것으로, 범서 이래의 인도전통의 실재적 객관적 사실로서의 윤회의 신앙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업이 미래의 생을 규정하고, 미래의 생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과경적過境的 초경험적 신비적인 의미는 불타에게는 없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문장이 확인 가능하다.(「불교개론」 제1장 4성제 『佛敎敎理之硏究』 法藏館)

 

와츠지는 윤회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와츠지는 어떠한가? 정말로 원시불교는 ‘삼세에 걸친 윤회의 양상’을 적극적으로 설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에는 앞에서 본 스에키 후미히코와 같이 와츠지를 윤회부정론자로서 고정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구절이 보인다.

 

“예를 들면 지옥의 귀신은 인간과 같이 오온소생五蘊所生이거나 혹은 명색이라고 해도 지장은 없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또 그것은 무명의 입장에 있어서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업에 의한 윤회전생은 윤회의 주체인 아我가 현실적인 것과 같이 현실적이며, 아가 없는 것과 같이 무인 것이다. 따라서 무아의 입장에 있어서는 윤회는 없다. 무아의 진리가 체현되면 윤회는 소멸한다.”(「원시불교의 실천철학」 이하 「실천철학」으로 약기. 「제3장 도제 제4절」 『和辻哲郞全集 第5卷』 所收 岩波書店)

 

‘오온소생’이란 오온에 의해 생긴 것이란 정도의 의미이다. 오다니 노부치요小谷信千代는, 와츠지 데츠로의 연기관을 비판하는 논문의 앞부분에서, “‘미혹한 자에게는 윤회가 있고, 미혹을 떠난 자에게는 윤회는 없다’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 즉 석존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사쿠라베 하지메櫻部建의 견해를 인용하여 “연기설을 윤회설과 분리시켜, 윤회설을 석존의 불교로부터 배제하여, 그 영향을 오늘날까지 미치게 한 것은” 와츠지의 「실천철학」이라고 단정하고 있다.(「와츠지박사의 연기설이해를 묻다 ―석존의 윤회설과 연기설―」 『佛敎學セミナー』 제76호) 하지만 이 이해는 옳치 않다. 실로 지금 인용한 이 곳에서, 와츠지는 “미혹한 자에게는 윤회는 있고, 미혹을 떠난 자에게는 윤회는 없다”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철학자인 마츠오 노부아키松尾宣昭는 이 구절을 “기무라가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비평하고 있다(「윤회전생고」(1) 『龍谷大學論集』 第469号). 와츠지는 분명히 세속에 있어서 범부, 미혹한 자의 경험세계에는 윤회는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체현’한 자에게는 윤회는 없다. 이 구절로부터 와츠지가 모순을 제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승의勝義의 무아와 세속世俗의 윤회가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와츠지가 말하는 ‘체현’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 물음은 각각의 무명론을 검토할 때 다시 나타나게 된다. 와츠지는 초기경전에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윤회사상을 “악업으로 인하여 사람은 사후死後 지옥에 태어나며, 혹은 축생으로 태어나며, 혹은 인간인 경우에도 단명短命, 하천下賤, 추악醜惡 등의 응보를 받고, 선업을 닦으면, 사후 천상에 태어나며, 혹은 인간이 된 경우에도 장수長壽, 고귀高貴, 미묘美妙 등의 응보를 받는다고 하는 사상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실천철학」 「제3장 제4절」)

 

기무라 다이켄의 ‘윤회설이 될 수 없는 윤회설’

 

[p.104-7] 그런데 기무라 다이켄이 말하는 업론과 윤회설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제4차원에 속하는 ‘생명의 당체當體’가 ‘성격 지워진 의지意志’로서 존속하고, 그 ‘성격’에 응하여 다시 자기를 창조한다고 하는 것이다. 와츠지에 의해 정리된 기무라의 업보윤회론을 보도록 한다.

 

 

기무라 다이켄

 

 

“여기에서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에 의해 습관화된 성격’, ‘생명이 자기창조를 시도할 때의 내적규정’으로서의 업이지만, 이 업은 ‘그 본질이 창조력을 갖는 의지에 숨겨진 성격에 다름 아닌’ 까닭에 ‘그 자신의 힘에 의해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종전의 경험을 자기에게 흡수시키고 그것을 원동력으로서 나아가는 창조적 진화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살려고 하는 의지 자신이 창조적인 것에 따라서 그 의지에 새겨진 ‘성격’도 또 창조적이며, 변화적이라는 주장을 발견한다.”(和辻, 前揭書)

 

