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스님
“큰스님께서는 나에게 누구보다도 더 큰 은혜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출가수행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주셨고 수행의 고비마다 자상하고 매서운 가르침으로 제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투철한 수행정신, 올바른 수행지침, 무엇보다도 참선수행이야말로 성도(成道)의 첩경이며 수행자가 택해야 할 바른 길임을 고구정녕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강원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선방 수좌의 길로 강하게 이끌어 주셨고 참선수행중 상기병으로 고생할 때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공부가 깊어져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들었다고 자신만만할 때에는 매서운 질타로 그것 갖고 오매일여라 해서는 안되며 오매일여라도 화두참구는 지속해야 한다는 엄한 일깨움을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불교의 바른 길을 철저한 수행정신으로 걸어왔으며 참선수행을 실참, 많은 경험과 정진력을 쌓아 큰 성취를 이루었기에 후학이 가는 길을 누구보다도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지식이신 스님께서 일깨우고 자상히 베풀어 주신 그 가르침을 지금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해 가는지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강원을 졸업하고 참선 수행의 길로 접어들어 40여 년을 전국 여러 선원에서 수행, 정진력을 드높여 이제는 범어사 선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인각(仁覺)스님.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法緣)을 말하다’에 흔연히 응해 주시며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지난 일을 소상히 말씀해 주셨다.
- 성철 큰스님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으며 처음 뵈었을 때 어떠하셨습니까?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범어사에서 도감(都監) 소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주위에서 ‘큰스님 오셨다’고들 했어요. 나는 그 큰스님이 누구신지 몰랐지요. 스님 계신 방에 들어가니 스님은 광덕스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 광덕스님이 큰스님 곁에 공손히 앉아 계셨습니다. ‘니 범어사 중이가?’ ‘예, 범어사 인각입니다’ ‘인각이라?’ ‘예 도감을 봅니다’ ‘도감? 공부해야 한데이’
‘범어사 중이가?’ 하는 그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고 스님을 쳐다보니 그 큰 눈에 광채가 번득였습니다. 그 눈으로 나를 콱 보는데 그만 겁이 덜컥 났습니다. 호랑이 눈이 저럴 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선수행이 성도의 첩경
수행자가 택해야 할 바른 길 고구정녕이 말씀
척판암 삼칠일 기도 후
‘참선해서 부처 돼야 한데이’ 당부말씀에 진로 결정
- 승가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셨다는 말씀은?
“많이 고민했지요. 은사(나옹)스님은 그 당시 나를 국제포교사로서 우리 불교의 국제화에 기여할 일꾼으로 삼으려 하셨어요. 일본에 있는 대학에 유학하도록 입학절차까지 밟아놓으셨지요. 나는 은사 스님의 말씀에 내 사제를 추천하고 나는 빠졌지요.
은사 스님이 나를 일본 유학 보내려할 때 자운 큰스님은 내게 율(律)을 공부하여 율사가 되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 때 <화엄경> 공부를 더 깊이 할 마음을 갖고 있었지요. 그러니 고민이 안 될 수 있겠어요? 그때 작심했지요.
나의 진로는 어른 스님의 말씀보다 불보살의 가피에 따르기로 하자고. 부산 기장에 있는 척판암에 가서 3.7(21)일 기도에 들어갔어요. 기도를 마치는 날,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불단을 보니 좌.우에 부처님은 있는데 가운데 부처님 자리가 비었어요.
그때 어느 스님이 척 들어서는데 방장(성철) 스님이셨어요. 방장 스님이 그 빈자리에 앉으니 바로 삼존불이 불단에 앉게 되었지요. ‘아, 성철스님은 부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기도를 끝내고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지요. 방장 스님은 ‘니, 딴 거(다른 것) 하지 마래이. 참선해야 한데이. 참선해서 부처돼야 한데이’ 하셨어요. 그 말씀 듣고 참선수행의 길로 내 진로를 결정했어요.”
인각스님이 받은 성철스님 친필 정진오계.
- 그때 방장 스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은 또 없었습니까?
“왜요. 있지요. 정진오계와 글귀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정진오계는 참선수행자가 지닐 다섯 가지 지침입니다. 4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일체 담화를 하지 않는다. 불전(佛典) 조록(祖錄, 조사어록)을 막론하고 일체 문자를 간독(看讀)하지 않는다. 포식(飽食) 간식(間食)하지 않는다. 유람차 돌아다니지 않는다.
