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과 나의 법연’ 연재에서 상좌로는 처음으로 원행스님이 초대됐다. 본지 이진두 논설위원(왼쪽)과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가운데)이 창원 정인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사진제공=윤재옥
“출가수행자는 오로지 남을 위해
제 한 몸 던지는 삶을 살기에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참회하라 참선하라 남을 위해 살라’는
스승의 가르침 깊이 새겨
도심지에 참회도량 ‘정인사’ 중건
1996년 사회복지법인
금강 어린이집 개원
정부보조금 한 푼 받지 않고
‘금강 사회복지법인’
자체부담금으로 시설 마련
함께하는 동체대비 정신으로
행복한 세상 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노인복지에도 정성 쏟아
“‘참회하라, 참선하라, 남을 위해 살아라’. 이 말씀은 은사(성철) 스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스님께서는 출가수행자는 일체중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익혀 대각(大覺)을 성취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커다란 원력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산다면 그런 삶은 수행도 아니요 나아가 수도인의 삶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도인, 출가수행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사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만을 위해, 내가 남보다 더 잘 나야 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출가수행자는 오로지 남을 위해 제 한 몸을 던지는 삶을 살기에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출가한지 근 40년이 되지만 은사 스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며 사는지 따져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나름대로 정진하고 남을 위해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부족하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보고 대선사(大禪師) 집안에서 복지 불사에 헌신하여 큰 성취를 이룬 제자는 원행스님이 유일하다고들 말합니다. 듣기 민망한 말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그 길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새해 들어 둘째 날인 지난 2일.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과 함께 경남 창원의 정인사(正印寺)를 찾아갔다. 이 절에 주석하는 원행(圓行)스님을 뵈러갔다. 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상좌이며 원택스님의 사제다. 은사인 성철 큰스님이 우리 불교계에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킨 어른이라 당신의 상좌들도 참선수행에 정진하는 가풍을 지니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원행스님은 출가이후 10여년을 참선수행에 전념하고 포교일선에 나서서 어느 분야보다도 복지 분야에 뜻을 두어 실천하고 있는 상좌로 알려져 있다.
‘참회하라 참선하라 남을 위해 살아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도심지에 참회도량을 중건하고 참선수행자를 이끄는가 하면 어린이에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복지구현에 힘쓰고 있다. 맑고 밝은 표정에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명랑한 음성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스님을 보니 매서운 겨울 추위도 문자 그대로 눈 녹듯 녹았다. 원행스님은 따끈한 차를 손수 끓여 내놓으면서 자신의 수행 역정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번 원행스님과의 만남은 여태껏 해온 연재 기획과는 달리 성철 큰스님의 상좌를 만나 ‘ 스승과 그 제자’의 법연을 듣는 자리여서 의의가 큰 자리였다. 이제까지는 성철 큰스님의 직계 상좌를 모신 자리가 아니었는데 비해 이번 자리는 직계 상좌와 그 은사인 큰스님과의 법연의 자리여서 어느 면담보다 관심이 컸고 게다가 상좌가 펼치고 있는 불사가 사회복지사업이라서 더욱 기대가 컸던 만남이었다.
- 스님께서 출가하지 40년 가깝다 하셨는데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1974년 음력으로 정월 열이렛날입니다. 해인사 백련암에 와서 큰스님을 은사로 그해 사미계를 받고 이듬해 비구계를 받았지요. 그때 제 위 사형님들은 열 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 백련암에 오셔서 출가이후 줄곧 노장님(성철 큰스님) 시봉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노장님 시봉하다가 1976년 큰 절 해인사 선방에 갔습니다. 퇴설당에서 한철 지내고 또 백련암으로 올라왔지요. 백련암에서는 공양주 소임을 맡았습니다. 노장님의 아랫사람 지도방침은 늘 그러시지 않습니까. 누구든 나이가 적든 많든 백련암에 출가하러 오면 후원 소임부터 시키시지 않습니까. 1978년 큰절 선방에 가서 선열당에서 한 철 지내고 퇴설당에 올라갔습니다. 이후 제방 선원을 찾았지요. 1983년 하안거까지 수도암, 통도사 극락암, 봉정사, 법주사 복천암 등에서 정진하고 1984년 하안거는 강원도 삼척 신흥사 청련암에서 지냈습니다.”
- 해인사 말사인 청량사 감원으로 계시면서 불사를 크게 하셨다면서요.