하지만 이것은 기무라의 주장으로, 초기불교의 윤회관, 업론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그것은 앞서 거론했듯이, 악업을 쌓으면 사후 지옥에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사후 천에 태어나는 것과 같이 극히 심플한 것이다. 와츠지는 기무라의 일탈逸脫을 비판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윤회설이 될 수 없는 윤회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불가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앞의 해석에서 ‘붓다에 따르면’이라는 말이 반복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아함의 경전 가운데 그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경전에 나타난 윤회사상은 결코 앞에서와 같이 난해한 것이 아니다.”(방선 인용자, 和辻, 前揭書)

 

와츠지는 기무라와 같이 제4차원(‘the fourth dimension’)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해 윤회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윤회는 범부의 소박한 시좌視座, ‘자연적 입장’에 있어서는 ‘있는’ 것이고, 지옥도 천도 ‘아가 현실적인 것과 같이 현실적이며, 아가 무인 것과 같이 무’인 것이다. 기무라와 와츠지 어느 쪽이 전통적인 업보윤회설에 따르고 있는 것인가? 또 「실천철학」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눈앞의 감각적 대상과 상상의 소산인 신화적 대상과는 5온 혹은 6입에 의해 있는 한에서는 자격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和辻 前揭書)

 

우리들이 상상적으로 경험하는 지옥과 아귀, 천계와 수라와 같은 윤회의 길은, 현실성, 구상성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이 현실’과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연기의 소산인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 현세도 그 지옥도 ‘이 나’에 있어서는 동일한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와츠지가 ‘연기설을 윤회설과 분리시켰다’라고 하는 비평은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와츠지가 배척한 것

 

반복하지만 와츠지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무라 다이켄이 『원시불교사상론』에서 범천이나 악마와 같이 ‘신화적 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윤회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는 “무아 오온 연기의 입장은 자연과학적 인식이 영혼과 타계他界를 배척한 것과 같이 이것들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和辻, 前揭書)라고 명기하고 있다. ‘상식에 아첨해 윤회를 부정하고, 윤리 등만으로 불교를 한정하는 와츠지 데츠로와 같은 근대해석’이라는 재단은 그다지 온당치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中澤中 「『입중론자주』 평석」 『全譯 チャンドラキールティ 入中論』 所收 起心書房) 일부러 말한다면, 예를 들어 무아교설의 의의를 세속윤리로 ‘한정’하려고 한 것은 기무라 쪽이다(후술).

 

 

와츠지 데츠로

 

 

시미즈 도시후미淸水俊史의 『아비달마불교에 있어서 업론의 연구』(대장출판大藏出版)에도, 와츠지가 「실천철학」 가운데 “예를 들어 그것이 경전 속에 설해지고 있다 해도 업보윤회는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라고 하고, 이것이 “업의 사상을 취하는데 충분치 않은 신화 · 미신의 하나다”라고 경시하는 근대불교학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라고 책임을 돌리고 있다. (淸水 「序論」)

 

단지 와츠지는 업보윤회를 그와 같은 형태로 배척하고 있지는 않다. 시미즈가 참조한 곳에서도 분명하게 “우리들은 업에 의한 윤회의 사상이 ‘불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함의 경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분명히 원시불교 속에 수용되고 있다. 우리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 사상이 원시불교의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 내지 그것이 원시불교 특유의 실천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방선 인용자, 「실천철학」 「제3장 도제 제5절」)

 

와츠지에 있어 업보사상이 4제諦와 같은 불교의 근본적 입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신화·미신’의 류로 보고 불교로부터 추방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미즈 만큼 문헌의 치밀한 해독에 장점을 지닌 연구자가 왜 와츠지가 일부러 신경을 써 주의를 촉구한 ‘특유의’라는 유보를 무시했을까 의문스럽다.

 

논리면에서 보더라도 만약 원시불교의 실천사상으로부터 업보윤회를 배제했다고 한다면, 와츠지가 말하는 ‘자연적 입장’의 세계, 범부의 입장에 있어서 세간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면 「실천철학」 초판 간행의 전년까지(1925년, 1926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와츠지가 행한 강의의 초고에 해당하는 『불교윤리사상사』에는 이와 같이 되어 있다.

 

“범부의 입장 즉 자연적 입장에서는 우리들이 있어 세계와 대면하고 있다. 그 세계는 공간적으로 넓어지며 시간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나[我]는 직접적으로 그 세계를 보고 경험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범위까지도 그 세계가 공간과 시간상에서 넓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그 세계는 ‘물질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미추美醜, 쾌고快苦, 선악善惡과 같은 가치의 성질을 띄며, 또 실용적인 의미를 가진 세계이다. 그 속에서 나[我]는 인식하고 느끼며 의욕하고 현실적인 세계를 살아간다.” (「제1편 제1장 무아의 입장」 『和辻哲郞全集 第19卷』 所收) 

 

이러한 ‘자연적 입장’에 섰을 때 윤회와 업보는 ‘현실적인 세계’의 실재에 다름 아니다.

