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탔던 것을 새로 지어 도량의 사격을 한층 일신한 성전암의 ‘현응선림(玄應禪林)’ 전경. 김형주 기자
“스님 모시고 살 때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게으름 부리지 않고 공부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못나고 어리석고 둔한 제가 스님을 모실 수 있었던 것만도 큰 복이지요.”
좀 더 스승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공부했으면 좋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마음 아파하는 만수(漫殊)스님(1941~).
‘성철스님을 모신 10년 행자’ 만수스님을 찾아갔다. 만수스님을 찾아뵈려는 필자의 생각은 두 갈래였다. 만수스님은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 은거할 때 시자로서 성철스님을 모셨다는 점이 그 첫째였다. 다음으로는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와 같이 성철스님을 모신 천제스님과는 다르게 지금까지도 거의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연유가 궁금했다.
천제스님은 나중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ㆍ종정을 맡았을 때 종정 사서실장ㆍ조계종 법규위원장 등 종단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종단 안팎에 ‘성철스님의 맏상좌’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만수스님은 달랐다. 그가 성철스님의 상좌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그는 조용히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맏상좌 천제스님과 공양주 채공 분담했던 ‘10년 행자’ 만수스님
하루 나무 한 짐하고 밭 갈고 씨 뿌려 채소 기르며 두문불출
지난 2월8일. 올 겨울 추위가 가장 춥다는 날이다. 대구의 낮 최고 기온이 0도인 날이었다. 대구시 달서구 두류2동 755-5. 금각사라는 절을 찾아갔다. 만수스님이 있는 절, 주소와 절 이름만으로는 찾기 어려웠다. 도회지에 있는 절이라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스님의 휴대전화에 몇 번이나 통화하여 절 가까이 가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에서 스님이 자전거를 타고 마중 나왔다.
금각사는 필자가 생각하고 있던 도회지 사찰과는 전혀 달랐다. 번듯한 안내현판도 없고 단층 법당의 기와지붕도 번쩍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적한 시골농가와 같았다.
절에 들어서자 만수스님이 내게 처음 안내한 곳이 농기구 창고였다.
“스님 모시고 성전암 살던 시절 이야기라면 부산 스님(천제스님)에게 들으면 될 것인데 여기까지 왔능교. 이 추운 날에. 오지 않아도 됐을 건데…”
그러면서 그는 법당앞 단층집 한 칸에 있는 자기 방으로 나를 들였다.
“나는 스님에 대해 말할 자격도 없고 또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이렇게 살고 있지요. 공부하는 게 아니라 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스님. 고희를 넘긴 나이라 얼굴에 주름은 늘었으나 그 눈은 맑고 깊었다.
조용한 음성으로 반백년도 넘는 옛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스님은 부산이 고향이라 했다. 영도에서 자랐다. 성철스님이 성전암에 있을 때 처음 절에 왔다. 그때가 15살. 그때부터 성철스님을 모셨다. 천제스님이 공양주를 하고 자기는 채공을 했다. 어떤 때는 두 사람이 공양주.채공을 번갈아 하기도 했단다.
성철스님의 ‘10년 행자’로 불리는 세 상좌. 왼쪽부터 성일스님, 천제스님, 만수스님. 지난 2009년 1월 본지의 ‘염화실 법향’ 취재 때 부산 해월정사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천제스님은 스승의 심부름으로 바깥나들이를 간혹 했으나 만수스님은 성전암에 들어간 이후 한 번도 바깥출입을 않았단다. 혜성스님(청담스님의 상좌)도 근 3년 청담스님께 가기 전 같이 살았단다. 성일스님도 떠나고 난 뒤는 천제스님과 둘이서 하루 나무 한 짐씩 산에 가서 해오고 밭 갈고 씨 뿌려 채소 기르고. 장작 팰 때는 스승 성철스님도 가끔 거들어주시고. 어떤 날은 나무하고 장작 패고 하다가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그렇게 나날을 살았단다.
한문공부는 사서(四書)를 다 외웠단다.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으로 익혔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제자의 공부를 일일이 확인했단다. “너 이거 외워봐라” 하면 외워 바치고. 그런 후엔 또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일본어도 익혔다.
“한문 경전을 읽으려면, 문리(文理, 글의 뜻이나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힘)를 터득하려면 사서를 봐야한다고 하시면서 익히게 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경전을 보라고 주셨는데 <법화경> <관무량수경> … 등이었다”고 한다.
만수스님은 성철스님이 성전암에서 나와 서울 도선사-경북 문경 김용사를 거쳐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까지 스님 곁에 있었다. 백련암에 3년 넘게 있다가 떠났다.
만수스님은 한문에 능한 데다 붓글씨도 어느 서예가가 못 따를 정도다. 대필(大筆, 큰 붓글씨)은 강건함과 유려함을 겸비한 명필이다.
“스님이 일러주신 참선공부의 길, 동정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의 지침을 저는 깊이 믿습니다. 일상에 일여(一如, 언제나 한결같음) 뿐 아니라 꿈에서도 일여한 경지는 어렵지요. 그런데 숙면일여도 넘어야하니 공부길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알았으니 목숨 내 놓고 해야지요.”
“공부는 목숨 내놓고 해야 한다. 삼매를 직접 체험해야 한다. 이해는 되나 체험은 잘 되지 않는 것이 공부다.”
은사 성철스님 지도로 사서·일본어 익히고 법화경 관무량수경 접해
동정-몽중-숙면 일여, 참선 세 단계 전적 신뢰…이젠 염불하며 공부길
조용조용히 말하는 만수스님의 그 맑은 눈빛은 강한 의지와 불퇴전의 정열을 담고 있었다.
필자는 그런 스님에게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은 스님을 두고 하는 말임을 새삼 느꼈다.
만수스님은 또 이렇게 말했다. “공부길은 여러 길이 있습니다. 참선도 있고 주력도 있고 염불도 있지요.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 공부하면 됩니다. 공부길은 성불에 이르는 방편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느 길이든 삼매에 드는 체험은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만수스님은 근래에는 염불은 한다. ‘석가모니불’을 열심히 읊는다. 소리 내어서 5~6시간 하다보면 힘들다고 한다. 2시간씩 잘라서 하다보면 신심이 난다고 한다. 신심이 나야 공부의 진척이 있단다. 스님은 염불을 통해서도 스승이 일러주신 참선의 세 단계를 거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선지식이 일러주는 길을 스스로 구명(究明)해야 한다”는 만수스님.
성철스님은 성전암에 주석하면서 두문불출하고 스스로의 크나큰 지도자의 길을 성숙시키면서 어린 제자들을 길렀다. 스승 되는 이, 그 어느 누구가 제자를 잘 길러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기대하지 않는 이 있으랴.
‘성전암 .10년 행자’인 성철스님의 제자 천제와 만수. 그 둘이 청출어람인지 아닌지는 사람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그들을 기를 때 그들이 청출어람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스승 성철스님도 여느 스승과 같았으리라.
팔공산 성전암 관음전 전경.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 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 1981년 음력 6월30일 방장 대중법어 중에서
[불교신문 2792호/ 2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