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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별어]
과연 누가 7조(七祖)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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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3 년 8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2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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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전』은 혜능-마조선사로 이어지는 조계종의 원류를 밝힌 최초의 전등록이다. 전등록의 고형(古形)인 동시에 원형인 까닭에 그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의 안팎과 주변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서 동시에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연재물로 ‘보림별어’가 기획되었다. - 편집자

 

7조는 지금도 출현하고 있다

 

소설가 박상륭(1940~)은 『칠조어론(七祖語論)』(1990~1994 발간. 전4권)이란 도발적인 제목의 소설을 썼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두고서 “당대에는 가장 고독하고 후대에는 가장 오랫동안 무덤에서 불려나올 작가”라고 평하고 있다. 작가의 마니아들은 일찍부터 그를 ‘7조’라고 불러왔다. 그의 글이 성취한 우주적 사유와 빼어난 모국어 그리고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경외심이 그 별칭 속에 담겨있다고 하겠다. 이미 ‘6조’에서 힌트를 얻어 『죽음의 한 연구』라는 작품을 남긴 터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칠조어론』은 스스로 7조라는 작가의 욕망을 스스로 투영한 제목이라 할 것이다.

 

6조는 의발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따라서 누구나 7조를 꿈꾸었다. 다시 말하면 7조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말이다. 6조 열반 이후 1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7조를 자청하는 작가의 등장은 그런 점에서 가장 ‘현대적 7조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수많은 7조의 탄생

 

그렇다면 최초의 7조는 과연 누구인가? 최초의 7조가 있기 위해선 마땅히 최초의 6조가 있어야 한다. 문헌상 최초의 6조는 법여(法如) 선사이다. 법여 선사는 숭산을 달마계 선종의 근본도량으로 만든 개척자이다. 그의 행장비(行狀碑)는 “달마-혜가-찬 선사-도신-홍인-법여”라는 선종법계의 최초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최초 6조는 법여가 된다. 따라서 이 법맥에 의거하면 최초 7조는‘원규’이다. 이른바 소림사 법계 제7조라고 하겠다.

 

신수 대사 비문에는 그 계보가 “달마……홍인-신수”로 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수가 6조가 된다. 이옹(李邕)이 쓴 <대조보적선사비>에는 “홍인은 대통신수에게 법을 전했으며, 대통은 나(보적)에게 전해서 지금 7조가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보적은 홍인-신수로 이어지는 7조임을 자처했다.

 

돈황본 『단경』은 “……홍인-혜능-신회” 법맥을 나열했다. 따라서 신회가 7조가 된다. 하택신회가 활대(滑臺, 하남성) 선언을 통해 “신수계의 북종은 방계, 달마의 남종정법은 6조 혜능이다”라고 외친 혜능 헌창운동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있겠지만 결국 스스로를 7조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은 신수를 6조에서 끌어내리고 혜능을 6조로 만들었으며, 그 와중에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부담까지 향수전(香水錢)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해결한 대(大) 사판승이기도 했다. 일군의 학자들은 『육조단경』의 실질적인 편집자는 법해가 아니라 신회 일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혜능을 6조로 만든 최대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사후까지 7조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결국 마조 제자들에 의해 ‘지해(知解, 잔머리)종사’ 내지는 ‘요설(饒舌, 현란한 언설) 사미’로 폄하되면서 그들은 남악회양을 7조의 자리에 모셨다. 특히 권덕여(權德如)가 찬(撰)한 <도일선사탑명(塔銘)>에는 “……혜능-회양-마조”법맥을 명문화하면서 이를 천하에 공포했다. 『보림전』은 이를 따르고 있다.

 

무거운 절보다는 가벼운 승(僧)이 떠나다

 

지역적으로 기반을 달리하는 남종과 북종의 다툼은 이론적으로 돈점(頓漸)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그 갈등의 와중에서 꼴 보기 싫은 것들끼리 서로 정통이라며 다툴 때 아예 딴살림을 차려 나가는 것이 번뇌 줄이는 방법이라는 한 무리의 수행자들이 있었다. 무거운 절을 떠나라고 하느니 차라리 가벼운 스님들이 떠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입장을 견지한 까닭이다. 그들은 갈등의 시작점인 ‘5조 홍인’이 아니라, 뿌리를 아예 4조 도신으로 옮겼다. 활동무대는 강소성 우두산이었다. 이것이 도신-우두법융-지암-혜방-법지-지위-혜충으로 이어지는 우두종(牛頭宗)이다. 우두종의 안국현정(安國玄挺) 선사는 “나는 남종도 북종도 아니며, 오직 마음을 근본으로 합니다.”라는 ‘중도 정치적인’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남종과 북종의 정통성 다툼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예 5조 홍인 이전의 우두 선사에게 법맥을 댈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대변한 것이다.

 


중국 오조사 일주문. 오른쪽이 혜능의 게송이고 왼쪽에는 신수의 게송이 걸려 있다. 

 

더불어 사천성을 중심으로 활약한 보당종(保唐宗)은 5조 홍인의 제자인 점은 같지만 다른 파(派)와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은 홍인-지선-처적-무상-무주 법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따라서 6조는 지선이며 7조는 처적이 된다. 더불어 유심히 살펴야 할 부분은 보당종 8조 정중무상 선사이다. 마조는 본래 무상과 법형제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마조 역시 결국 남종의 8조가 되었다. 무상은 알다시피 신라 왕자출신이다. 이는 뒷날 도의 선사를 비롯한 많은 신라스님들이 마조문하에서 수행하는 원인(遠因)이 된다. 구산선문은 법연과 지연의 합작품인 셈이다.

 

7조는 만들어지는 자리이다

 

여러 명의 7조가 선종사에 등장하지만 하택신회와 남악회양의 7조 교체과정은 참으로 혁명적이다. 그렇게 7조 자리를 원했던 신회는 결국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어쩌면 신수를 6조 자리에서 끌어내린 과보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남악회양은 영원히 7조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신회가 이 광경을 보고서 “이건 환부역조(換父易祖)야!”라고 아무리 외쳐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리매김은 후학들의 몫인 까닭이다. 마조의 제자들은 그를 가차 없이 7조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남악회향을 7조로 모셨다. 스승 마조에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는 한 수를 가르쳐 준 공덕은 이렇게 큰 것이다. 현재 남악형산에는 마경대(磨鏡台)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혜안(慧安, 587~709) 노사와의 ‘여하시조사서래(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문답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최초로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7조 교체 과정은 두 사람 사후의 일이다. 회양의 감사 인사와 신회의 반론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일본속담은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반군(反軍)”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7조는 현재 내가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후대에 남들이 만들어 주는 자리라는 사실이다. 내가 7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자리도 아니요, 7조가 되기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이것이 7조가 지닌 운명의 아이러니다. 7조는 6조가 물려주는 자리가 아니라, 7조를 만드는 것은 8조라는 사실을 선종사(禪宗史)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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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원철 스님은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그리고 일간지와 교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써 주변과 소통해왔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있네』등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번역서에는『선림승보전』상·하가 있으며, 초역을 마친『보림전』의 교열 및 윤문작업 중이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강주)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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