 

“눈앞의 감각적 대상과 공상의 소산인 신화적 대상과는, 무아의 입장에 있어서는 오온소성五蘊所成으로서 동등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에 대한 지옥 혹은 천상은 공상의 소산으로서 살아가는 힘을 갖는 한 현세와 동등한 실재성을 갖는다. 자기의 육체와 영혼, 영혼의 타계로의 유전 등도 동일하다. 단지 이것들이 모두 구극에 있어서는 무명에 조건지워져 있는 것 즉 자연적 입장에 있어서만 성립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무아, 연기의 입장이 있다. 따라서 업에 의한 윤회는 ‘아’가 현실적인 것과 같이 현실적이며, ‘아’가 무근거인 것과 같이 무근거이다”(「제1편제3장 도덕의 근거지움」 前揭書)

 

거듭 말하지만, 그가 배척한 것은 업보윤회 그 자체가 아니라, 기무라 다이켄이 부르짓는 것과 같은 ‘무아의 입장에 있어서 윤회라는 불가해의 해석’(和辻 前揭書)에 한정된 것이었다. 

 

기무라의 ‘무아’관

 

[p.109-4] 기무라 다이켄은 이러한 와츠지의 무아관을 승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앞에서 본 일절은 정말로 ‘기무라가 썼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일까. 기무라의 무아론은 유동성流動性에 중심이 놓여져, 한결같이 고정성에 대한 부정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범부는 그 유동적 무아를 유아라고 이해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기무라의 무아는, 와츠지의 “아가 현실적인 것과 같이 현실적이며, 아가 무인 것과 같이 무이다”라고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윤회와 업의 구동인驅動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무라가 설하는 무아는 오히려 범부의 유아라고 인정될 수 있는 사상일 것이다.

 

기무라의 유아론 긍정의 논조는 『소승불교사상론』, 『대승불교사상론』으로 나아감에 따라 더욱 명료하게 되지만, 『원시불교사상론』의 단계에서도 그 싹은 보인다. 부파의 일부나 대승불교의 유식파 등의 불교내부에 “갖가지 유아론의 주장이 생겨난 것도 또 이상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무명 또는 욕망taņhā을 기초로 하여 생명을 고찰함으로써 앞에서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더욱이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그들의 주장은 너무 기계적인 관찰에 빠진 상좌부의 주장보다도 도리어 불타의 진의眞意에 가까운 것이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2장 「유정론일반」4절)

“이론적으로 불타의 생명관을 살펴 나아가면 마침내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일종의 유아론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木村 前揭書)

 

그 한편에서 기무라는 불타가 무아설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주로 인격적 향상이라는, 말하자면 윤리적, 실천적 이유였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166항 인용문 참조) “상식에 아첨해 윤회를 부정하고, 윤리등 만으로 불교를 한정한다”는 근대해석을 채택했다는 비난이 타당한 사람은 과연 와츠지인가 아니면 기무라인가?

 

상통하는 기무라와 우이의 연기관

 

글을 다시 본래의 방향으로 돌린다. 실제 12지연기의 해석법에 있어서도 기무라와 우이의 차이는 분명치 않고 비슷한 점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2지연기의 ‘관찰觀察’의 과정에 대하여, 노사의 생기에 관한 물음(‘나는 왜 늙고 죽는가’)에서 시작하여, 원인을 더듬어 가 무명이라는 근본 원인에 도달하는 성찰을 기무라는 ‘왕관往觀’이라고 부른다. 이 인과관계가 근본원인으로 거슬러가는 배열이 “노사→생→유→취→애→수→촉→육처→명색→식→행→무명”이다. 우이 하쿠주도 또 이 내관의 과정을 ‘자연적自然的 순서’라고 부르고 있다.

 

 

우이 하쿠츠

 

 

그리고 무명이 근원인根源因인 것을 통찰한 후 다시 무명으로부터 차례로 인과관계를 더듬어 노사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기무라는 ‘환관還觀’, 우이는 ‘역적逆的 순서’라고 부르고 있다. ‘환관’, ‘역적 순서’는 본서에서 지금까지 보아온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로 배열되는 12연기이다.

 

곧 12지연기로 대표되는 지분이 많은 유지연기有支緣起의 교설방식에는 4가지의 패턴이 보인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순관順觀 / 역관逆觀’은 연기지의 생기와 소멸을 나타내고 있다. 뒤의 둘 ‘왕관(자연적 순서) / 환관(역적 순서)’는 연기지가 연접하는 방향성, 즉 귀결로부터 하나하나 근원인으로 인과를 더듬어 가는 방향과 근원인으로부터 귀결로 인과를 순차적으로 더듬어가는 방향을 보이는 것이다. 후자의 두 가지 패턴에 대하여 본서의 “지地의 문文”에서는 왕관, 환관이라는 기무라의 호칭을 채용한다.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는 왕관을 ‘심리과정을 그대로 자연적으로 더듬는’ 경로라 하고, 환관을 ‘앞의 것을 반성하여 논리화 한’ 경로, ‘적어도 전자前者로부터 유도된 표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연기의 고찰 ― idapaccayatā로부터 pratītyasamutpāda로―」 『印度學佛敎學硏究』 第6卷第2号).

