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암은 주변의 기이한 바위와 탁 트인 전망 등으로 ‘가야산의 제일 승지’로 꼽힌다. 김형주 기자
1966년 가을, 성철스님은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를 떠나 해인사 백련암으로 왔다. 이후 스님은 열반 때까지 가야산을 떠나지 않았다. 해인사 백련암 하면 스님을 떠올리게 되고 성철스님 하면 백련암을 연상할 만큼 스님과 백련암의 인연은 그렇게 지어졌다.
성철스님이 백련암에서 ‘가야산 호랑이’로 주석한 이후 스님은 해인총림 초대방장~조계종 종정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가야산에서 중생제도의 넓은 문을 활짝 열었다. ‘백일법문’으로 알려진 대법회를 열어 자신의 법력을 널리 폈고 성철선(禪)사상을 사부대중을 비롯한 학계와 종교계 그리고 사회에 알렸다.
스님은 평소 품어 온 승려교육을 고취하기 위한 중앙승가대학 설립도 추진했다. 중앙승가대학 설립은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50~1984) 거사가 사재(私財)를 내놓기로 하여 추진했다. 스님이 덕산 거사와 함께 계획하고 추진하던 대학설립은 진행도중 덕산 거사의 사업실패~미국 이주 등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천혜경관 수많은 고승 배출…‘가야산 제일 승지’ 꼽혀
자운·영암스님 배려 힘입어 ‘가야산 호랑이’로 주석
해인총림 방장~종정 역임, 백일법문 등으로 법 널리 펴
그러나 스님의 승려자격 향상과 위상제고를 위한 승려교육 일환인 중앙승가대학 설립은 이후 종단사업으로 이어져 오늘날 그 성과를 크게 높이고 있다.
성철스님이 김룡사에서 백련암으로 옮긴 데는 자운(慈雲, 1911~1992)스님과 영암(映巖, 1907~1987)스님의 배려와 지원이 컸다. 자운스님은 당시 해인사 홍제암에 있었고 영암스님은 해인사 주지였다. 두 스님이 성철스님을 해인사로 모시게 된 것은 나중 해인사가 총림으로, 종합수도원의 사격(寺格)을 갖출 것을 미리 내다본 행보가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백련암은 해인사 산내 암자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큰절을 향해 가다가 일주문 못 미쳐 오른쪽으로 꺾어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국일암~희랑대~지족암을 지나 약 2km정도 더 가면 백련암이 있다.
성철스님과 영암스님. 사진제공=성철선사상연구원
백련암 주변은 기이한 바위와 탁 트인 전망으로 가야산의 제일 승지(勝地)로 꼽힌다. 좌우로 용각대(龍角臺).절상대(絶相臺).신선대(神仙臺)로 불리는 바위가 우뚝우뚝하여 장부의 기상을 드러내는 듯하고 암자 뒤편 산 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환적대(幻寂臺)가 있다.
환적대는 환적스님의 일화가 전해져 유명하다. 환적스님은 이 산중에 토굴을 짓고 환적대라 이름 지었다. 스님은 이 토굴에서 좌선수행하며 살았다. 늘 호랑이 한 마리와 동자 한 명과 함께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이 출타하고 동자가 스님의 공양거리를 다듬던 중 칼에 손을 비어 피가 흘렀다고 한다. 동자는 무심코 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곁에 쭈그리고 앉은 호랑이 입에 빨렸단다.