방장 스님이 그때 주신 친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지요. 글귀는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놈(사람)이라야 바야흐로 성불할 입지를 가진 사람(殺人不貶眼底漢 方可立地成佛)’이라는 글입니다. 이 친필도 지금 지니고 있습니다.”
- 오매일여가 되었다고 큰소리 치셨다면서요?
“큰스님께서 주신 정진오계와 친필글귀를 받고 나서 정말 죽기를 작정하고 공부했지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일종식(하루 한 끼 먹음)으로. 그렇게 두어 철 지나니, 아! 오매일여가 되더라고요. ‘해제만 되어라. 내가 성철 노장 잡아먹을 거다’ 했어요. 의기양양해서 시험도 하고 자랑도 하고 점검도 할 겸 노장에게 갔지요.
‘스님, 제가 오매일여가 됐습니다. 오나가나 밥 먹을 때나 꿈속에서나 여일(如一)합니다’ 했지요. 스님께서는 아무 말 않고 내 말을 다 들으시더니 ‘니, 덕산 탁발 아나? 암두 밀계 알겠어?’ 하셨어요.
대답 못했지요. 그러니까 방장 스님께서는 오매일여가 되더라도 화두를 놓지 말고 전보다 더 독하게 노력하라는 태고 화상(和尙)의 말씀과 함께 법문을 해 주셨지요.
‘니, 증도가(證道歌) 아나? 증도가 봐야 한데이’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증도가를 다 외셨어요. 그때 나는 내 공부한 것을 알았지요. 방장 스님의 자상하신 법문과 후학을 대하는 모습도 깊이 느꼈고요.”
‘정진오계’ 친필 받고 죽음 작정…
정진하다 생긴 상기병도 낫게 해주셔
‘오매일여’ 되더라도 화두 놓지 말라 조언…
‘본지풍광’ 이해하면 성철스님 알 수 있어요
- 상기병이 나서 큰스님께서 낫게 해주셨다는 말씀은?
“큰소리 치고 방장 스님 찾아갔다가 되게 얻어 맞았잖아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정진에 돌입했는데 아 그게 전처럼 되지 않더라고요. 상기병이 난 것이지요. 목 위에 발진처럼 돋아나 움직일 수도 없고 앉아 있어야만 했어요. 잠도 앉아서 자야 했어요.
한 번씩 그 발진이 툭 툭 터지는데 피고름이 나왔어요. 그때가 1976년께였어요. 노장님 찾아갔지요. ‘수좌가 상기나면 공부는 끝이다. 약이 없는 거 아니다. 가자. 따라 온나’ 하시면서 밭두렁으로 갔어요.
진득찰을 가리키시며 ‘저거 한 짐 뜯어갖고 데려 묵고(달여 먹고) 머리 감고. 그라모 낫을 끼다’ 말씀대로 먹고 감고하니 고름자리가 터지고 아프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았지요.”
- 해인사 백련암 관음전에서도 살지 않으셨습니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내가 노장 잡아먹으려면 노장 사시는 백련암에 가야겠다고 작심했지요. ‘스님 법을 완전히 알기 전에는 백련암을 못 떠납니다. 내쫓으려 하지 마십시오. 스님 곁에 있게만 해주십시오. 제 공부 완성하려면 스님 곁에 있어야만 합니다’ 막무가내로 버텼지요.
스님께서 시자를 불러 ‘저쪽 관음전에 있게 해라. 불 때주지 마래이’ 하셨어요. 나는 얼어 죽더라도 버틸 생각으로 관음전에 들어갔어요. 앉아 버티는 것은 걱정 안했어요. 정말 추웠어요. 방장 스님께서는 한밤중에 나와서 보고 가곤하셨지요. 그렇게 며칠 지났는데 하루는 온 암자에 노장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어요.
시찬(侍饌, 큰스님 공양 담당)이 노장님 공양도 챙기지 않고 보따리 싸서 도망을 갔어요. 그런 큰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 일 있은 날 백련암에서 내려왔어요. 그 일이 꼭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았거든요. 그 후로 백련암엔 가지 않았지요.”
- 스님께서는 노장님의 <본지풍광>을 보셨지요. 그리고 요즘 선방 분위기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본지풍광(本地風光)은 노장님 당신 말씀대로 ‘성철을 알려면 본지풍광을 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본 모습(본지풍광)이지요. 요즘 선방 스님들도 당신의 이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 인각스님은
194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범어사 나옹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범어사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하고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40여년 수선안거했다. 조계종 기본선원 운영위원장,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지금은 범어사 유나(維那)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불교신문 2848호/ 9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