 

이것은 매우 알기 쉬운 추정으로, 확실히 최초의 물음은 “무명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왜 노사가 있는가”라는 절박한, 마치 육감肉感을 동반하는 듯한 고에 대한 관점이다. 기무라 다이켄도 “물론 원시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왕관의 쪽으로, 환관의 쪽은 요컨대 그 논리적 귀결에 지나지 않는 것은, 연기에 관한 여러 경문의 교설방식에 비추어 보아도 의심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4절) 왕관에서는 노사의 원인을 찾은 결과, 무명이라는 원흉元凶이 튀어나오는 경로가 그려지고 있다. 이 자연적인 사색의 프로세스에 대한 정리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속에 무명으로부터 설해져서 인과를 순차적으로 더듬어 노사에 이른다는 환관의 배열로 바뀌어, 전장에서 본 『우다나』 등의 초기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환관―순관’, ‘환관―역관’으로 조합된 12지연기가 성립하였다.

 

잊혀진 12지연기의 초발初發 

 

[p.112-10] 하지만 현재 12지연기가 설해지는 대다수의 경우 환관만이 거론된다. 왕관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도 『우다나』, 『대품』 등의 성도成道의 기술에 따른 결과일 것이지만, 거꾸로 예를 들면 연기에 대한 이해가 얕은 불제자인 아난에게 붓다가 ‘조건지워 일어난다’는 것의 진의를 왕관의 수순으로 간절히 가르치는 『대연방편경』 등의 설명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주의해 보지 않는다. 이 경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인가 특정特定한 것을 성립조건[연]으로 하는 것에 의해 늙는 것·죽는 것老死이 있는 것인가’라고 만약 그렇게 질문을 받는다면, 아난이여, ‘(그것은 그와 같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무엇을 성립조건으로 하여 늙는 것·죽는 것이 있는가’ 라고 만약 그와 같이 질문을 받으면, ‘태어나는 것을 성립조건으로서 늙는 것·죽는 것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생성의 유래에 대한 큰 경 ― 대연방편경」 『原始佛典 第二卷 長部經典 II』 春秋社) 

 

환관과 같이 근본원인(12지연기라면 무명)으로부터 순서를 따라 설명해 가는 것이 아니라 “늙는 것, 죽는 것은 왜 있는가” 라는 물음이 기점이 된다. 좀 더 말하면 “왜 우리들은 늙어 빠지는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절실한 실존의 문제로부터 붓다의 내관 성찰이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하여 같은 물음을 반복하면서, 근본원인에 이른다. 이 경은 9지연기를 설하는 것으로, 이하 생(태어나는 것), 생존(유), 집착(취), 갈애(애), 감수(수), 접촉(촉), 명칭과 형태(명색), 식별작용(식)의 여덟 가지 지분에 대해서도 동일한 패턴의 교시가 반복된다. 이것이 ‘왕관―순관’이 조합된 전형적인 예이다. 

더욱이 『상응부경전』 인연상응因緣相應의 제1장에서는 먼저 『우다나』 등과 동일하게 12지연기 각 지분의 생기(순관)와 각 지분의 소멸(역관)이, 환관에 의해 설해진다. 더욱이 특징적인 것에 순관이 분명하게 ‘삿된 도정道程’이라 하고, 역관은 ‘바른 도정’으로 규정된다. 그런 까닭에 이 기술에는 총설적인 의의가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과거의 붓다들 ―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 구류손불俱留孫佛,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 의 성도의 고사로서 이번에는 왕관으로, 12지의 생기(순관)와 12지의 소멸(역관)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최후에 석가 자신, 고타마 붓다 자신의 12지연기에 의한 성도가 과거불과 동일하게 왕관으로 순관, 역관의 연기가 언급되고 있다. 『대석가모니구담大釋迦牟尼瞿曇』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경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있을 때 노사가 있는가. 무엇을 연으로서 노사가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 때 나에게 바른 고찰과 지혜에 의해 분명한 통찰이 생겨났다. ‘생이 있을 때 노사가 있다. 생을 연으로 노사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있을 때 생이 있는가. 무엇을 연으로 생이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 때 나에게 바른 고찰과 지혜에 의해 분명한 통찰이 생겨났다. ‘유(생존)가 있을 때 생이 있다. 유를 연으로서 생이 있다’라고.”(「위대한 석가족의 모니인 고타마 붓다」 『原始佛典II 相應部經典 第2卷』 春秋社) 

