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도리사 태조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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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태조선원. 설선당 왼쪽 한적한 곳에 있다. 창건의 뜻이 깊은 도리사에 선원이 재개원 될 날을 기다리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桃李寺)의 현주소다. 그러나 우리는 도리사를 얘기할 때는 보통 ‘선산(善山) 도리사’라고 한다. 성철스님은 1943년 이 절 태조선원(太祖禪院)에서 동안거를, 그 이듬해 하안거를 했다.
도리사는 신라불교 최초 가람이다. 도리사에서 펴낸 절 안내 팸플릿과 사찰입구 안내판에는 “묵호자(墨胡子)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 불교의 공인(公認, 법흥왕 15년)보다 앞서 눌지왕대(417~458)에 신라로 건너와 불교의 포교를 위해 일선군(선산)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 바 있다.
실로 신라불교는 아도화상의 전교(傳敎)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선산의 태조산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눈 속에서 피어남을 보고 그 자리에 비로소 절을 창건하니 이가 곧 해동최초 가람 도리사…”라 도리사의 창건을 밝히고 있다.
오도 3년…광복 두해 전 이곳서 두 차례 안거
<삼국유사>에 아도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연기와 널리 퍼진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우리말 사전에는 아도스님은 중국 진(晉)나라 스님으로 고구려에 귀화하고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도리사 태조선원은 도리사가 있는 산 이름이 태조산이어서 그리 부친 이름인 것 같다. “도리사 선원은 파계사 성전(聖殿), 은해사 운부암, 비슬산 도성암(道成庵)과 더불어 영남 4대 도량의 하나로 꼽힌다.
‘太祖禪院’ 현판글씨는 3ㆍ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 선생의 필체다. |
1928년 들어 도리사 선원 청규(淸規, 선원의 규율)가 보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도리사 선원의 개원은 1930년으로 보아야 한다. 1930년에 도리사 전 주지 이석우(李石牛)스님이 선원을 창설하고 안거대중 20여명을 수용하였다는 <불교>지(일제시대의 잡지)의 기록(제104호)이 그 사정을 잘 보여준다.
선원이 개원되고 1931~1943년 조실 정운봉(鄭雲峰)스님, 선덕 김남화(金南化)스님을 모시고 17~20명 대중이 수선 정진했으며 석우스님은 화주(化主)로서 선원을 외호하였다.
이몽경(李夢耕), 이해산(李海山), 김월호(金月湖), 김영광(金靈光), 박석두(朴石頭), 정의운(鄭義雲), 김만화(金晩華), 유보문(柳普門), 윤관하(尹貫河), 김성월(金聖月), 김성오(金性悟), 김영경(金影耕) 스님 등이 입승으로 활약했다.
1944년에는 이곳 도리사에서 성철스님이 하안거를 지냈다. 1957년 진제(眞際)스님이 태백산 동암(東庵)에서 두 달 동안 홀로 정진하다 도리사로 옮겨와 7~8명의 납자와 동안거를 하며 한 철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선원은 6.25 한국전쟁과 정화운동의 와중에서 폐원된 듯하다. 1975년에 들어 하안거를 맞이하여 주지 법성(法聲)스님의 원력으로 선원을 다시 개원했으나 도리사가 관광사찰이 되면서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수행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자 문을 닫게 되었다.”(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선원총람> 956쪽)
도리사 태조선원을 찾아가던 날. 제9호 태풍 ‘무이파’가 서해안을 비롯하여 전국곳곳을 할퀴고 간 뒤인 8월9일. 태풍은 지나갔다고 해도 국지성 호우라는 이름으로 간간이 소나기가 사납게 퍼붓는 그런 날이었다. 절 근처까지는 흐린 날씨이기는 해도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일주문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海東最初伽藍聖地 太祖山 桃李寺)’라는 현판의 일주문.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을 자랑하는 일주문은 1993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절까지는 10리도 넘었다(약4.5킬로미터). 일주문이 본당과 이렇듯 멀리 떨어져 있는 절도 도리사에 와서 처음 본데다 일주문 크기도 여느 절과 달라 놀랐다.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의 일주문. 여기서 도리사 본당까지 거리가 약4.5킬로미터에 이른다. |
큰 비는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절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여전했다. 여기저기 사진촬영을 할 때도 우산을 받쳤다.
현재의 도리사는 법등(法燈)스님(조계종 호계원장) 주석이후 경역을 넓히고 당우(堂宇)를 건축하여 이름그대로 신라불교초전지로서의 위용을 두루 갖추었다. 극락전,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15평 크기의 건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고종12년(1875년) 용해화상(龍海和尙)이 중수하고 이듬해 단청을 올린 도리사 중심 불전이다. 이 극락전을 비롯하여 도리사 석탑, 석가세존사리탑 등 옛날 그대로의 유물에다 도리사 중건 10개년 계획을 세운이래 건립된 삼성각, 수선료, 설선당 등이 있다.
부처님 법 아무리 귀해도 이를 바로 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스님의 심회는 얼마나 깊었을까
불교개혁의 절실함 그 의지가 태동하는 시절
법등스님이 주지를 맡아 1982년 건립된 적멸보궁과 사리탑, 아도화상 존상(尊像)은 사부대중을 비롯한 참배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태조선원은 설선당 왼쪽 한적한 곳에 있다. 太祖禪院 현판 글씨는 현대의 명필이자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필체다.