“1984~1988년 청량사에 있었습니다. 내가 가기 전엔 (지금은 환속한) 원정스님이 계셨지요. 1984년 동안거를 앞두고 삼척에서 백련암으로 왔습니다. 건강조절 한다고 백련암에서 단식을 13일간 했습니다. 그런데 단식 후 보식(補食)을 한 달간 해야 했습니다. 그때 노장님이 청량사에 가서 몸을 추스르라고 하셨습니다. 원정스님이 독일로 가고 청량사는 감원 자리가 비어 있을 때입니다. 그리해서 청량사에 가서 3년6개월을 지냈지요. 불사는 절에서 마을까지 길 넓히고 전기 넣고 한 것들이지요. 오늘의 청량사는 그때의 불사가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 창원에는 그럼 청량사 이후에 오셨겠네요.
“1988년 하안거를 청량사를 떠나 큰절에서 지냈습니다. 해제 후 창원으로 와서 동안거 때부터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까 그때부터 스님의 ‘복지보살’로서의 행보가 시작된 셈이군요,
“내가 창원에 갔을 때는 지금 이 자리 정인사가 있는 자리에 ‘참회원’이라는 이름의 수행처가 있었습니다. 노장님을 따르던 창원 신도들이 마련한 도량이었지요. 내가 가서 옆 집 한 채를 더 구입하여 1993년 ‘정인사’라는 이름으로 중건했습니다.”
- 그간 스님의 하신 노고가 느껴집니다. 작은 집을 5년여에 걸쳐 오늘의 지하1층 지상3층의 번듯한 건물로 일으켜 세우셨으니까요. 그럼 이 절이 스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대작불사인 복지불사의 모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심지에서 절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산중 절과 달리 도심 사찰은 포교사업에 힘이 많이 듭니다. 또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니 나는 이제껏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만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장님의 가르침은 말할 것 없고 여기 와서도 신도님들의 원력에 힘입은 게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여태껏 내가 받은 이 숱한 은혜를 갚아나가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승님이 일러주신 ‘남을 위해 사는 삶’에 부합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어린이에서 어르신까지 복지구현을 실천하신다는 데….
“1996년 10월 사회복지법인 금강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보육시설 건물 및 시설 내 교재ㆍ교구, 시설설비 일체를 정부보조금 한 푼 받지 않고 ‘금강 사회복지법인’ 자체부담금으로 했습니다. 1997년 원아 163명으로 개원했지요. 2세미만 5명, 만2세 14명, 만3세 이상 144명이었습니다. 이후 2012년까지 16회에 걸쳐 한 해 50~90명 정도 길러냈습니다. 영유아기는 성격발달의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올바른 인성을 기르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 이들이 자라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익히고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나가는 어린이가 되도록 힘을 쏟아 길러나가는 게 우리 불자의 할 일이지요.”
- 노인복지에도 큰 힘을 쏟고 계신데요….
“1996년 설립한 법인체 ‘사회복지법인 금강(金剛)’은 영유아 보육시설 외에 노인 여가복지시설, 재가노인복지시설, 노인보호전문기관, 노인일자리 창출 지원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금강노인종합복지관이라 이름 하는 이 복지관은 2005년 6월 개관했습니다. 보현행원 사상의 실천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 어르신들에게 상담, 사회교육, 보건복지, 재가복지사업 등을 통해 행복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지원하고 항상 함께하는 동체대비 정신으로 즐겁고 행복한 세상을 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1996년부터 시작한 이 복지대작불사가 어언 17년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하시겠다 하니 스님의 원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창원에 와서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이 모든 불사가 이처럼 이뤄진 것도 노장님의 그늘이니까 그리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장님을 믿고 따른 신도님들의 원력에 감사드립니다. 신도님들은 ‘이제는 스님, 새로 공부하러 가십시요’라고들 합니다. 허 허. 제 길이 이 길인데 어디 가겠습니까.”

원행스님은…
1948년 경북 영천 출생. 1974년 해인사 백련암에 입산, 그해 성철스님을 은사로 도견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5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6~1984년 해인사 선원, 봉암사 선원, 삼척 신흥사 청련암, 통도사 극락암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 수행했다. 1984~1988년 해인사 청량사 감원을 역임한 후 1988년부터 현재까지 창원 정인사 주지 겸 사회복지법인 금강 대표이사로 있다.
[불교신문 2879호/ 1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