 

12연기지의 네 가지 교설방식

 

무명이라는 근본원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연기지의 생기와 멸진을 설하는 ‘순관 or 역관’의 패턴과, 노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무명이라는 근본인에 이르며 무명으로부터 차례로 인연을 더듬어 노사에 이르는 ‘왕관往觀 or 환관還觀’의 조합 패턴을 정리하면, 12지연기 등 지분이 많은 연기의 교설방식은 논리적으로 이하의 4가지 방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a) 왕관―순관(무엇을 연하여 노사가 있는가.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 무엇을 연하여 생이 있는가. 유를 연하여 생이 있다.……) 

(b) 왕관―역관(무엇을 연하여 노사의 멸이 있는가. 생의 멸에 연하여 노사의 멸이 있다. 무엇에 연하여 생의 멸이 있는가. 유의 멸에 연하여 생의 멸이 있다.……) 

(c) 환관―순관(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 

(d) 환관―역관(무명의 멸에 연하여 행의 멸이 있다. 행의 멸에 연하여 식의 멸이 있다. 식의 멸에 연하여 명색의 멸이 있다.……) 

 

사이구사 미츠요시는 왕관의 연기가 거론되지 않은 이유로서, ‘복수의 방향을 일방향으로 한정하는’ 것으로, ‘법’과 ‘법의 법’을 구별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이란 무명과 노사 등의 각 지분의 존재성질이며, ‘법의 법’이란 연기의 법칙 그 자체이다.

 

“각 지의 ‘법’은 각각의 관계를, 그리고 그 서열을, 즉 계열화를 지명하는, 동시에 그 계열은 각 지를 강제하여 위치하도록 한다 ― 이 계열화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 그와 같은 방식으로서 지연기설은 실로 ‘법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연기의 고찰 ―idapaccayatā로부터 pratītyasamutpāda로 ―」 前揭) 

 

‘법’과 ‘법의 법’

 

[p.116-10] 사이구사는 ‘법의 법’과 ‘법’과의 관계를 근대법의 체계에 있어 헌법과 법률의 위치에 비유하고 있다. 헌법은, 예를 들면 민법과 형법과 같은 하위의 법률에 대하여 메타레벨의 위치에 있다. 즉 상위의 지위에 있어서 그 법들을 통제하지만, 헌법도 또 법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계층성이 불교에 있어 ‘법의 법’과 ‘법’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법’과 ‘법의 법’이라는 2계층의 법의 규정은, 와츠지 데츠로에 의해 설해진 ‘2층 의 법’론과 통하는 면이 있다. 이 ‘법’의 계층성에 대해서는 제3장에서 상세히 논한다. 

 

“각 지의 법(A)와 연기의 ‘법의 법’=‘법’(B)와의, A와 B를, 어떻게 구분하면 좋은가”, “그래서 ‘법의 법’이 가능한 한 ‘법’에 접근하지 않도록, 상술의 A와 B를 별도로 kategorisieren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수의 방향을 한 방향으로 한정하는 것이 생각된다.”(三枝 前揭論文)

 

kategorisieren(카테고리지렌)이라는 독일어는 ‘범주화하다’는 뜻. 영어에서는 카테고라이즈categorize이다. 그 범주화의 결과로서, 왕관(자연적 순서)와 환관(역적 순서) 가운데 이론화의 소산인 환관이 선택되어, 나아가 역관보다도 순관이 중시되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경장의 편찬으로부터, 마침내 아비달마불교로의 진행에 보이는 전통적인 합송合誦의 논리화로 규정될 수 있는 방식에 맞춰져, 그 결과로서 왕관과 환관 중 논리화의 소산인 환관이 채택되고, 그리고 동일하게 생관生觀이 놓이게 되었다.”(인용자주: 사이구사가 말하는 ‘생관’은 본서에서의 ‘순관’이다. 三枝 前揭論文) 

 

왕관往觀과 환관還觀의 이동

 

그런데 왕관과 환관은 어디가 다른 것일까? 12지연기를 성찰의 계시적繼時的인 과정으로 간주하고 동시에 그 시간이 내관內觀의 진행에 따르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왕관이야말로 원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환관은 관찰의 결과, 사후事後에 얻어진 이론적인 연기설이라는 것이 된다.

 

왕관과 환관은 시간의 계열적인 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보이지만, 원인―결과, 조건―피조건의 논리적인 인과계열은 동일하다. 왕관에 있어서 예를 들면, “노사는 왜 있는가”, “집착은 어떻게 생기하는가”라는 문제가 먼저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답은 “생을 원인으로 노사가 있다”, “갈애의 생기를 원인으로 집착이 생기한다”는 것으로, 환관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인과의 방향성에 관하여 왕관과 환관은 바로 동일한 것이다. 물론 12지계열을 붓다의 내성內省의 과정으로서 살펴보는 것으로는 왕관의 쪽이 자연적일 것이지만, 논리적인 귀결은 동일하다.