그러자 피 맛을 본 호랑이는 짐승의 본능이 도져서 상좌를 해쳤다고 한다. 스님은 산신에게 일러 앞으로 다시는 이 산중에서 호환(虎患)이 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가야산에서는 호환이 없어져서 사람들은 이를 일러 환적스님의 법력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 청규는 백련암서도 그대로 이어져
수행 정신만은 불면석처럼 변치 않고 지키고 있어
“백련암은 예부터 고승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암(昭庵).풍계(楓溪).성봉(性峰).인파(仁坡).활해(濶海) 등 여러 스님이 주석했다. 초창(初創) 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조선 선조38년(서기 1605년) 서산대사의 문도인 소암스님이 중창했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암스님이 해인사를 수호했는데 왜병들은 스님의 명성을 듣고 감히 침범하지 못한 채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나보기만 했다고 한다. 지금도 왜병들이 엿보았다는 산마루가 왜규치(倭窺峙)라 불린다.”(한국불교연구원 간행 ‘한국의 사찰7 - 해인사’ 편에서 인용)
현재 백련암에는 염화실.좌선실.영자당(影子堂).천태전(天台殿).적광전(寂光殿).원통전(圓通殿).고심당(古心堂) 등 여러 당우가 있다. 고심당에는 불상 대신 성철스님의 좌상을 모셔 놓았다. 성철스님이 평소 자신의 장서(藏書)를 모셔놓았던 장경각(藏經閣)은 헐리고 없다. 스님의 장서는 원통전 불단 뒤편에 모셨다. 좌선실(坐禪室)이란 편액의 글씨는 현 조계총림 방장 보성(菩成)스님의 필체다.
백련암 경내의 불면석. 김형주 기자
백련암 마당에는 불면석(佛面石)이 있다. 부처님 얼굴 모습같이 생겼다하여 이름 부쳐진 불면석은 백련암의 상징처럼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염화실은 옛 장경각 자리(좌선실 옆)에 신축했는데 정작 이 방의 주인인 성철 방장스님은 이 새 건물에서 얼마 머물지 못했다고 한다. 스님 열반 후 비워놓았다가 근래 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련암에 이르는 찻길이 닦이기 전, 지금의 주차장 터는 텃밭이었다. 거기서 무.배추.당근.감자 등을 암자 대중 스님들이 씨뿌리고 가꾸었다. 많지 않은 암자 대중들은 운력으로 텃밭을 가꾸었고 웬만한 먹을거리를 이 밭에서 나는 채소로 충당했다.
백련암은 주변의 기이한 바위와 탁 트인 전망 등으로 ‘가야산의 제일 승지’로 꼽힌다. 김형주 기자
암자의 잔일을 맡아하는 거사가 있어 산에서 땔나무도 해 오고 밭일도 도맡아 했지만 대중들도 운력으로 그를 도왔다.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청규는 여기 백련암이라고 흐트러질 리 없었다. 지금도 맏상좌 천제스님이 머물고 있는 부산 해월정사에는 한 장의 사진이 그 시절을 일러 주고 있다.
여름에 감자밭을 맬 때 잠시 휴식하면서 찍은 사진. 웃통을 벗고 러닝셔츠와 밀짚모자에 카메라 앞에 선 그 때의 백련암 대중. 그 가운데는 천제.만수스님이 있고 원기스님(환속 전 필자)도 있으며 당시 행자수업을 하던 명진스님(전 봉은사 주지)도 있다.
시절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 첩첩산중 가야산 꼭대기 암자에 찻길이 나고 텃밭이 주차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수행자의 정신만은 불면석처럼 변하지 않고 백련암을 지키고 있다.
백련암 일주문.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우리 발밑이 곧 천당
높은 하늘을 아버지로, 넓은 땅을 어머니고 삼고 다 같이 살아가는 우리는 한 집안 식구이며 한 형제입니다.
나만을 소중히 여기고 남을 해치면 싸움의 지옥에 떨어지고나와 남이 한 몸임을 깨달아서 남을 나처럼 소중히 한다면 곳곳마다 연꽃 가득한 극락세계가 열립니다.
극락과 천당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남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는 한마음에 있습니다.
천당과 극락은 하늘 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발밑이 곧 천당이요 극락이니 다만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영원무한한 행복의 새해가 열립니다.
- 1989년 종정 신년법어
[불교신문 2814호/ 5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