사세가 여느 사찰보다 크고 창건의 뜻이 깊은 도리사에 선원이 재개원되지 않고 있는 아쉬움은 크다.
비 내리는 산사(山寺), 비를 맞으며 태조선원 앞에 섰다. 큰 비가 아니라 그냥 맞았다.
성철스님은 당시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때는 일제말기, 우리가 광복을 맞기 두 해 전이다. 스님은 오도이후 3년을 맞은 때다.
1982년 건립된 적멸보궁. |
신라 최초가람에서의 도인 성철스님의 심회(心懷)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필자 나름대로 당신의 심중을 헤아려 보았다. 이 절이 갖는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상을, 그리고 아도화상의 전법륜(轉法輪) 의지, 부처님 법이 아무리 높고 귀해도 이를 바르게 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을 필자는 새삼 가져 보았다. 여기에 오면 시원찮은 공부를 한 필자도 여러 생각이 오고가는데 하물며 도인 성철스님의 심회는 얼마나 깊었을까.
필자는 스님의 도리사 시절을 ‘전법륜의 큰 틀’을 구상한 기간이라 자리매김하고 싶다. 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한 뜻 그대로 스님은 당신의 불법 전파의 큰 뜻을 이곳에서 구상했다고 본다. 이는 스님의 다음 행적에서 유추한 것이다. 스님은 도리사를 떠나 경북 문경 대승사로 갔다. 거기서 스님은 도반 청담스님과 우리 불교의 앞날, 종단의 미래를 두고 깊은 논의를 한다.
“… 두 분은 밤을 새면서 이야기해도 다함이 없었겠지요. 대승사에서는 두 분이 해인사에 가서 총림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영산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이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을 해보자고 하셨지요.
…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서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 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쌍련선원에서 하셨어요.
… 두 분이 얘기를 하는데 무슨 도표 같은 것을 의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국 총림의 도표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율원을 하고, 율원을 하는 데는 누구누구다, 사람도 배치하고 하시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두 분의 뜻이 같았기 때문에 두 분은 시종(始終) 변화가 없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경>에서 묘엄스님 회상)
아도화상의 존상. 참배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성철스님의 평생 의지는 이후 봉암사 결사로 그 실현을 대중 앞에 처음 드러냈다. 스님은 일제치하에서 허물어져가는 불교의 정황을 깊이 보고 파악했다. 또한 청정승가 수행가풍의 확립 의지도 불태웠다. 불교개혁의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도반 청담스님이 있었다. 두 분의 의기투합의 결실은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았다. 그 의지의 태동이 도리사 시절이었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부처님 法으로 돌아갑시다부처님 법(法)으로 돌아갑시다. 삼계의 도사(導師)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은 불교 만대의 표준입니다. 무상대지(無上大智)와 무애혜안(無碍慧眼)으로 통찰하여 제정하신 숭고하고도 장엄한 부처님의 법은 참으로 삼계의 지침이며 사생의 등불이니 불자의 절대적 의지처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제도도 부처님 법에 위배되는 것은 불교의 반역이며 파괴이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교단내에 부처님 법에 어긋난 점이 있다면 이를 단연코 시정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 불자입니다.
청정한 계율을 견지하여 훼범(毁犯)하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최후 유촉은 불교의 생명입니다. 승려가 될 때에는 반드시 계법(戒法)을 수지(受持)하여 이를 훼범하면 자격을 상실함은 불교의 영원한 철칙입니다. 과거 수천년간 우리 불교는 철석같은 계율의 기반위에서 크게 융성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성쇠(盛衰)는 승려의 지계(持戒) 여하(如何)에 달려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불교를 파괴하는 식민정책으로 승려의 대처(帶妻)를 권장하여 대처중(帶妻衆)이 교단을 지배하여 우리 불교사상 일대 오점을 남겼습니다.
광복후 산간에 칩거하던 비구스님들이 분연히 궐기하여 정화불사(淨化佛事)를 일으켜 부처님의 율법을 회복하여 청정비구로서 교단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이 정화가 성공한 근본요인은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교단의 내외가 일제히 호응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 법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면 정화불사는 실패하였을 것이며 앞으로도 어떠한 불사든지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면 그러한 행동은 교단 내외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할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청정의 기치를 높이들었던 정화불사가 엊그제인데 승단의 극히 일부에서 청정한 계율을 문란케 하는 일이 있다하니 크게 우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시대에 와서 계율이 침해되어 교단이 쇠퇴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 앞에 크나큰 죄인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우리는 교단내의 율법에 위배된 점을 철저히 구명(究明)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단이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요 그러지 못하면 교단이 쇠퇴의 길로 들어 설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 교단의 사활(死活)문제이니 오직 정법(正法)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는 용맹 신심으로 대동단결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 이 땅위에 불교를 영원히 꽃피게 합시다.
- 종정교시(宗正敎示) 1983년 5월 |
[불교신문 2745호/ 8월24일자]
도리사 태조선원. 설선당 왼쪽 한적한 곳에 있다. 창건의 뜻이 깊은 도리사에 선원이 재개원 될 날을 기다리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아래 ‘太祖禪院’ 현판글씨는 3ㆍ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 선생의 필체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의 일주문. 여기서 도리사 본당까지 거리가 약4.5킬로미터에 이른다.
1982년 건립된 적멸보궁(위)과 아도화상의 존상. 참배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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