 

단지 반성적으로 정돈되어 기술된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로 끝나는 환관(역적 순서)에서는, 본래 붓다의 구도의 동기이며 동시에 불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노사인 고苦의 초극이라는 중심내용이 희미해진다. 우이 하쿠주도 “12인연과 윤회가 결합하기에 이른 것은 소위 역적 순서의 것이 나온 이후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고 기술하지만(「인연의 해석」 6절), 앞서본 『대연방편경』에서는 윤회를 전제로 하면서 왕관이 설해지고 있다. 단지 동일하게 “생을 원인으로 노사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먼저 “왜 노사의 고는 있는가” 라고 자문自問하고, “태어나 살아있기 때문에 늙는 것, 죽는 것이 있구나”라고 자답自答하는 것과는 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생을 성립조건으로서 노사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에서 생에 대한 위기의식이 다르다.

 

그리고 왕관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것에, 후대 삼세양중설과 같은 윤회로서 설명되는 연기설이 성립할 여지가 생겨났다. 더욱이 미야시타 세이키宮下晴輝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연기의 윤회적 설명이 보이는 것은 순관의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다. 순관은, 고의 원인의 관찰을 주제로 하는 역관의 단순한 논리적 귀결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시간적 인과관계에 의한 설명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연기설연구초기가 남긴 것」 上揭) 

 

즉 개괄하면, 앞에서 나온 패턴의 ‘(b) 왕관―역관’으로부터 ‘(c) 환관―순관’이 나오게 된다. 

더욱이 다케우치 요시노리武內義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종래의 전통적 해석은 이것을 아비달마의 12인연론에 따라 해석한 결과, 이 연기설의 진리를 종교적 자각의 표현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 해석은, 연기설이란 인간의 고뇌가 어떻게 하여 생기는가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소위 ‘삼세양중’의 연기설의 이해에는, 순관의 방식에 중점이 놓여져 근거와 근거지워지는 것과의 사이의 연기지의 관계를 원인·결과의 시간적 생기의 그것이라고 하고 있다.”(「연기설에 있어서 상의성의 문제」『京都大學文學部硏究紀要』 通号4) 

 

기무라에 의한 논쟁정리

 

[p.120-3] 이러한 고찰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기무라와 우이의 연기관은 전통적인 순관, 역관의 구별뿐만 아니라 나아가 왕관의 계열과 환관의 계열을 2분하여 파악하는 점에서 각각 특징적이며 동시에 서로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해석은 최종적으로 순관, 역관의 12지연기설의 이해에도 반영되고 있다. 전장에서도 보았듯 이것을 오로지 일방향적인, 불가역의 시간적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가 혹은 논리적인 인과관계인가, 아니면 공간적인 상의관계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가 라는 것이 큰 논점으로 간주되었다.

 

종래의 일반적인 논평에서는 기무라가 전자의 입장이고, 이것에 대하여 우이가 후자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기무라를 비판하고, 또 와츠지가 이름을 거론해 분명하게 논난하고, 나아가 기무라가 우이, 와츠지를 반박하여 전자의 견해를 더욱 면전에 제시해 논의한다는 것이 일련의 논쟁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원시불교사상론』의 부록으로 기무라 자신에 의한 반론문 「연기관의 전개」의 「상上 · 근시近時의 연기관과 그 득실」에 제시된 논쟁에 대한 정리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무라의 「사실적 세계관」과 우이의 「인연의 해석」의 단계에서, 이 주제가 분명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2지의 대부분은‘동시적 의존관계’ 

 

기무라는 노사를 출발점으로 하는 『대연방편경』에 의거하여, 왕관의 순서로 12개의 지분 해석을 하나하나 나타내 보인다. 단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경의 팔리어 원전에서 설해지는 것은 9지연기이며, “무명, 행의 2지가 없고, 6입이 촉에 포섭되어 있다.” 무명과 행의 2지가 없고, 6처가 촉에 흡수되어 있다. 그래서 기무라는 12의 지분이 완비된 한역 중아함경의 『대인경大因經』에 의지해 해석을 진행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1) 노사jarā-maraņa,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것은 무엇에 의해 그러한가. 이것이 곧 관찰의 출발점이다. (2) 생jāti, 우리들에게 노사 등의 고뇌가 있는 것은 곧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뇌도 우비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곧 노사의 조건으로서 다음에 생이 오는 이유이다.

