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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불교 ] 의천과 차 그리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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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5:40  /   조회1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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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철학박사 

 

고려시대 승원과 수행승들은 차 문화를 이끈 주체로, 승려는 점다點茶의 기예나 품천品泉 등, 다사茶事 전반에 일가견을 가진 전문가였다. 고려 차 문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다시茶詩에도 차 다루는 스님들의 솜씨나 물을 감별하는 탁월한 안목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덕연원에서 머물며 화답하다[和宿德淵院]」에서 “늙은 스님 일도 많구려/ 차를 평하다가 다시 물을 평하려니[老衲渾多事 評茶復品泉]”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의 차 문화는 왕실 귀족과 수행승, 관료문인들이 꽃피운 문화였다. 그런데도 승려들이 차를 즐긴 정취나 승원의 풍모, 차가 수행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흔한 것은 아닌데, 승려의 시나 『고려사』, 같은 사료가 남아 있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자료의 한계는 분명하여 편린片鱗처럼 흩어진 자료를 엮어 이들이 구현했던 차 문화의 단면을 밝힐 수 있다.

 

수행의 여가에 차를 즐긴 정취를 시로 남긴 인물 중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사진 1),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천인(天因, 1205~1248),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 普愚, 1301-1382),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 등이 있는데,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인물은 충지로, 14수의 다시茶詩를 남겼고, 혜심도 9수首 정도의 다시茶詩를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의천과 혜근이 각각 4수首씩 차와 관련된 기록을 남겼으며, 몇몇 승려들도 각각 1수首 정도의 시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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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대각국사 진영. 선암사 박물관 소장

 

 

그런데 이들이 남긴 차에 대한 담론은 대개 11-14세기로 편중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차품의 질적 수준이나 다구茶具의 발달에 있어 완성미를 갖춘 시기였다는 점이다. 특히 고려적인 색채를 완성, 그 문화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때와도 맞물려 있다. 특히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때에는 이미 송대 문화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팽배해 있었는데, 이런 정황은 『고려사』 1058년 8월 기사에 “고려 왕이 탐라와 영암에서 목재를 베어 큰 배를 만들고 장차 송과 통하려 하였다. 그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문물과 예악이 흥성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상인들의 배가 연 이어져 진귀한 보물들이 날마다 이르니, 중국에서 실로 얻을 것이 없습니다[我國文物禮樂興行已久, 商舶絡繹, 珍寶日至, 其於中國, 實無所資].”고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사』 1091년 6월 기사에는 송 철종哲宗이 고려 사신 이자의李資義 등에게 고려에 선본善本 책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책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고려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차 문화의 성쇠는 불교와 그 축을 함께하며 고려 색을 띤 독특한 문화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불교계가 왕과 종파 간의 친소親疎에 따라 교세가 영락하였다 하더라도 승원의 막강한 경제력과 왕실의 후원, 차를 주도했던 승려들의 수준 높은 차의 안목은 11-13세기 고려 차 문화를 꽃피운 동원動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11세기 인물 의천이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은 그가 고려 불교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중요하게 다뤄야 할 자료라고 생각한다. 『대각국사문집』에 차와 관련된 것은 다시茶詩 3수와 표表 1편이 남아 있어 그의 차 세계뿐 아니라 승원의 다풍茶風, 송과의 문물 교류 등을 규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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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영통사 대각국사비

 

 

의천은 문종의 4남으로 왕족이었다. 그가 영통사 경덕국사 난원(爛圓, 999-1066)에 출가한 것은 11세 때이다. 교학 연구에 치중했던 그는 불교 전반에 높은 식견을 갖췄고, 노장老莊이나 유가에도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엄이 교학의 중심이라 여겼던 그는 의상뿐 아니라 원효가 주창했던 불교를 재평가했고, 특히 신라 화엄종의 전통을 다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1085년 4월, 송으로 구법을 떠나고자 했지만, 부왕 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형제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이 즉위한 후에도 재차 요청했지만 관철되지 않아 몰래 문도 2인을 데리고 송나라 상인 임녕林寧의 배를 따라갔다가 1086년 고려로 돌아온 사실이 『고려사』에서 확인된다. 당시 송 황제는 그를 극진하게 환대했다. 『고려사』에 그 정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6월 승려 왕후(王煦, 의천)가 송나라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왕후가 송에 도착하자 송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으로 불러 접견했는데, 손님의 예로 대우하고 은총을 두텁게 내렸다. 왕후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법을 묻기를 청하자, 조서를 내려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이에) 오吳 지역 안에 있는 여러 절에 도착하니 모두 맞이하고 전별하기를 왕이 보낸 신하[王臣]에 대한 예禮와 같이 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나라로 돌아오게 해줄 것을 간청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후(의천)가 예성강禮成江에 도착하자 왕이 태후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로 나아가 기다렸다. 맞이하여 인도하는 의례의 성대함은 이전과 비교할만한 것이 없었다. 왕후(의천)가 불경[釋典]과 경서經書 1,000권을 헌상하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주청하여 설치하였으며, 요遼·송·일본日本에서 서적을 산 것이 많기가 4,000권에 이르렀는데, 모두 다 간행하였다[六月. 釋煦還自宋. 初, 煦至宋, 帝引見于垂拱殿, 待以客禮, 寵數渥縟. 煦請遊方問法, 詔以主客員外郞楊傑爲館伴. 至吳中諸寺, 皆迎餞如王臣禮. 王上表, 乞令還國. 詔許東還. 煦至禮成江, 王奉太后, 出奉恩寺以待. 其迎迓導儀之盛, 前古無比. 煦獻釋典及經書一千卷, 又於興王寺奏置敎藏都監, 購書於遼宋日本, 多至四千卷, 悉皆刊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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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고려시대의 단차를 격불하는 모습

