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을 회상하는 자리이니 내가 큰스님 시자를 맡은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나는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이름만의 시자’라 표현합니다. 1973년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방장이셨을 때입니다. 결제하기 전 대중 스님들이 맡을 소임을 정하는 데 내가 방장 스님 시자 소임을 자원했습니다.
당시 방장 스님은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보름마다 한 번씩 큰절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방장시자라 해도 별로 할 일이 없었지요. 스님께서 내려오실 때 방장실 청소하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만 시자’라 하는 겁니다. 내 딴에는 그래도 시자니까 그 핑계를 대고 방장 스님 곁에서 묻고 싶은 것 참 많이 물었습니다.
<신심명> <증도가>는 다 외었습니다. 당신께서 소참법문으로 자상히 강설하셨기에 그 때는 줄줄 외었는데 지금은 잊은 대목도 많아요. 그 당시에는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큰스님께 물었고 큰스님께서는 자상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방장 스님은 처음 뵈면 무섭습니다. 그래도 의문 나는 점을 물으면 대답해 주실 때는 온화한 모습으로 세밀히 알아듣기 쉽도록 말씀해 주셨지요.
큰스님 가르침 받고 싶어 결제 중 ‘이름만 시자’ 자청
언뜻 무서운 것 같지만 공부인에겐 온화하고 자상
한번은 되게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선방에 앉아 있으면서 망상 피우지 않으면 조는 것이니 저는 선방에 있는 게 안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스님께 했지요. 그랬더니 ‘이놈아 자석, 때려 죽여버릴끼다’ 하셨지요. 그런 벼락이 없었지요.
큰스님 곁에서 교학이나 선어록 등 모르는 게 있을 때는 언제나 물었습니다. 큰스님의 보조스님 비판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었습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한 놈을 키워도 사자새끼 키우지 피라미 키우지는 않는다’고 하셨지요. 해인사 두 철을 지내면서 내 공부에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선방에 있을 때도 항상 조용히 있었습니다. 공부가 잘 되지 않고 잡념이 일면 중봉 석불에 나 혼자 포행을 갔다 오기도 하고 백련암에 갈 때도 혼자서 갔습니다. 방장 스님께 의문 나는 점을 물으러 가는데 옆에 누구랑 같이 가면 내가 묻고 싶은 걸 제대로 묻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당시 큰스님께 참 많이 묻고 공부에 도움 되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방장 스님은 언뜻 보기에는 무서운 분이시지만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이 온화하고 자상하셨습니다.”
1963년 입산하여 선(禪) 교(敎) 율(律)을 두루 익혀 종단의 큰 어른으로 지금은 영축총림 통도사 율주인 혜남(慧南)스님. 스님을 뵈러 통도사 취운암에 가는 날. 가을 하늘은 드높이, 구름 한 점 없어 청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혜남스님은 “출가할 때는 수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律)은 부처님의 행(行)이다.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다. 출가수행자는 참선.교학만이 아니라 계율을 청정히 지니는 지계청정(持戒淸淨)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행이 흐트러지면 교학도 선정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한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스님께서는 해인총림에 가기 전에 제방에서 수선(修禪) 안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범어사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방에 갈 마음을 먹었지요. 당대 선지식이신 경봉.전강.향곡 그리고 성철 큰스님 회상에서 살아보려고 작심했습니다. 3대 관음성지 5대 적멸보궁에서 기도했습니다. 선지식 만나게 해 달라고. 그러고 나서 당대 선지식 회상에서 정진했지요.
향곡스님이 계시는 월내(月內) 묘관음사, 전강스님 회상인 인천 용화사, 경봉스님 계시는 통도사 극락암을 거쳐 해인총림에 갔습니다. 다른 회상에서는 큰스님 시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인총림에서는 큰스님 시봉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어 그리 하였는지는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굳이 말하자면 ‘좀 더 큰스님 곁에서, 좀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어서’였다고나 할까요. 성철 큰스님은 제게는 은사 스님도 아니시고 또 제가 백련암에 살지도 않았지만 큰절에서 ‘방장시자’로 자청하여 지낸 그 시절, 저는 많은 깨우침을 방장 스님으로부터 얻었습니다.”
교를 통한 성도가 ‘漸修’라면
선은 몰록 깨닫는 ‘頓修’…
교학 소홀히 하지 않으셨어요
- 스님께서는 수좌시절 이후 해인총림 강주로서도 해인총림과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1991~1992년 해인총림 강주로 있었지요. 그때 나는 방장 스님의 또 다른 풍도(風度)를 느꼈습니다. 선방 스님과 강원 학인 간 불협화음이 일었을 때입니다.