 

그러면 어떠한 까닭에 우리들에게 태어난다는 것이 있는가. 여기에서 곧 진정한 연기적 관찰이 시작된다. … 단순히 이것만으로는 요컨대 단지 현실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생사가 무궁한가를 분명히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인식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있다고 하는 불타의 근본정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더욱 근본적으로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 곧 (11)(12) 행saņkhāra과 무명avijjā이다. 곧 무엇에 의존하여 식은 그 인식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면, 요컨대 그 근저에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식은 말하자면 의지의 목적을 수행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식과 행과의 관계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드러난 입장에서 보면 신구의身口意로 활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며, 감춰진 입장에서 보면 의지의 성격으로서의 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최종적으로 이 의지의 근본소의根本所依를 찾아 도달한 것은 곧 무명이다. 즉 우리들에게 생명활동이 있는 것은 근저에서 무시이래 맹목의지가 있어 그렇게 시킨 것이라고 귀결된 것이 최종의 연기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5절) 

 

이와 같이 설명한 뒤에 기무라는 총론적으로 다음의 일절을 덧붙이고 있다.

 

“12인연은, 요컨대 무명의 근본의욕을 기초로 하여, 식, 명색의 인식관계로부터 애를 일으키는데 이르는 심리적 경과를 분명히 하고, 그럼으로써 욕의 창조적 결과로서의 유에 결부시키려는 고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2연기는 반드시 시간적 순서를 따르는 고찰이 아닌 것을 우리들은 거듭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대부분은 동시적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즉 유정의 조직 및 활동의 관계를 다양한 입장에서 관찰하여, 주요소와 종속요소가 차례로 관련된 결과가 곧 12지로 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木村 前揭書)

 

여기에서 기무라는 12지연기의 각 지분의 배열은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은 동시에 상호를 규정하는 의존관계를 나타낸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이의 전면적 상의설

 

[p.123-8] 한편 우이는 오늘날 차연성(此緣性, idapaccayatā)으로 표현되는 것을 ‘상의성’으로 번역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 지는 조건인 동시에 피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지는 이 점에서 상호 예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상관적相關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조건과 피조건의 관계가 자유롭게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 지는 하위의 지에 대하여 항상 조건으로 피조건이 되는 일은 없고, 상위의 지에 대하여 피조건일 뿐 조건인 일은 없다.”(방선 인용자, 「인연의 해석」) 

 

우이는 이 인용부분 바로 다음에, 니카야에 있어 ‘식⇔명색’ 등 상호의존이 설해지는 예를 거론하면서도 “결코 조건인 경우가 그대로 동일 사정 하에서 동시에 피조건이 되고 있다고 혼합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장에서 인용한 「원시불교자료론」(『印度哲學硏究 第二』 所收 岩波書店)의 9절에 보이는 설명인 “(이다파차야타의) 그 의미는 갑은 이 을에 의존하고, 을은 또 이 갑에 의존하는 곧 상호간에 상의하는 것이 되는 까닭에 상의성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前揭書)라는 것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아가 우이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12지연기의 지분의) 하나하나는 결코 시간적으로 인과의 관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논리적이며 더욱이 상호간 상의적相依的인 것을 예상하고 있는 관계에서 열거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것인가 하나가 불변적인 중심실체인 것이 아니라 갑은 을에 의존하고 을은 갑을 도우며 서로 상의하여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숫자상으로는 통례 열둘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은 이 중에 포함되고 나머지는 없는 까닭에, 일체의 것의 관계는 결코 각자 독존고립이 아니라 상의상자相依相資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이 의미를 연기라고 하고, 이 설을 연기설이라 칭한다.”(「원시불교자료론」 前揭) 

 

어느 쪽이 우이가 생각하는 진짜의 것인지 이 인용개소를 보는 것만으로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단순히 12지연기를 동시생기로, 또 동시에 쌍방향의 관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은 알 수 있다. 단지 동시에 우이가 12지연기의 관계를 비시간적인 조건―피조건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12지연기의 하나하나는 결코 원인결과의 관계 순서로 설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건과 귀결의 관계를 따라서 열거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적절하게 말하면, 각 지는 상관적 상의적인 관계에 있는 것을 조건에 따라 순서를 세워 거론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고 있다(「인연의 해석」 4절). 나아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는 까닭에 저것이 생긴다”는 차연성의 공식을 “이 관계가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인연의 해석」 6절)라고 일반화한 뒤에 다음과 같이도 말하고 있다. 

 

“모두가 현재를 입장으로서 모두가 거기에 나타나는 것도 상의상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거기에서 소멸하는 것도 또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가 현재 성립존재하고 있는 것은 상의상관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12지 가운데 행도 유도 모두 소위 세계 또는 인생이라는 모두를 포함하여 나타내며, 또 명색이나 명색과 식도 그 모두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12지에 대하여 모두가 상의상관이라고 하면, 세계는 모두 상의상관의 관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宇井 前揭書) 

 

우이의 12지연기론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12의 지분의 연접은 시간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논리적 인과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2) 12지연기의 양단 즉 무명과 노사를 제외하면 다른 연기지는 모두 하위의 지분에 대하여 생기의 조건이며, 동시에 상위의 지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조건으로서 생기한 결과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명색은 식이라는 조건에 의해 생기하는 피조건의 지분이지만(식→명색), 동시에 6처의 성립 조건으로서의 지분이기도 하다(명색→6처). 