 

 

위 내용은 의천이 송 황제에게 얼마나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송으로부터 가져온 불경과 경서류를 가져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수많은 서적을 간행한 사실도 드러난다. 당시 송 황제는 철종(哲宗, 재위1085-1099)으로, 의천을 수행하는 관리까지 동행 시켜 구법 노정에 불편을 최소화해 주었다. 당시 오吳 지방의 여러 절을 순방할 때 이곳 승려들이 극진한 예로 맞이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농서학사이억임천사시견증인차운화수隴西學士以憶臨川寺詩見贈 因次韻和酬」에 잘 드러나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향사 한 구역을 원람이라 부르니 一區香社號鴛藍

맑고 고요한 산문으로 가는 길, 푸른 산과 마주했네. 門徑淸虛對碧岡.

구름서린 울창한 숲 전각을 둘러싸고 密樹貯雲籠象殿

달빛 어린 얇은 장막, 불좌를 호위하네.  薄帷和月護猊床.

소나무 난간에서 강경 마친 뒤 시 읊느라 고심하고 講廻松檻吟魂苦

다원에서 차 덖기 마치자 타던 속이 시원해지네. 焙了茶園渴肺凉.

불법 배우려던 소원 이뤄 산승이 되었지만 掛錫已酬爲學志

꿈속에선 고향으로 돌아가 옛집을 서성이네. 故山還夢舊棲堂.

 

이 시는 의천이 중국에서 법을 구하던 가람의 소슬한 풍경을 그렸고, 당시 공부를 마친 후의 일상을 생생하게 노래하고 있다. 특히 도당구법승의 수행 일상이 강경과 시 짓기, 그리고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일과 다원에서 차를 만드는 일도 수행승의 일상이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그러므로 고려의 도송渡宋 구법승들은 송의 차에 대한 신정보를 선점했고, 이를 고려에 소개한 그룹이었으니 이는 고려 차 문화가 송에 비견될 정도로 발전을 구가했던 배경이다. 한편 그가 남긴 「사사다약표謝賜茶藥表」는 송 황제가 차와 약을 보낸 것에 감사를 표하여 올린 글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금월 13일 중국 사신이 와서 칙지를 전달할 때, 삼가 자상하신 성은을 입어 특별히 어차 12각과 약 1은합을 하사받았습니다. 황송하게도 몸소 특별히 보살핌을 내리시어 고급 차와 약으로 총애를 보이셨습니다[臣僧某言. 今月13日, 中使至奉傳勅旨, 伏蒙聖慈, 特賜御茶二十角, 藥一銀合者. 無晃凝旒, 特紆於睿眷, 嫩芽靈藥, 優示於寵賜].”

 

윗글은 송 황제가 보낸 차와 약을 받고 감사를 표한 글이다. 그에게 차와 약을 보낸 송 황제는 철종哲宗이었다. 그가 1085년에 도송渡宋하여 구법求法할 때, 송 황제 철종이 그에게 보인 극진한 예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송 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면서까지 특별히 의천을 위해 황제용 차와 약을 보냈다는 사실은, 고려와 송의 교류에 의천이 미친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송 황제가 보낸 어차御茶란 무엇일까. 10세기 북송에서는 어원이 확장되어 더욱더 극품의 차가 생산되었는데, 특히 채양(蔡襄, 1012-1067)이 소용단小龍團을 완성한 후, 더욱 세련된 용봉승설龍鳳勝雪, 어원옥아御苑玉芽 같은 최상품 단차류가 생산되던 시기이다. 황제가 보낸 어차御茶는 이런 종류의 차였을 것이다. 

 

아무튼 의천의 다시茶詩 「화인사차和人謝茶」에는 “달빛을 끓여 다화를 피워 속된 시름 씻어낸다[煮花烹月洗塵愁].”고 나온다. 여기에서 ‘다화를 피워[煮花]’라고 한 것은 바로 가루차를 격불하면(사진 3) 마치 차 거품이 꽃처럼 핀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달빛을 끓여[烹月]”라는 말은 샘물에 비친 달을 물과 함께 떠다가 찻물을 끓인다는 말이다. 

 

차를 즐기는 이의 격조를 나타낸 것으로, 그의 고상한 감상안이나 예술적인 감수성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차를 마신 후, 차의 효능을 담론한 것은 바로 “몸이 가뿐하여 삼통三洞에 노니는 것보다 낫고, 뼛골이 상쾌하여 갑자기 가을에 접어든 듯[身輕不後遊三洞, 骨爽俄驚入九秋]”하다는 것이다. 이는 차의 가치와 차를 마시는 연유를 극명하게 공감한 구절이라 하겠다. 수행승이나 문인이 차를 곁에 둔 연유도 이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려와 송의 교류를 왕성하게 이끌었던 의천, 그는 결국 수행자였다. 그의 다시茶詩에 장식을 배제한 담박한 차의 세계가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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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동국대 일반대학원 선문화 전공, 철학박사.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초의선 사로부터 이어진 제다법 전승. 현 (사)동 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전통문 화대학교 겸임교수. 성균관대·동국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 『초의선사의 차 문화연구』 등 7권의 저술이 있다. ‘초의 선사와 경화사족들의 교유에 대한 연구’ 및 ‘한국 차 문화’ 전반을 연구하며, 순천 대광사지에서 ‘동춘차’를 만든다. 한국차 문화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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