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사에서 구도부 학생,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함께 한 성철스님(뒷줄 가운데). 앞줄 왼쪽부터 김금태, 이진두, 한 사람 건너 김기중, 이철교, 김성구, 황귀철. 뒷줄 왼쪽 현경스님과 박성배 교수(배레모),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전창열. 사진제공=성철선사상연구원
“1965년 9월1일. 그날은 어찌 그렇게 더웠는지 모른다. 그 더운 날 한낮에 대불련(大佛聯,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학생 13명은 경북 문경 김룡사 큰 법당에서 삼천배(三千拜)를 하고 있었다. ‘구도하는 마당에 학생이고 지도교수고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느냐’는 성철스님의 불호령 때문에 다른 절에서는 으레 받았던 교수 특혜도 받지 못하고 학생들과 함께 울며겨자먹기의 삼천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법당 안은 한증막처럼 더웠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나기 전에는 못나갑니다. 끝내지 않고서는 살아서 이 법당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도중엔 한 번의 휴식도 없으니 미리 볼 일을 다 보고 오십시오.’”
“감독하는 교무 스님의 주의말씀이었다. ‘끝낸다’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는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 했다. 시작부터가 한 치의 운신 폭도 주지 않는 긴장된 분위기였다. 드디어 삼천배의 시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울렸다. 겨우 백배를 하고 나니 벌써 미칠 것 같았다. 바깥 열과 속의 열이 합쳐져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숨은 콱콱 막혔다.
그래도 삼백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백배가 고비였다. 이미 우리의 옷은 물속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사람들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절을 하는 게 아니라 빌딩이 넘어지듯 넘어졌다가 넘어진 몸을 다시 일으키는 동작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무릎은 깨져 피로 얼룩지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자 학생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자비문중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자비문중에서 하는 짓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학생이 대신 해주니 마음속으로는 기뻤지만 그래도 지도교수라고 큰소리를 쳤다. ‘잔소리 마라. 사람이 한 번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야. 자비문중인지 잔인문중인지는 다 하고 난 다음에 따지자.’
문경 김룡사 일주문. ‘운달산 김룡사(雲達山金龍寺)’라는 산명-사찰명이 적힌 편액과 홍하문(紅霞門)이라고 적힌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 김형주 기자
나중엔 헛소리를 하는 학생도 있었고 벌떡 드러누워 막무가내로 일어나지 않으려는 학생도 있었다. 그 다음 또 천배, 특히 마지막 천배는 어떻게 해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번도 쉬지 않고 7시간여 만에 우리는 모두 삼천배를 무사히 끝마쳤다.(오후1시에 시작하여 8시30분께 끝냈다)
법당에서 나오는 우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걸음걸이는 부상병처럼 절뚝거렸고 옷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어있었다. 그렇지만 모두들 눈빛은 빛나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또 불호령을 내렸다. 절 뒷산 상봉까지 약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한 번도 쉬지 말고 뛰어서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군대 훈련에도 이런 법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바람이 난 듯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그 어려운 삼천배를 처음 해냈다는 자신감에 기가 펄펄 살아 있었다.
삼천배를 하고 난 다음 나에게는 몇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장해제의 경험’이었다. 강제로 무장을 해제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기를 내버린 기분이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따지기 좋아하고 지지 않으려던 학생들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누가 뭐라 해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지 통 불평할 줄을 몰랐다. 이것은 멍청해진 것과는 달랐다. 그들도 분명히 속에 지니고 다녔던 것들을 모두 버린 듯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몇 푼어치 안 되는 지식을 가지고서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생각해 보면 참 우스워요.’ 제법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았다.
삼천배를 마친 그 다음날부터 성철스님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자상한 강의를 해 주셨다. ‘예로부터 투철하게 깨치신 역대 큰스님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중도 법문 외에 딴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성철스님의 중도 법문은 내가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많은 의문’을 풀어주었다. 특히 학문과 수도가 둘일 수 없고 이론과 실천이 둘일 수 없다는 불교의 이치가 분명해진 듯 했다. …(중략)… 성철스님은 지식을 주기 전에 먼저 듣는 사람의 태도를 바로 잡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철스님은 우리에게 중도에 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중도에 가까이 가 있게 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당시 학생들의 지도교수인 박성배(현 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불교학 교수.학국학과장 및 한국학연구소장) 교수가 성철스님을 만나고 삼천배를 하고 난 뒤의 소감을 적은 글이다(박 교수의 책 ‘몸과 몸짓의 논리’ 2009년 민음사 간행, 서문에서 인용).
김룡사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사천왕상. 돌로 조성하여 봉안했다. 김형주 기자
성철스님은 그해 9월2~3일 20여 시간에 걸쳐 구도부원에게 특별법문을 했다.
당시 참가한 구도부원은 다음과 같다. 박성배(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김금태(구도회장.경희대 법학과4) 이무웅(동국대 불교학과3) 이진두(서울대 법학과3) 김기중(경희대 경영학과3) 이용부(동국대 통계학과2) 민건홍(동국대 인도철학과2) 황귀철(중앙대 법학과2) 김선근(동국대 수학과1) 이상화(경희대 법학과2) 박명순(수도여사대 미술과4) 조길자(서울대 미대 회화과3) 홍애련(경희대 음대 작곡과2) 김명자(적십자 간호학과1). 이상 14명.
구도부원들은 그해 가을 서울 뚝섬 봉은사에 ‘대학생 수도원’이란 간판을 걸고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하는 신행생활을 했다. ‘대학생 수도원’에는 구도부원 중 남학생만이 입사(入舍)했고 그들의 지도도 박 교수가 맡았다.
이 수도원생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김선근 황귀철 전창열(서울대 법대4)과 이철교(동국대 인도철학과2, 입사생은 아님) 등은 그해 겨울 김룡사에서 50일간 대중 스님들과 일과를 같이 하는 동안거를 치렀다. 그때 성철스님의 ‘초천법륜’을 들었다. 이후 1966년 하안거 때도 김룡사에서 지냈다.
성철스님의 대학생 불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더구나 구도부원과 대학생수도원 입사생에 대해서는 더 깊고 넓은 애정을 갖고 지도했다. 가르침을 펼칠 때는 추상같이 엄격한 스님이 이들 학생들이 절을 떠날 때는 산문 밖까지 나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그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기고 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지도자가 갖출 자질
지도자라면 근본정신이 사리사욕을 버려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그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명리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의 사리사욕을 완전히 떠나서 오직 그 단체를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취하면 그 단체는 부서지고 맙니다. 사리사욕을 전제로 한다면 국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사상(無我思想)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1982년 1월1일 중앙일보 ‘법정스님과의 대담’ 중에서
[불교신문 2810호/ 4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