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가도량 해인사ㆍ출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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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3-08 10:50 조회3,3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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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출가도량 해인사ㆍ출가시
초연히 나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가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미천대업홍로설(彌天大業紅爐雪)이요
과해웅기혁일로(跨海雄基赫日露)라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가
초연독보만고진(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 출가시(出家詩)
가야산 해인사. 성철스님의 출가도량이자 열반도량이다. 1936년(25세)에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 그 해 3월 하동산스님(河東山: 1890~1965)을 은사로 수계 득도했다. 해인사는 스님이 1966년 가을부터 평생을 보낸 도량이다.
“불교공부 잘 하려면
절에 가서 중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해인사 평생 주석
수행견처 담은 선문정로
방장때 백일법문 등
큰가르침 남긴 도량
출가무렵 성철스님.
사진제공 = 도서출판 장경각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주련(柱聯)에는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이라 새겨져 있다.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라는 이 글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자리해 온 해인사를 말해준다.
한국불교만이 아니라 중국불교를 보아도 역대 선지식이 출가하면서 ‘출가시(出家詩)’를 남긴 예는 거의 없다. 당신의 출가시에서 볼 수 있듯 스님은 이미 출가할 때 스스로 갈 길,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이를 선포한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자신의 출가의지, 수행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왜 출가하는지, 무엇을 위해 출가하는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불명확한 상태에서의 출가는 수행의 진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레 세월이 지나면 물러설 마음이 나고 어떤 경우는 아예 하산하여 환속하는 예도 있다. 이처럼 출가수행인의 의지와 첫 발걸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출가 전 이미 참선수행이 대각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익히 알고 실참수행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를 체득한 스님이기에 어느 면에서는 당신의 출가시만으로도 출가 때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스님은 훗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는 중이 되려고 절에 온 게 아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다 불교에서 찾았고 불교공부를 더 잘하고 더 넓고 깊게 하려고 절에 왔다. 불교공부를 잘 하려면 절에 가서 중이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결국 당신은 진리를 찾았고 그 진리를 내 것으로 체득하기 위해 절에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때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처음 절에 가서 선방에 있으니 어간(御間: 부처님과 마주보는 자리, 어른들이 앉는 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스님들이 주욱 앉아 계셨어. 그중 한 분에게 내가 물었지. ‘스님, 스님은 무슨 화두를 잡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노스님은 ‘글쎄, 조주라 카던가, 개라 카던가 그라대. 나는 잘 몰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스님 그래 가꼬(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참선한다고 앉아 있능교. 참 답답합니더.’ 그러니까 그 노스님이 ‘그라모 젊은 수좌는 많이 안다고 들었는데 내 좀 갈차주소(가르쳐주시오)’ 그라더라꼬. 그래 내가 그랬지. 스님요, 참선공부는 지가 하는 기지. 누가 갈차주는 거요. 그라고 스님은 내가 공부할 때 내게 쌀을 주었소, 밥을 주었소. 내한테 묻지 마소 했지.”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가는 길(里程)을 알고 가야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흉내만 내는 정진은 아무 소득도 없는 헛공부임을 일러주는 말이다.
스님은 훗날 당신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수행의 견처(見處)를 담은 책 <선문정로(禪門正路)>와 상당법어집(上堂法語集: 법상에 올라 사자후를 한 법문을 모은 책)을 발간하고는 부처님께 ‘밥값’했다고 흔연해 하셨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 있으면서 그해 동안거에 펼친 백일법문(百日法門) 역시 후학을 위한 큰 가르침으로 오늘날에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도 벌겋게 단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일 뿐이요 바다를 덮을 정도의 큰 기틀이라도 해가 뜨면 스러지는 한 방울 이슬이라”고 한 그 말씀은 당신의 기개를 여실히 드러낸 게 아닌가.
“인생이란 잠깐 왔다가는 것인데 제 갈 길도 모르고 꿈속에서 꿈꾸다 죽는 것이다. 그 누가 그 잠깐의 꿈속에서 단꿈을 꾸다 가려 하겠는가. 나는 초연히 나 홀로 만고의 진리에 살다 가련다.”
되씹고 되씹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도 당신의 드높은 기상과 당당한 자세를 느끼게 한다. 이야말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 아니랴.
생전에 스님은 불교 공부하는 청년이나 젊은 보살들에게 “니 중 돼라, 중 안할래?”라는 말을 자주했다. 당신이 보기에 젊은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자기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세월을 보낸다면 얼마나 헛된 삶인가. 그것도 모르고 사는 저들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졌으면 그런 말을 했겠나 싶다.
끝없이 넓고 넓은 우주공간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아주 작은 별이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그것도 반토막이 된 땅덩어리, 그런 중에서도 어디어디에서 어느 누구의 아들딸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한갓 먼지나 티끌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자기를 바로 보면 내 한 몸, 먼지보다 작은 이 몸 안에 온 우주가 들어차 있음을 일러주는 가르침이 불교다.
스님은 항상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 왜 그걸 모르는가. 바로 보고 바로 알아라”고 했다.
당신은 이 진리를 깨치고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성철스님 은사인 동산 대종사(1890~1965).
1912년 백용성스님(白龍城: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을 은사로 득도, 선.교.율에 통달한 선지식으로 50여년 널리 중생을 교화했다. 조계종 초대 종정(1954년)이후 1955, 1958년 두 번 더 종정을 역임. 범어사 조실로서 범어사를 참선수행도량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만들고 그 위상을 굳건히 다졌다. 1965년 4월24일(음력 3월23일) 범어사에서 입적했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열두 가지 다짐(十二銘)
성철스님이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12가지 항목이다.
아녀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신도의 시주물에는 몸도 끄달리지 않으리라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가지 않으리라
냄새 독한 채소는 냄새도 맡지 않으리라
고기는 이(齒)로 씹지도 않으리라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좋고 나쁜 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절을 하는 데는 여자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다른 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 구담족의 후손 성철
目不注 簪裳之儀 (목불주 잠상지의)
耳不傾 塵俗之談 (이불경 진속지담)
手不捉 錢弊之寶 (수불착 전폐지보)
肌不接 絹帛之 (기부접 견백지유)
身不近 檀家之施 (신불근 단가지시)
影不過 尼寺之垣 (영불과 니사지원)
鼻不 辛之菜 (비불후 신훈지채)
齒不齧 生靈之肉 (치불설 생령지육)
心不繫 是非之端 (심불게 시비지단)
意不轉 逆順之機 (의부전 역순지기)
禮不揀 童女之足 (예불간 동녀지족)
舌不弄 他人之咎 (설부농 타인지구)
- 瞿曇後末 性徹 구담후말 성철
이진두 논설위원
[불교신문 2709호/ 4월6일자]
2011-04-02 오전 11:13:07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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