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지금 되새기면 당신의 고뇌와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바로 ‘백일법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이 법문을 통해 불자의 의식개혁을 일깨웠습니다. 의식개혁을 위해서는 불자들이 불교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불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통해 불자들에게 불교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방대한 불교를 중도(中道)로 꿰어 일관되게 일러주셨고 난해한 한문으로 된 경전과 어록들을 우리말로 쉽게 강설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후학들은 보다 쉽게, 보다 편하게 수행과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당신의 삶을 깨어있는 의식, 개혁된 의식으로 사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불자의 의식개혁 성취는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혁된 의식에 맞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만 불자는 바른 길을 갈 수 있고 한국불교의 앞날도 바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불자의 의식개혁ㆍ제도개혁을 위한 교재로써 <백일법문>을 강설하고 이를 널리 펴고 있습니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간화선 - 조계종 수행의 길> 편찬을 주도했으며 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우리 불교의 앞날과 후학의 정진을 늘 걱정하고 있는 고우(古愚) 큰스님. 고우 큰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으로 사부대중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언제 들으셨습니까? 그 법석에는 참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철스님께서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고 그해 동안거 때 백일법문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1965년 향곡스님이 조실로 계시는 묘관음사(현 부산시 기장군 소재)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백일법문을 방장(성철)스님이 펼치실 때 직접 듣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 후 원택스님이 방장 스님의 그 때 법문을 책으로 CD로 펴냈을 때 들었습니다.
백일법문을 들으면서 나는 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론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그 방대한 불경(佛經)과 어록(語錄)들을 ‘중도’ 사상으로 일관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거기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나도 ‘중도’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견성(見性)’이라는 용어 대신 ‘중도를 깨쳤다’라고 합니다. 나의 이 말은 이를테면 ‘노장님(성철스님) 말씀을 퍼 옮긴 것이지요.”
선림회 창립법어 생생
‘여련화불착수(如蓮華不着水)
향곡스님과 ‘법담’ 많은 생각 갖게 해
- 노장님을 직접 뵈었을 때의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기억에 남는 말씀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해인총림 설립이후 선림회(禪林會) 창립 때 뵌 기억이 납니다. 창립 법어를 하셨습니다. 덕산(德山, 782~865, 중국)스님이 대중처소에 다니며 책이라는 책은 다 거두어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향곡스님과 방장 스님이 말씀을 나누는 자리에서 ‘아까 말대로라면 백련암에 있는 책도 다 불태워야겠네’ 했어요. 방장 스님은 향곡스님이 그 말에 ‘여련화불착수(如蓮華不着水)지 뭐’ 했어요. 연꽃잎에 물방울이 묻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두 분의 법담에 많은 생각을 가진 기억이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방장 스님이 해인사에 오시기 전 남해 용문사에 들르신 적이 있어요. 나는 염불암에 있을 때입니다. 스님께서 염불암에 오셨기에 내가 쓰고 있는 방을 내드렸어요. 그때 스님께서는 돈점(頓漸)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다음날 스님께 여쭙고 싶은 말이 많아 스님 계신 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말씀들을 여쭈었더니 스님은 벽을 향해 획 돌아 누우셨어요. ‘나는 감기가 들어 말 못해’ 하시면서…. 조사어록을 보다가 느낀 점이 있어 당신의 법문을 들으려고 갔는데 획 돌아 누우셨으니 그때 ‘왜 저러실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훗날 그때 일을 회상하니 ‘아 내가 그때 스님께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 허.”
백일법문 들으면서 ‘불교가 무엇인가’ 확신
방대한 불경과 어록 ‘중도’로 일관되게 일깨워
거기서 큰 감명…
- 제방(諸方)에서 노장님에 대한 이해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노장님의 위상과 평가라고 하면 외람된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스님께서 듣고 느끼신 점은 어떠십니까?
“옛 어른들에 대해서 우리는 좋지 않은 이야기는 빼놓고 좋은 얘기만 하고 있는 게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보면 옛 어른들은 누구라도 좋은 얘기만 있지요.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사람을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로 아무리 나쁜 일을 해도 좋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각기 보는 눈이 다르고 보는 기준이 다르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나보고 말하라고 하면 그 기준은 한 인물의 사상과 그 사상을 담은 저술(著述)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스님께서는 노장님의 저술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본지풍광(本地風光)> <선문정로(禪門正路)>를 보셨습니까? 그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장 스님께서는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을 발간하시고는 ‘부처님께 밥 값 했다’고 흔연해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방장 스님의 백일법문이야말로 밥값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 불교를 쉽게 접근하게 하셨으니까요.
현재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의 저술 가운데 <백일법문> 만큼 불교를 쉽게, 정확하게 일러주신 것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의 백일법문을 높이 평가합니다.”
동 시대 언어로 불교진수 일깨운 저술 드물어
주지연수 강의하라면 ‘백일법문’으로 할 것
- 불교인재원에서 백일법문을 강설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올 6월부터 둘째 넷째 주 월요일 서울에서 백일법문 강설 법회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십니다. 근 300명에 이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경북 봉화 금봉암에서도 그전에 월1회 네 번째 목요일에 강설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대구.안동 등지에서 150명이 왔어요. <서장(書狀, 간화선 지침서로 일컫는 책)> 강의를 들은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불교에 관심이 높고, 특히 간화선에 대한 관심과 공부열기가 높기에 백일법문 법회에 많이 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백일법문을 불자 의식개혁의 교과서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동안 숱한 경전 해설서와 강론도 많이 나왔지만 백일법문만큼 동시대에 이해할만한 언어로 불교의 진수를 일깨운 저술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백일법문으로 의식개혁하자는 데는 다른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불자들 의식개혁을 하자는 논의가 높아지는 이때 백일법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백일법문을 전국 선방의 교재로 채택하여 철저히 교육했으면 좋겠습니다. 선방에 가지 않는 스님에게도 꼭 일러주었으면 합니다. 주지연수교육에 나보고 강의하라면 백일법문으로 하겠습니다.”
- 끝으로 정진하는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방장 스님께서 해인사에서 하셨던 일을 돌이켜 보면 내가 할 말이 바로 나옵니다. 방장 스님께서 백일법문을 총림설립 첫 동안거 때 하셨습니다. 이는 불자들에게 불교를 바로 알고 발심을 바로 하여 정진에 게으르지 말라는 당부이지 않습니까. 건전한 발심에서 큰 성취가 나옵니다. 그것이 불교수행의 근간입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만난 고우스님(왼쪽)과 원택스님은 조계사 경내를 거닐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우스님은…
1937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25세에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청암사 강원에서 고봉스님에게 수학했고 향곡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부산 기장군 묘관음사 선원에서 첫 안거 이래 일생을 수선(修禪) 납자(衲子)의 길을 걸어왔다.
1970년 전후에 경북 문경 봉암사 주지를 맡아 선원을 재건, 오늘날 조계종 종립 특별선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간화선 - 조계종 수행의 길> 편찬을 주도했다. 지금은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경북 봉화 금봉암에 주석하고 있다.
[불교신문 2842호/ 8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