그때 방장 스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강원이 잘 되고 선원이 못되고, 선원이 잘 되고 강원이 못되고…그래서는 한 총림에 살지 못한다. 화합하여 서로서로 돕고 살아라’ 하셨습니다. 당신의 이 한 말씀 큰 가르침에 학인도 수좌도 모두들 크게 깨우쳤지요.
성철 큰스님께서는 종정으로 추대되시고 종도들에게 내린 유시(諭示)에서 지계청정(持戒淸淨) 화합애경(和合愛敬) 이익중생(利益衆生)을 일러주셨습니다. 계율을 청정히 지니고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하라는 말씀이지요. 나는 이 종정유시에서 큰 가르침을 새기고 있습니다. 출가수행자나 재가불자 모두가 부처님 제자라면 반드시 지니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 스님께서는 <화엄경> 연구로 일본 대정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도 수료할 정도로 교학연찬에 힘을 쏟았고 또 당대 선지식 회상에서 참선수행으로 깊은 경지를 체득하셨습니다. 이렇듯 선.교 겸수이신데 참선수행자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교학을 공부하고 나서 참선수행에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교학을 모르고 참선수행을 한다는 것은 반쪽수행이라고 봅니다. 선이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해서 문자를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禪)의 궁극적인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게 선(禪)이지 않습니까. 교학을 도외시하고 선수행만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역대 어느 고승.선지식도 교학을 소홀히 하고 선수행만으로 도를 성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선과 교학을 겸수했습니다.
‘율’은 부처님의 ‘행’…교학·참선으로 이룬 지혜-선정도
계율이 느슨하면 결국 줄줄이 새게 되지요…
성철스님도 그러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평생 참선수행이 성도(成道)의 첩경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학을 소홀히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선과 교를 분명히 밝히시어 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 교 이외에 따로 전한다)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교를 통한 성도가 점점 닦아가는 점수(漸修)라면 선은 몰록 깨닫는 돈수(頓修)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선문정로(禪門正路, 선의 바른 길)>라는 당신의 저서를 통해 널리 펴고 있습니다. 경문의 해석도 깊은 선지(禪旨)에서 풀어내시어 경학자와는 다른 풀이를 보이시곤 했습니다.
선에 먼저 들어가 올바른 선지식 만나서 지견이 트이면 경전을 보아도 내 마음에 반조하여 보는 것이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선에 먼저 들어가 경지를 체득하고 나서 경(經)을 보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성철 큰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해서는….
“나는 해인총림의 백일법문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 책으로, CD로 나왔을 때 알았지요. 성철 큰스님의 그 넓고 깊은 학문과 선지(禪旨)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방대한 불교를 중도(中道)로 꿰어 일관되게 설파, 사부대중에게 일러주신 그 백일법문은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 스님께서 율원(律院)을 이끄시면서 후학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거듭 말하지만 율은 부처님 행입니다. 계율은 물통을 꽉 죄는 데에 비유됩니다. 테가 느슨하면 물통의 물이 샙니다. 교학으로 이룬 지혜와, 참선으로 이룬 선정도 계율이 느슨하면 줄줄이 새게 되지요. 행(行, 실천)이 없는 학문과 지혜는 마른 잎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라 하여 불자들에게 깊이 새기게 하는 가르침을 새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영축총림 통도사 율주 혜남스님이 통도사 취운암을 찾아온 원택스님(오른쪽)과 ‘해인총림 방장 시절 성철스님에게 받은 가르침’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혜남스님은…
1963년 경남 창녕 관룡사에 입산, 1967년 노산(老山)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70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0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고 인천 용화사, 월내 묘관음사, 영축총림 통도사 보광선원과 극락암 호국선원, 해인총림 해인사, 덕숭총림 수덕사 등 선원에서 안거했다.
해인사.법주사 강주, 조계종 개혁회의의원, 호계원 재심호계위원, 중앙승가대 불전국역원장, 동 불교학과.역경학과 교수,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장, 승가재교육진흥위원회 위원, 역경위원장, 통도사승가대학 강주, 통도사 전계사.율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천수천안’ 칼럼을 집필하고 있으며, 학위논문 <징관(澄觀)의 화엄경소초에 나타난 유도사상(儒道思想)> 등 20여 편의 논문과 번역서가 있다.
[불교신문 2863호/ 11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