(3) 단 이것은 시간적 변화 속에 현상하는 시간적 인과가 아니라, 논리적, 동시적인 인과이며, 각각의 지분은 모두 현재에 동시로 있고, 또 그런 까닭에 일거에 전체를 나타낸다. 

(4) 따라서 부분을 보면, 상위의 지분과 하위의 지분은 조건―피조건의 관계에 있고, 피조건이 조건이 되는 상의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우이의 연기관은 ‘중국 화엄철학’적

 

[p.126-11] 우이는 더욱 나아가 “근본불교에서는 우리들 신심身心의 것을 세계라고도 우주라고도 인생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이 신심이 행, 유, 명색 또는 명색식 어느 곳에도 다 포함된다”라고 까지 말한다. 그래서 “세계는 완전히 식의 통일 하에 상의성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12인연의 뜻은 세계의 상의를 분명히 하는 것에 있는 까닭에, 나는 12인연설을 상의설이라고도 칭한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前揭書).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는 이와 같은 연기 이해를 초기불교의 그것이 아니라 “중국화엄철학의 ‘시시무애時時無碍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연기에 대하여 ― 나의 여래장 사상 비판」 『駒澤大學佛敎學部論集』 第17号) 

다케우치 요시노리도 동일하게 ‘후세의 화엄철학의 방식과 같은 것’을 예상하고 있다(「연기설에 있어 상의성의 문제」 上揭). 또 이것은 아카누마 치젠과 후나하시 잇사이가 주창한 “일체법인연생의 연기”설(제1장, 제4장을 참 조)과 아비달마불교의 4연설 가운데 ‘증상연增上緣’과도 가깝다. ‘증상연’이란 간단히 말하면 “모든 현상과 행위는 전세계, 전우주의 일체의 연이 간접적으로 관련하여 성립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우이가 12지연기를 상의상관의 관계로 해석한 것을 와츠지 데츠로는 인정하고 있고, 동시에 그것을 너무 앞서간 이해라고 비판하고 있는 사실이다. 와츠지의 우이설 비판은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보지만, 와츠지는 연기지를 법으로 파악해 12지연기를 계시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각 지분의, 와츠지식으로 말하면 그 법과 법의 논리적 조건의 관계로 간주한다. 여기까지는 우이설과 거의 같지만, 우이나 기무라와 같이 동시적 상의관계로는 보지 않는다. 따라서 특히 와츠지와 우이의 입장을 정말로 일괄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근년의 논평 대다수가 이 차이를 잘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노리는 과연 정확精確한 독해를 보이고 있다.

 

“원시불교의 연기설에서, 연기지 상호의 관계가 일방적인 기초에 의거한 계열인지 혹은 상호매개적인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있었던 것으로, 일방적 기초라고 생각한 것은 와츠지 데츠로설이며, 상호매개론은 우이 하쿠주의 설이 대표적이다. 와츠지설에 의하면, 연기지의 관계가 만약 완전히 상호적이라고 한다면, 근거가 되는 계열에 연기지 전체를 질서지우는 것도 본래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에 대하여 우이설은, 원시불교의 연기에서는 각각의 연기지가 자기 속에서 전계열을 반영하며, 소위 세계나 모나드와 같이 상호 반영하는 관계에 있게 된다. 그 결과 연기지 A와 B 사이에 예정조화에 기초한 상호융입相互融入의 관계가 성립한다. 요컨대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는 화엄철학의 상호매개를 ―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면서 ― 원시불교 연기설의 상의성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우이설의 특색이다.”(上山春平, 梶山雄一編 『佛敎の思想 ― その原形をさぐる』 中公新書)

 

글 속의 ‘모나드’라는 것은 라이프니치의 모나드론에 유래하는 비유일 것이다(“모나드는 세계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또 ‘상호매개적’이라는 용어는 본서에서 말하는 ‘상의적’, ‘상의상관적’과 동일한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두지만, 다케우치도, 마츠모토 시로와 동일하게, 우이 학설의 배경에 대승의 화엄철학의 영향을 추론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기무라와 우이의 대립점이 12지연기의 윤회적 해석, 삼세양중설의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12지연기의 흐름이 일방향적인지 쌍방향 혹은 동시적인 것인지 또 시간적 인과관계인지 공간적 상관관계인지의 파악의 차이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은 대체로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포되고 있던 ‘쟁점’은 피상적인 독해에 의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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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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